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오랜만에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의 '인문학서평'을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445). 서평 대상은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2007)이다. 책의 출간소식은 지난 7월에 페이퍼로 올려놓은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398654). 아래는 아마도 그에 대한 가장 자세한 리뷰가 아닐까 싶다.

컬쳐뉴스(07. 10. 05) 폭력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사회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그 관리권은 이제 박탈되어야 마땅합니다. 노동계급의 1백50만 명이, 나머지 노동계급 사람들을 포섭해서 합세시켜 가지고 여러분으로부터 관리권을 빼앗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용주 여러분, 그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죠.”
미국 소설가 잭 런던(1876~1916)의 『강철군화』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부르주아계급의 사교클럽인 필로머스 클럽에 초대를 받자마자, 자신의 연인 애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고용주들을 흔들어 놓는 데는 실패했었지요. 당신은 단지 그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돈주머니를 위협할 거예요. 그건 그들의 원시적인 본능의 밑뿌리까지를 뒤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맨 앞에 인용한 것처럼 말했고, 결국 고용주들을 뒤흔들어 놓는 데 성공한다.

『폭력에 대한 성찰』의 지은이 조르주 소렐(1847~1922)은 사상계의 런던, 아니 어니스트라고 할 만하다(공교롭게도 『폭력에 대한 성찰』과 『강철군화』는 모두 1908년에 출간됐다). 소렐이 이 책을 쓴 목적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의회사회주의자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부르주아계급,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미래의 혁명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박애주의에 얼이 빠져 있는 유럽의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활력을 되찾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임을 노동계급 자신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1908년은 노동총연맹(CGT)이 아미앵 헌장을 발표해 기존 정당의 존재를 부정하고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혁명 실현, 노동조합에 의한 생산과 분배의 조직을 선언한 지 2년이 되던 해이다. 요컨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힘이 부쩍 성장하던 해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은 『강철군화』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성장해가던 사회주의운동의 자신감이 반영된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성찰』이 ‘지금’의 우리에게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 현대 사상들의 ‘폭력’ 개념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대’란 대략 1968년 이후의 시기로서, 학문적으로는 구조주의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 1968년은 신좌파 운동이 전세계를 휩쓸던 해이자 온갖 도시 게릴라 단체들의 등장을 부추긴 해이기도 하다. 요컨대 민권운동이나 플라워무브먼트 등으로 대변되는 비폭력이든, 독일의 적군파나 이탈리아의 붉은여단으로 대변되는 폭력이든 폭력/비폭력을 둘러싼 담론과 실천이 전면에 부각된 해인 셈이다.
1968년경부터 구상을 시작해 1970년 그 결실을 책(국내에는 『폭력의 세기』로 소개되어 있다)으로 낸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확연히 구분한다. 권력은 곧 폭력이므로 그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좌파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 아렌트는 권력을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한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즉,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언제든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이와 같은 인간의 능력에 조응하는 한 권력이란 영원히 파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렌트가 이와 같은 폭력과 권력의 구분을 무시한 채 폭력을 옹호하는 좌파 사상가들의 선조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소렐이다. 그러나 소렐이 말하는 폭력(더 정확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이와 다르다. 혹은 아렌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다면성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소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고 있는 총파업을 일종의 ‘신화’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소렐에게 신화로서의 총파업은 거대한 사회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대의가 어김없이 승리할 전투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그려보는 임박한 행동, 혹은 불특정한 시점에서 그려보는 어떤 미래에 대한 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로서의 총파업이 가져올 효과는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눈앞의 결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장기적 영향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즉, 소렐에게 폭력이란 아렌트가 비판하는 강제력/무력(force)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렐이 말하는 폭력이란 프랑스의 맑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L’impossible - possible)과도 유사한 기능을 한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실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 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만 또 다른 형태로 가능해지는 그 무엇이 곧 ‘불가능의 가능’인데, 르페브르가 즐겨 예로 드는 것은 유토피아 사상이다.
예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없는’[ou-]+‘장소’[toppos])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 사상은 분명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망이지만, 좀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개념은 1968년 프랑스 5월 운동 당시의 구호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을 요구하자”를 통해 대중화됐다). 따라서 소렐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대혁명의 진정한 결과가 혁명 초기에 가담자들을 열광시켰던 매혹적 청사진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사리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청사진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신화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를 역사의 흐름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모든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신화 자체이다”라는 주장을 염두에 두면 소렐이 말하는 폭력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말한 바 있는 ‘순수 수단’(reine Mittel)으로서의 폭력, 즉 ‘신적 폭력’과도 비슷하다.
앞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렌트가 폭력을 권력과 구분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폭력이라는 수단을 써도 무방하다(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정당한 수단이 된다)는 당대 좌파들의 인식을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럴 때의 폭력이라도 그것이 수단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벤야민의 질문을 바꿔서 말해보자면, 억압적이라고 판명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든, 그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든 둘 다 수단적 폭력일 뿐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수단이긴 수단이되 ‘목적 없는 수단’이다. 즉, 신의 폭력이란 뭔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나약한 인간이 그것을 허구적으로 이해하고자 그 사건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폭력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신의 의지나 목적 같은 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소렐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이나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특이한 사건 자체, 혹은 그것의 출현이다. 그래서 소렐은 총파업, 벤야민은 혁명이라는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
결국 소렐이 말하는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활력’(vis)에 더 가까운 것이다. 무릇 생명력을 지닌 생물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그 활력 말이다. 어니스트의 사자후가 필로머스 클럽의 고상한 양반들을 들쑤실 수 있었던 것, 또한 소렐의 주장에 당대의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의회사회주의자들까지 불편해했던 것은 어니스트와 소렐이 노동계급의 활력을 전면에 부각했기 때문이다. 필로머스 클럽의 회원들(혹은 당대의 지배계급)이나 의회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길들어져야할 것이었지 분출해야 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소렐의 폭력론이 무솔리니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러시아에서는 혁명적이었던 미래주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과 결합하게 된 것과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였을까?(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0. 07.

P.S. '폭력'이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짐작할 수 있다시피 방대한 참고문헌이 존재한다. '20세기의 정치적 폭력'으로 시야를 좁히더라도 견적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때문에 갈피를 잡기가 어려울 수 있는데, 이 경우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 그래도 요긴한 로드맵이 되어준다(http://blog.aladin.co.kr/mramor/1486267, http://blog.aladin.co.kr/mramor/1538039 등의 페이퍼 참조). 특이하게도 벤야민의 '폭력론'과 이에 대한 데리다의 읽기를 생략하고 있는 게 흠이지만(저자는 벤야민의 폭력론을 언급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