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 <흰>은 태어나서 두 시간만에 죽은 언니를 애도하는 소설이면서, 바르샤바 체류 시기에 상당 부분이 쓰인, 그리고 바르샤바의 이곳저곳 다녀본 경험이 밑바탕이 된 바르샤바 소설이다(바르샤바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 도시‘로만 지칭된다). 한강은 광주 소설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해 여름 바르샤바로 떠나와서 겨울까지 머물렀다. 인용한 대목은 바르샤바봉기박물관(소설에서는 ‘기념관‘이라고 지칭된다)에서 영상자료를 보고 귀가하는 길의 느낌을 적고 있다.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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