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684호)에 게재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여느 때와 달리 며칠 앞당겨 옮겨놓는다. 그건 칼럼 자체가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돌이켜보기 위한 것이었고 오늘은 그 9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아무런 공식적인 기념행사도 갖지 않는다고 하며 아예 무관심하다고 전한다(현지 르포기사는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25008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260147 참조).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푸틴 대통령은 2년 전 혁명기념일을 없애고 대신 11월 4일을 ‘국민통합의 날’이라는 새 국경일로 지정했다고(지난 2004년까지만 해도 11월 7일은 국경일이었다!). 이래저래 격세지감을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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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07. 11. 13)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11월 7일은 러시아혁명 90주년 기념일이다. 보통 ‘10월 혁명’이라 불리는 것은 구력(舊曆) 1917년 10월 25일에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이것을 현재 쓰고 있는 신력(新曆)으로 환산한 날짜가 11월 7일이다.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지만 이제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조차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러시아혁명의 의의는 무엇일까? 러시아 혁명과 관련한 몇 권의 책을 들춰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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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해체 이전인 1977년(즉 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에 서문이 씌어진 <러시아혁명>(나남 펴냄)에서 E. H. 카는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해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종종 사회주의의 부정 바로 그 자체였다.”고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 독재체제를 비판했지만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 50주년인 1967년을 기준으로 소련의 인구는 반세기 동안 1억 4천 5백만에서 2억 5천만 이상으로 증가했고, 도시 거주민의 비율은 20%이하에서 50% 이상으로 상승했다. 서구에 비하면 생활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원시적이고 후진적이었지만, 생활수준은 향상되었고 의료 및 교육 서비스는 소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때문에 “1967년의 소련 노동자와 농민은 1917년의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다.”(하지만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2007년 현재 러시아 노동자의 파업 참여인원은 혁명 당시 100만 명 단위에서 1000명 단위로 줄었다. 40년 전과는 또 매우 다른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는 가난하고 문맹인 대중이 아직 혁명적 의식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위로부터의 혁명’이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가혹한 전제주의와 전쟁의 궁핍에서 러시아 인민을 해방시킨 러시아혁명이 바로 그런 혁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혁명>(박종철출판사 펴냄)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요구에 잘 들어맞아서, 그들은 수단이 목적을 훼손하는 방식을 못 보게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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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볼셰비키 혁명은 그것이 이루려고 시도한 변화에 맞먹는 규모의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소련의 역사적 정통성과 스탈린시대를 옹호했던 푸틴조차도 최근 모스크바 남부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여 1937-8년에 자행된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대숙청을 가리켜 너무나 큰 비극이며 믿기 어려운 광기라고 토로한 것은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상징적이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사가 다시 반복되어도 좋은 역사인가에 대한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인들의 회의를 응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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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였던가? 카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가장 높은 이상으로의 전진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사회주의의 진보는 정체되고 일련의 역행과 참화에 의해 중단되었다. 물론 이러한 역행/참화는 피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피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스미스의 보다 구체적인 지적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은 뒤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제대로 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과 부딪혔다. 따라서 그들의 정책은 이데올로기의 소산이었던 것만큼이나 임기응변과 실용주의의 소산이었다. 즉 그들은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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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러시아혁명사는 “1917년에 열렸던 가능성이 자꾸만 닫혀 갔던” 역사로 기술된다. 오늘날 그 가능성은 다시 열릴 수 있을까? “러시아 혁명은 정의와 평등과 자유가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가에 관한 심오한 물음을 던졌고, 비록 볼셰비키가 이 물음에 준 답에 치명적인 흠이 있다고 해도 이 물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결론이다. 러시아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요는 그 오답과 함께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오답을 적어내는 것보다 더 무책임한 일이기에.
07. 11.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