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대기중인 영화들 가운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은 단연 리안의 신작 <색, 계>이다. 이미 여러 저널들의 호평을 접하면서 오랜만에 영화관 외출을 꿈꾸게 하는 작품인데, 눈에 띄는 대로 한겨레21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11/021015000200711010683007.html)를 옮겨놓고 슬쩍 읽어본다. 감독과 주연 여배우(탕웨이)가 내한하여 기자회견 등도 가졌지만 따로 보태지는 않는다. 대신에 장학우가 부른 주제가는 한번 들어보시길(http://www.youtube.com/watch?v=QDWrZuJKGrk).

한겨레21(07. 11. 01) 색에 빠진 자, 계를 잃을지니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대한 오래된 혹은 해묵은 주제다. 이렇게 해묵은 주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데, 리안 감독만큼 적임자도 드물다. 고급스런 대중영화의 장인이자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자인 리안 감독은 오래된 이야기 혹은 통속적 사랑을 사랑이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둔다. 그리고 희열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물의 표정을 날카롭게 잡아내 관객의 마음을 후벼판다. 불가능한 사랑만큼 사랑의 애절함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사랑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는 처연했다. 리안이 이번엔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일본에 점령된 상하이, 친일파 정보부 대장과 그를 암살하려는 여성 사이에 불가능한 사랑이 시작된다. 리안의 <색, 계>(色, 戒)는 서로를 경계(戒)하지만, 서로의 색(色)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BNz5xppQ)

일본의 침략을 피해서 홍콩으로 피난온 왕치아즈(탕웨이)는 외롭다. 그의 친구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그도 자신의 운명을 저항운동에 맡긴다. 밀수업자의 아내인 막 부인으로 위장해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량차오웨이)의 부인(조안첸)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의 암살. 어렵게 이 부부에게 접근하지만 갑작스레 부부는 상하이로 돌아가버린다. 사실 왕치아즈는 암살의 주모자인 광위민(왕리훙)을 연모해 암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왕치아즈는 상처만 받는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흐른다. 광위민이 다시 왕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또다시 막 부인이 돼 이에게 접근한다.

적을 유인하며 연인을 유혹하는 마음

이제 모든 행위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막 부인의 행위는 이에 대한 유인이자 유혹이다. 적을 유인하는 일이자 연인을 유혹하는 행위다. 막 부인은 어느새 자신이 죽여야 하는 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색(色)은 계(戒)를 무장해제시켜버렸다. 이의 거친 숨결은 막 부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달구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진실마저 모호하다. 나의 편인 저항군은 나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적인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를 이용하는 자와 나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가 모호하다.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영화관이 어두워서 영화를 보러가지 않는다는 이도 외롭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던 이는 의심에 지쳤다. 그래서 이는 막 부인을 “믿는다” 보다는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행위는 역설이고, 모든 말은 모호하다. 막 부인은 저항군에게 당신들이 그를 죽여버리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그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부터 사랑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처음으로 이를 만나고 돌아온 왕치아즈에게 친구가 묻는다. “어떻게 생겼어?” 그는 “상상하곤 다르다”고 대답한다.



적나라한 섹스신엔 체념과 위로가

리안의 영화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색, 계>는 집요한 상반신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감정을 잡아낸다.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집요한 클로즈업을 끝까지 견뎌낸다. 20여 년을 연기한 량차오웨이도, 첫 번째 영화에 출연한 탕웨이도 완벽하게 리안의 인물로 변신한다. 미인대회 출신인 탕웨이는 미모보다는 연기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조연배우 누구나 자신의 연기를 해낸다. 이렇게 완벽한 연기에 담긴 무심한 행동이나 스쳐가는 말들은 영화의 공기를 서서히 물들인다. 어느새 쌓인 먼지처럼 어느덧 켜켜이 쌓인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색, 계>는 ‘리안표’ 영화다.

