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에 새로 나온 책 몇 권에 대한 '낚시질'을 하다가 첫 페이퍼부터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되기 전에). 바쁜 일들도 많은지라 그냥 '후퇴'하기로 한다. 대신에 미친 척하고 사들고 온 아리스토렐레스의 <형이상학> 두 권에 대한 '신고식'은 해둔다. 왜 두 권이냐면, 최근에 나온 완역본 <형이상학>(이제이북스, 2007) 외에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왔던 발췌본 <형이상학>(문예출판사, 2004)을 한꺼번에 사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로스(Ross)의 영역본을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박스에 들어가 있나?). 모스크바에서 사들고 왔던 러시아어본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러시아어 아리스토텔레스로 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시학>을 갖고 있다. 아래 이미지가 러시아어 주석본 <형이상학>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들의 경우 모두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영역(http://ebooks.adelaide.edu.au/a/aristotle/metaphysics/)과 러시아어역(http://www.lib.ru/POEEAST/ARISTOTEL/metaphiz.txt)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즐겨찾기에 추가해놓으니 대략 책을 읽을 만한 준비는 다 된 듯싶다. 그러고 드는 생각. 영어나 러시아어 독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그리고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우리는 왜 거금을 주고 구입해야지만 읽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런 고전 류는 국가가 번역판권을 인수해서(인문한국사업 같은 데 들어가는 비용의 일부를 이런 데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서비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완역본 <형이상학>의 역자는 아직 학위를 마치지 않은 소장 고전연구자로 이미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 2005)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고, 현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번역중이라고 한다. 작품의 의의나 번역의 품을 고려할 때 거의 '올해의 번역상'의 유력한 후보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으로 펼쳐든 '해설'에서 기본 용어들의 다소 파격적인 번역어들과 만난다. 'pathos(파토스)'를 '겪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고전연구자들끼리 '합의'가 된 번역어인지 모르겠지만 생소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다.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 사용하다 보면 새 번역어들이 입에 익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건 '있음론' 대신에 '존재론'이란 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한 '존재'를 '있음'이라고 옮기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있음'이나 '있는 것'이 '존재'나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이며 이해가 쉬운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우리의 일상에서 '있는 것'이란 말을 쓸 일이 있는가?).
고전의 일상어 번역에 대해서는 김남두 교수(역자는 그 제자로서 이 번역본을 스승에게 헌정하고 있다)의 견해가 잠시 소개된 적이 있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43750.html), 그는 "일상어가 학술어 대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일본어 조어가 일상어를 대신해 학술어가 되었"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상어와 학술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한다고 했으나 표기 원칙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했다. 당분간 우리는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과 같이 쓰는 학문 '이중어' 시대를 살아가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읽은 <형이상학>의 첫문장이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이다. 두 번역본에서 첫문단만을 대조해보겠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덕을 보고 있"다는 로스의 영역도 같이 옮겨놓는다(물론 그 덕은 주로 주해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시각)을 즐긴다.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하건대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감각들 중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지각하며) (시각을 통해 사물들의) 여러 가지 차이성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이제이북스판, 29쪽)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러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 증거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관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 의도가 없을 때에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감각 가운데 그것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수많은 차이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문예출판사판, 50쪽)
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An indication of this is the delight we take in our senses; for even apart from their usefulness they are loved for themselves; and above all others the sense of sight. For not only with a view to action, but even when we are not going to do anything, we prefer seeing (one might say) to everything else. The reason is that this, most of all the senses, makes us know and brings to light many differences between things.
다소 특이한 점은 "원문에 좀더 충실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완역본에서 보이는 일상어와 개념어 번역의 혼용이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나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나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보다 문어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은 "[시각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보다 구어적인 쪽인 듯하지만 역시나 좀 낯설다. 이러한 의도적인 선택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읽히는 쪽은 발췌역쪽이다. 물론 발췌역본에서도 마지막 문장은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었지만('그것은' 같은 대명사 때문에).
이 <형이상학>에 대한 두 종류의 우리말 번역을 맛보기로 읽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두 번역서 모두 학술적 가치를 지닌 업적으로서 의의를 갖지만 ('일상어 번역'이란 말이 표방하는) 보다 대중적인 번역으로서는 난점이 있어 보인다는 것. 연구자나 고급독자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아무런 각주 없이도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때 '살아있는 번역'으로서 의의를 가질 테지만(가령 조안 스파르의 <플라톤 향연>(문학동네, 2006) 같은) 이번에 나온 완역본도 그렇고 국역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전공자'나 '연구자'들이다(온라인의 영역본 <형이상학>에는 아무런 각주도 붙어 있지 않으며 영어 또한 평이하다). 그 점은 책머리에 실린 '해제'의 마지막 문단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옛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은 물론 본 역서와 더불어 원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 좋은 번역은 없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옛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옛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는 독자들도 그리스어-한글 찾아보기에 나와 있는 각 낱말의 어원 설명과 함께 해당 영어 번역어를 잘 활용하면 원어가 갖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25쪽)
역자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엣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에겐 사실 이 번역서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아니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의 좋은 번역"은 없을 뿐더러 그리스어 독해력을 갖고 있는 경우엔 대개 영역이나 독역본을 읽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터여서 그걸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느 경우이건 국역본보다 더 이해가 용이하다). 문제는 그렇게 읽은 '앎'을 일반 독자나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 경우이다(전공자들이야 이심전심으로, 혹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딜레마다. 아무리 전달하고 싶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전공자/번역자가 원문을 읽고 갖게 된 '앎'은 어떤 앎인가? '번역 이전의 앎'이다. 그리스어 원문 자체에서 얻는 어떤 '상'이기에(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 가지 앎이지만 궁극의 앎은 아니다(전달 불가능한 앎, 곧 가르칠 수 없는 앎이니까). 번역의 불가능성이란 번역 자체의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이 또한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가령 김소월의 아무시나 다른 언어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기에 어원 설명과 영어 번역어를 세심하게 고려해가며 읽어야 원어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조언은 번역 자체의 의의를 침식한다. 원문으로 읽을 때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번역본만으로도 <형이상학>의 내용과 가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도가 역자의 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독자들에게 더 충실한 번역이 한번 더 출간되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이 본래 앎을 욕구한다면 말이다...
07. 11. 16.
P.S. <형이상학>의 인용문 번역들을 참고하여 나대로 약간 윤색해본다. 말하자면 나대로의 '앎'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앎을 원한다. 우리가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슨 필요에서가 아니라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긴다. 무엇보다도 시각의 경우가 그렇다. 무얼 하려고 해서뿐만 아니라 딱히 무얼 하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보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여느 감각들보다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사물들간의 차이 또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