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마지막 소설 <코스모스>(1965)를 어제 강의에서 읽었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네 편의 소설 가운데(소설로 한정하면 개정증보판까지 낸 한권의 소설집과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한권이 더 있다. 우리말로는 희곡집도 번역돼 있고 봄학기에 읽을 예정이다) <트랜스아틀랜틱(대서양 횡단)>(1957)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라 현재로선 <페르디두르케>(1937)와 <포르노그라피아>(1960), 그리고 <코스모스>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곰브로비치 소설의 전부다.
탄생 100주년 되던 해(2004년)에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작가여서 곰브로비치와의 만남은 이제 20년 남짓 되었다. 하지만 뭔가 오래된 듯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쿤데라의 에세이들에서 호명됐던 이름이어서일 것이다.쿤데라를 통해서 우리가 소개받은 3대작가가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브로흐와 함께 곰브로비치였던 것이다(모두 쿤데라 기준 중유럽 작가들이다).
거기까지가 읽기 전 곰브로비치라면, 읽은 후의 곰브로비치는 또다른 존재감을 뽐낸다. 쿤데라의 소개대로 가장 철학적인, 더 정확히는 문학과 철학의 가장 흥미로운 만남의 사례가 되는 작가가 곰브로비치여서다(쿤데라는 사르트르와 비교하면서 곰브로비치의 오른손을 치켜올린다).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를(가령 형식과 미성숙의 대립이라는 주제) 이토록 흥미롭게 변주하면서 기발한 에피소드로 그려나간 작가를 또 떠올릴 수 있을까?(‘철학적인 작가‘로 1960년대 나란히 주목받은 보르헤스와 베케트가 비교될 만하다).
무의미 철자들이라고 할 <페르디두르케>와 달리 <포르노그라피아>와 <코스모스>는 정확하게 제목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세 작품이 삼부작으로 묶이기도 하지만 두 작품만 따로 합본되기도 한다). 비톨트란 이름의 인물이 각각 조연 화자와 주인공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도 연결고리다. <포르노그라피아>가 중년 남자들이 자기들의 고정관념(각본)을 젊은 남녀에게 억지로 들씌우려다가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면(시간배경은 엄중하게도 독일 점령하에 있던 1943년의 폴란드다), <코스모스>는 무질서한 자연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려는 강박증적인 시도를 소재로 삼는다. 희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점도 공통점.
아래 인용은 이야기의 초반 화자(비톨트)의 형이상학적 강박이 노출되는 장면이다. 아직 학생 신분인 나(비톨트)는 부모와의 불화를 잠시 피하고자, 시험도 보류하고 폴란드의 여름휴양지 자코파네로 향하는데 도중에 역시나 상사와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처지에 휴양지에 온 푹스와 동행하면서 같은 숙소에 묵게 된다. 이들은 숙소에 이르기 전에 숲속에서 철사에 목 매달린 채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참새를 보고 놀란다. 그리고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궁금해한다. 이런 발단이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매우 궁금한가? 당신은 곰브로비치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독자다...

달도 없이, 놀랄 만큼 많은 별들로 가득 채워진 밤하늘, 그별 무리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별자리들이 나타났다. 북두칠성, 큰곰자리, 그 별자리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내가 알지못하는 다른 별자리들 또한 중요한 별자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자취를 감춘 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선을 이어 가며 모양을 연결하려고 애써 보았다... 하지만 모양을 식별해 내고, 별자리를 그리는 일에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이곳에서도 또다시 너무 많은 대상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굴뚝과 파이프, 부서진 배수관, 처마의 돌림띠, 작은관목, 아니면 더욱 복잡하고 골치 아픈 조합체들, 이를테면 꺾어졌다가 사라져 버리는 오솔길이라든지, 그림자의 리듬과 같은 것들이 금방 나를 지치게 했다... 역시 여기서도 마지못해 형태와 패턴을 찾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겨웠고, 참을 수가 없었으며, 변덕이 났다. 그러다 문득 이것들이 내 주의를 끌게 된 궁극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의 뒤에‘ 혹은 ‘~의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의 ‘뒤에 있다는 사실, 굴뚝 뒤에 파이프가 있고, 부엌의 귀퉁이 너머에는 담벼락이 있고, 그건 마치...마치...마치… 카타시아의 입술이 레나의 작은 입술 뒤에 있는 것과 비슷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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