슬라보예 지젝의 <폭력>(21세기문화원, 2026) 개정 번역판이 나온다. 초판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로부터 15년만이다(지젝의 원서는 2008년에 나왔다). 개정판에 붙인 서문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이 이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공리는 단순하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폭력적’이라고 인지하는 바로 그 배경, 곧 ‘비폭력적 정상 상태’야말로 가장 잔혹한 객관적 폭력이 작동하는 장이라는 사실이다. 주관적 폭력이 평온한 수면 위에 던져진 돌맹이라면, 객관적 폭력은 그 수면 자체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다. 우리가 뉴스 속의 가시적 폭력에만 매혹되는 한, 그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은폐된다. 지젝의 폭력론을 다시 읽는 것은 가시적 폭력을 우회하여 그 배후의 구조를 식별하려는 하나의 인식론적 훈련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러한 시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오늘날의 국제 정세는 폭력에 대한 지젝의 문제 설정이 단순한 철학적 도발이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임을 보여 준다. 이를테면 2025년 말 러시아가 발표한 ‘오데사 회랑’ 문제를 복기해 볼 수 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러시아의 완화 조치나 인도주의적 개방으로 보도했지만 지젝은 칼럼에서 그 명칭 자체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주목한다. 공해상에 설정된 이 ‘회랑’은 실질적으로는 식량 유통을 특정 권력의 통제 아래 두는 장치이며, 그것을 ‘개방’이라 부르는 행위는 권력의 행사를 은폐하는 언어적 장치일 따름이다. 이때 폭력은 더 이상 총칼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통 경로와 시스템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구조적 폭력으로 탈바꿈한다. 인도주의라는 외양은 오히려 인도주의조차 무기화될 수 있음을 시사할 뿐이다.

​기술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상징적 폭력도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생성형 AI와 거대 테크기업들은 온라인에 축적된 인류의 집단적 지식, 곧 ‘일반 지성’을 포획하여 지대 추구의 자원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사유는 점차 데이터의 형태로 환원되고, 해석과 판단의 기능은 알고리즘으로 외주화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매끄러운 인터페이스는 바로 이 상징적 거세를 은폐하는 표면이다. 우리는 지금 ‘이해 없는 지식’이 증식하는 시대, 다시 말해 정신 자체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형되는 국면에 들어서 있다. 사유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확률적 예측만이 남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징적 폭력의 상황이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이 법과 규범의 수호자가 아니라 그것을 외설적으로 전유하는 주인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그는 거짓말과 모욕을 통해 지지자들과 일종의 향유를 공유하며, 규범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욕망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급기야는 네타냐후의 이스라엘과 합작한 이란 전쟁을 통해서 광기적 폭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우리 세계는 가장 중증의 광인이 통제권을 장악하고 의사 행세를 하는 정신병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젝의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진실은 이러한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가 단순히 대중의 무지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경제적·구조적 폭력을 방치한 채 도덕적 우월성에 안주했던, 지난 시기 자유주의적 정치의 한계가 역전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젝은 진작에 ‘종말의 시대에 살기’라고 표현했는데, 종말은 더 이상 비유나 수사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자정 이후’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다가올 파국을 예견하는 단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파국의 내부에서 그것을 사유해야 하는 조건에 놓여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태를 성급히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후퇴하는 것. 『폭력』과 함께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인식의 지연, 인식을 위한 지연이다. 그러나 이 지연은 무력함이 아니라, 대타자의 보증이 사라진 시대에 조건을 재구성하기 위한 전제다. 진정한 의미의 ‘행위’는 바로 그러한 조건에서만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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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6-04-0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을 중고로 구해놓고 읽지 않았는데, 그냥 개정판을 구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