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놓친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번역비평'에 관한 제언인데, 덕분에 생각이 나서 지난달말에 열렸던 영미문학연구회(영미연)의 학술대회 자료집까지 홈피(http://www.sesk.net/board_focus/content.asp?num=174)에 가서 챙기게 됐다(학술대회에 가보려고는 했지만 여력이 되질 않았다). 한기호 소장은 학회의 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발표문('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가운데 일부를 칼럼기사(한기호의 출판전망대)와 함께 옮겨놓는다. 많은 부분들에서 동의하며 공감할 수 있는 제안들이다.
한겨레(07. 11. 03) '잡초’ 골라낼 번역비평 필요하다
지난해 10월,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가 따로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 이 땅에서는 번역의 윤리를 질책하는 커다란 광풍이 불었다. 일주일이 넘게 수많은 매체에서 이에 대한 견해와 논평을 요구하는 바람에 전화로 ‘마시멜로’ 소리만 들어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리번역의 관행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고 번역회사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하긴 요즘 번역회사에 번역을 맡기면 번역료가 싸고, 속도도 빠르며, 문장이 깔끔하다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단다. 하지만 오해 마시길.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은 오역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번역회사가 문장 교열자를 따로 두어 원뜻과 관계없이 그럴싸하게 다듬어주고 있다나.
지난달 27일에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 주최의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영미연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점검한 성과인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1, 2권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날 토론에서는 번역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한 발표자가 인용한, 번역은 “터키 카펫의 뒷면”이라거나 “셰프의 요리를 운반하던 웨이터가 지독하게 진부한 대중적 취향으로 말미암아 위에다 케첩을 뿌려서 내놓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영미연의 작업에 대해서도 화초(잘된 번역)를 키울 것이냐 잡초(잘못된 번역)를 골라낼 것이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극단적으로 잡초를 고를 시간에 화초를 키우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겠느냐는 지적마저 있었다. 하지만 영미연의 작업은 이 땅의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인문학이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인문학 서적만큼은 최대한 원전의 뜻을 제대로 담은 번역서를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발터 베냐민이 ‘번역자의 사명’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다’의 본질은 누군가 ‘아니다’를 말했을 때 쉽게 드러난다. 영미연의 작업처럼 누가 잡초라고 말하며 호루라기를 불어줄 때에야 화초의 본질이 확실해지는 법이다. 물론 잡초로 지적받은 사람이 고의로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 꾸준히 ‘아니다’라고 말해주었을 때 ‘이다’의 본질을 쉽게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영미연의 작업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누군가가 계속해야 할 작업이다. 물론 그 일이 상시적으로 지속되려면 번역비평의 저널이 꼭 있어야 할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 나는 내내 마음먹고 있던, 내년 2월에 계간 형태의 저널을 꼭 창간하겠다는 다짐을 그만 털어놓고 말았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발표자가 서두에서 『마시멜로이야기』 사건이 터졌을 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 것은 그런 자기계발서에서는 번역의 질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심정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책은 읽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외국의 자기계발서는 국내 현실에 맞춰 적당히 가감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요즘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대리번역을 연결시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삶의 길을 터놓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좁다란 길일망정 누군가 터놓기만 하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단지 몇 사람이 지나간 흔적 때문에라도 나중에 터널도 되고 고속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길을 내고 누가 다닐 것인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문학은 서유럽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길을 내기 위해 거친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가져와 활용한 면이 크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를 두고 서양의 경험적인 것을 매우 선험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조동일 교수는 온통‘지식의 수입상’만 넘친다고 일갈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서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텍스트를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원전부터 충실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계가 많다. 그래서 외국 원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언어가 되지 않는’ 대중이나 기초연구자는 번역서라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런 사람 중에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데 신뢰할만한 원전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철학, 정치학 등에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플라톤의 경우 일본에서는 기무라 다카타로木村鷹太郎가 1903-1911년에 걸쳐 완역작업을 했고 후잔보冨山房라는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요 저작들만 중복 출판하다가 올해 4월에서야 전집 간행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네 권 출간된 상태다. 팔릴 것 같은 책은 수십 종, 경우에 따라서는 1백 종이 넘게 변종이 생산되지만 꼭 번역되어야 할 책이 번역되지 않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번역의 질은 또 어떤가?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인문서의 경우 더 그렇다. 나카야마 겐(中山元)의 『사고용어사전』(2000) ‘번역’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저 쪽으로(trans) 이끈다(ducere)라는 동사에서 생겨난 말인 번역. 여기에 있는 것을 저쪽 물가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이 행위는 항상 배리背理에 시달린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완전히 같은 가치를 가진 언어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로 말한 것을 별개의 언어로라도 거의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진 말로 바꾸지 못했다면, 철학의 보편성 자체를 보증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독일어가 없었다면 철학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한 듯한데, 일본어로도 하이데거의 사고는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와의 커다란 차이이다.