<색, 계>는 스캔들의 영화다. 적나라한 섹스신이 화제를 모았고, 성기와 음모 노출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30분가량 삭제된 채로 상영됐고, 미국에서도 17살 이하 관람금지 등급(NC-17)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제한상영 판정을 받지 않고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세 번의 섹스신은 색에 굴복해 계를 포기한 자의 체념한 표정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쓰다듬는 위로로 남는다.

오늘날 리안만큼 종횡사해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독은 드물다. 서양과 동양, 시대극과 현대물, 이성애와 동성애, 리안은 무엇을 만들어도 대중성과 작품성의 접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왔다. 리안은 뉴욕에 사는 동양인 게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던 <결혼 피로연>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아이스 스톰>에서 1970년대 미국 중산층의 해체를 그렸던 리안은 <와호장룡>으로 홀연히 옛날의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으론 19세기 영국 배경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도 영화로 옮겼다. <색, 계>는 리안이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에 다시 중화권 감독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다. <색, 계>로 그는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2년만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장을 받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색, 계>는 중국의 여성소설가 장아이링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관진펑(관금붕)의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 허우샤오셴의 <해상화>도 장아이링의 소설이 원작이다. <색, 계>는 11월8일 개봉한다.(신윤동욱 기자)

07. 11. 03.

P.S. 그러고 보니 <헐크>를 제외하곤 리안의 영화 대부분을 본 듯하다. <결혼피로연>(1993)의 유쾌한 기억이 어느새 14년전인데, 그 사이에 한 아시아계 영화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의 가치는 저마다에게 다른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 장아이링(장애령)이란 이름이 눈에 띈다(그러고 보니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와 <색, 계>의 분위기가 비슷해도 보인다).

이 걸출한 중국(대만) 여성작가의 작품으론 몇 권이 더 번역됐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재작년에 출간된 중단편집 <첫번째 향로>(문학과지성사)와 <경성지련>(문학과지성사) 두 권뿐인 듯하다. 이 작품들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장아이링(장애령.張愛玲)의 중단편소설집이다. '붉은 장미, 흰 장미', '경성지련'을 포함하여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1944년 상하이에서 장아이링의 유일한 소설집이 <전기(傳奇)>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4년 타이완의 '황관출판사'에서 <장아이링 전집>(전 15권)을 내면서 <경성지련>, <첫번째 향로> 두 권으로 나누어 재출간했다. 한국에 소개되는 두 책은 '황관'의 예를 따랐다.

중국에서는 '루쉰 이후엔 장아이링'이란 평을 듣는다고도 하니까 호기심에라도 읽어봄 직한 작가이다. 이번 늦가을은 장아이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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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가 정말 좋네요. 장아이링은 보관함으로 ost.는 장바구니로 갑니다.

로쟈 2007-11-03 23:51   좋아요 0 | URL
저도 장학우의 목소리는 오랫만에 듣습니다.^^

수유 2007-11-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편안하게, 따라 행복감을 느끼며 보는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을 잘 견뎌야겠지만.

2007-11-04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5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그런 면역력이라면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네요.^^

섬나무 2007-11-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안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투영된 작품은 1995년작 '센스 앤 센서빌리티'까지만이고 이후로는 자신의 모습을 양파껍질 벗듯 벗기 시작했다고 하데요.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보는데 지금은 미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이 영화를 미치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단 말인듯...
양조위에게 그의 눈빛 연기-여자들을 뇌살시키는-는 영화 마지막에만 주문했다던데... 전혀 그렇지 않군요...ㅎㅎ

로쟈 2007-11-05 17:30   좋아요 0 | URL
오늘 필름2.0에서 리안과 탕웨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말들도 잘하더군요...

소경 2007-11-0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XX에서 '장애령'이라 검색하니 그녀의 다른 책들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검색했던 책들인데, 아쉽게도 <색, 계>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합니다...

소경 2007-11-0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 계>까지 번역 되었더라면 이거 친구 밥 한끼에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밖에 없는 빈털털이/수전노임에도 급 선회해서 사려 했을 거에요 ^^; 장학우 노래덕에 <색 계>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