시에서는 단어 하나가 그 작품 자체이고,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을 상당히 앗아가 버린다. 시인은 언어를 한 번 쓸 수 있는 생물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개념을 사용해 사고하는 작업이다. 개념이라는 것을 번역할 수 있는 한, 철학 텍스트는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은 배신행위이며 늘 어떤 의심에 시달린다. 원작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번역은 필터를 거친 전달에 지나지 않으며, 그 텍스트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원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번역된 텍스트는 항상 뒤떨어진 것일까? 번역으로 무엇인가가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을 것인가?”
나카야마는 이어서 “번역이라는 작업도 원작의 의미에 가장 유사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게 된다(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 번역을 할 때 원작자의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원작자가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 때로 번역자는 원작자가 사용하지 않은 표현도 덧붙인다. 그 쪽이 원작자의 의도를 잘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번역자의 자의적 생각이 존재함은 피해갈 수 없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번역자가 애정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의적 생각을 덧붙인다면, 원작자의 표현과 번역자의 표현은 ‘커다란 언어의 두 가지 파편’처럼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카야마는 “외국어로 표현된 텍스트를 읽는 최선의 방법은 원문 읽기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번역해보는 것이다. 번역해봄으로써, 원문의 텍스트에서 보고 지나쳤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번역이라는 행위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무엇으로, 그리고 역으로 언어의 차이로 인해 처음으로 부각되는 것”이라며 인문학 연구자가 스스로 번역해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무엇인가?
사실 번역의 문제는 지금껏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적이 없다. 지난 몇 년간 학술진흥재단 등의 번역지원으로 적지 않은 책이 출간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출간비용에 비해 지원액이 매우 미미해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적지 않다. 국가의 지원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를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텍스트 선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보공학의 창안자인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에 따르면 정보편집의 중요한 용법 중에 ‘계통수系統數’가 있다. 계통수란 계보系譜이고 계열系列이며, 계도系圖다. 우리 눈앞에 있는 정보나 물건이 과거에 어떤 흐름을 갖고 있었는지 그림으로 그려서 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지식의 툴’이 계통수라는 편집용법이다.
모든 인문학 분야의 책도 계통수로 그려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에서 그 분야의 메인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큰 가지에 해당하는 책부터 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원 텍스트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그 텍스트에 대한 비판서는 출간된다. 이런 경우 원전은 보지 못하면서 비판만 접하는 이상한 경우가 된다.
따라서 출판계 전체적으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책을 선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 전문출판사가 더욱 늘어나야 한다. 전문출판사는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책을 출간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1천 부의 수요도 잘 이뤄지지 않는 마당에 책을 펴내려는 출판사가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문학 원전의 경우에도 꼭 필요한 텍스트는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 같은 단체에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문학원전의 목록을 예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둘째, 전문번역가를 키워야 한다
지난 5월 17일, 교육부는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교육 분야에서는 인문학 토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논문형 작품만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온 관행을 바꿔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확대하고, 해마다 번역 전문가 1000명을 선발해 1인당 500만원씩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년에 50억씩 10년 동안 5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발상이다.
이 안이 실행되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원전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우리 사회의 번역이나 번역자에 대한 인식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제로 실행된다고 해서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인가? 게다가 1000명씩이나 선발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인적자원이 있는가?
한 번역가는 번역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글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을 들었다.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어를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수한 소설가는 번역을 잘 할까? 소설가는 단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글을 쓰기 때문에 번역을 꼭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번역은 언어능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적 사유를 할 줄 알면서 폭넓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의 독서습관이나 인문서가 팔리는 상황을 갖고 미뤄 짐작해볼 때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해마다 1천 명씩 선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선발이 되었다 해도 번역문만 있으면 뭣하나? 그것이 실제 상품(책)으로 출간되어 독자와 만날 수 없다면 아까운 세금만 낭비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출판사와 연계해 책을 펴낸다는 계약서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500만원은 크게 부족한 돈이다. 돈만 던져놓고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정책을 내놓고 인문학을 살리겠다니,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학술번역의 가치를 폄하하고 홀대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문번역가란 어떻게 키워질까? 2001년에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발표한 「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는데 한국출판은 여기에서 한발작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앞에서 내놓은 방안은 대학(교육기관)과 출판현장과 번역가가 삼위일체가 되는 시스템에서 해결할 수 있다.
지금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실력 있는 번역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번역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번역료는 10년 전에 비해 200자 원고지 한 장당 1천 원 정도 오른 것에 불과하다. 영어번역의 경우에도 대부분 장당 2,500-4,000원 수준인데 8,000-10,000원 정도가 되어도 그리 높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2,500원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1만5천원 정가의 책인 경우 1천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이런 출판을 기피한다.
또 베스트셀러가 되더라도 번역자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 있다. 출판사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지만 번역자에게는 처음 받은 번역료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번역자가 한 소설시리즈의 번역 인세로 수억 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전에 몇 년간 매절 번역료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일을 하는 희생을 감수한 후에야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셋째, 전문편집자를 키워야 한다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해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심한 경우에는 200자 원고지 1장당 1천원의 번역료로 적당히 눙치기도 한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을 맡기고 그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게 되는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정도다. 일부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가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가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한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요즘에는 싼 번역료에 속도가 빠르고 깔끔하게 번역하는 번역전문회사들도 있다. 전문 ‘교열자’를 두어 거친 번역문도 깔끔한 문장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원문을 대조하며 일일이 교열하는 것이 아니어서 전혀 엉뚱한 문장으로 만들어버릴 확률도 높다. 편집자 또한 그런 문장은 기계적으로 책을 펴내는 경우가 많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지만, 그 밖의 경우 대부분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수많은 편집자는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는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주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때도 많다.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새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만약 번역자가 이런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권만 성실하게 번역해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지 않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최근에는 ‘기획출판’이 강조되면서 기획 같은 ‘고상한’ 일은 내부에서 하고 ‘교정․교열 같은 하찮은 일은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 일이 늘어나 전반적으로 텍스트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능력 있는 편집자를 키우자는 것이 공염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것은 우리가 꼭 걸아가야 하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넷째, 번역비평이 있어야 한다
규칙의 본질은 비규칙적일 때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군가 ‘아니다’라고 호루라기를 불면 ‘이다’라는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간헐적으로 번역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개인 또는 단체가 있지만 이것이 이뤄지는 상시적인 저널이 있어야 한다.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 점검한 것은 사업단이 스스로 밝혔듯이 “좋은 번역을 가려내는 길잡이이자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2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저널을 통해 항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이다.
다섯째, 도서관 등 공적 수요부터 키워야 한다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은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번역서뿐만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천-1만 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다. 이것은 출판뿐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을 일삼지만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07.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