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자료로 쓰기 위해 정리한 내용을 옮겨둔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의 의미에 대한 교양강의인데, 내가 텍스트로 고른 건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한길사, 2000)이다. 오래전에 읽고서 정리한 적이 있지만 파일을 찾지 못해서 이번에 다시 정리했다. 아주 얇은 분량임에도 책은 네 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후반부는 내용이 만만찮다.

내가 정리한 건 1장 ‘3중의 몰락’과 2장 ‘세 가지 차원’이다. 2장은 주로 라캉 정신분석학에서의 아버지를 다루는데, 세 가지 차원이란 간단히 말하면, 상징적 아버지, 상상적 아버지, 실재적 아버지이다. 실재적 아버지에 대한 설명은 읽기에 명쾌하지 않은데(사실 ‘실재적’이란 말의 정의 자체가 그렇지만) 그렇다고 대조해볼 수도 없어서 그냥 다른 책들을 참조해야겠다. 정리는 발췌/축약에 간단한 췌사들을 덧붙여놓은 형식이며 따로 코멘트를 달지는 않는다. 제목이 되어준 ‘노아의 방주’에 대해서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재의 아버지는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상상적일 때, 노아의 외투야말로 (더) 좋은 분석의 대상이다.”(89쪽)   

1. 아버지란 무엇인가?

(1)아이에 대한 권리

 

서양에서 ‘아버지임’에 대한 최초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원래 아버지로 불린 것은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지배자, 즉 국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란 처음에는 정치적․종교적 아버지였으며, 가족적 의미의 아버지는 파생된 개념이다(아버지, 그는 법이며 신이다). 아버지는 다름아닌 정치적․종교적 지배자이므로 그는 가정과 집을 대표하는 지배자, 즉 도미누스(dominus)이다. 그는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사람이다.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어머니라는 법률적 지위, 즉 마트리모니움(matrimonium)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지배자는 자신을 특정한 어린아이의 아버지로 만든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아들을 낳는 것은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 것이다. ‘아버지임’을 정의하는 것은 혈연관계, 즉 피가 아니라 ‘나는 아버지이다’라고 공적으로 선언하고 아이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는 정치적․종교적 지배자의 행위였다.  

 

‘아버지임’에 대한 이러한 순환적 정의로부터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 즉 자녀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고 벌하거나 가둘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특히 보존해야 할 재산에 대한 이해관계 때문에 아들 혹은 딸의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아버지의 권리가 도출된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커다란 전환이 일어난 후, ‘아버지임’의 이 정의는 2세기에 걸쳐 꾸준히 쇠퇴했다.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권위가 아니라 형제애에 근거한다. 프랑스에서 행해진 루이 16세의 처형은 이에 대한 사회적 증상이다. 즉 그것은 부친살해가 아니었겠는가?

그 변화는 다음의 두 결과를 낳았다. 첫째, 정치․종교․가족의 영역 모두를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적용되던 아버지의 권위는 이제 오로지 19세기 부르주아의 이상에 따라 운영되는 가족에 대한 권리로 축소되었다. 이제 아버지의 권리는 한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남자의 권리일 뿐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영역은 축소되고 세분되었다. 그것은 공적-사회적 존재에서 사적-사회적 존재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창립자이며 지배자였던 아버지는 이제 특정한 여자의 남자로 위축되었다.

둘째, 절대왕정이 쇠퇴하면서 정치적 절대주의 및 ‘가정의 왕권’이 배척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가정 내부에서조차 아버지 권력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임’의 이러한 쇠퇴는 18세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국가가 점차적 교회를 대체하게 되는 시대 이전에 이미 교회의 영향하에서 수세기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어쨌든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만을 말하던 시기는 지나갔고, 교회를 통해서건 국가를 통해서건 아버지이 권력이 제한되고 아이의 권리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2)아이의 권리

 

‘아버지임’에 대한 두 번째 권리는 비교적 최근에 생겼다.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특히 19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권리를 많이 고려하게 됨으로써 나타났다. 모든 어린아이는 자신이 행복과 이익, 안락함을 위해 점점 더 많은, 그리고 세분화된 권리를 갖는다. 이로부터 ‘아버지임’의 새로운 정의, 즉 수행해야 할 역할과 이행해야 할 과제의 측면을 중시하는 ‘아버지임’의 정의가 생겨난다. 아버지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 즉 단지 삶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문화세계로 편입시킴으로써 어른들의 사회로 통합될 수 있는 권리를 충족시켜주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

이 이미지는 19세기 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핵가족 속에 뿌리를 내린다. 20세기 들어 사람들이 ‘새로운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 즉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이와 놀아주면서 어린아이의 언어로 대화하는 아버지와 더불어 이 이미지는 전성기에 도달한다. 그는 어린아이가 직접 말을 걸고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몰락하기 쉬운 아버지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아버지란 어린아이에게 이익과 행복, 안락함을 제공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아버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역할은 점점 약화되었는데, 다음 두 요인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시민사회가 어린아이의 복지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든다. 둘째, 민법적으로 어머니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국가가 점점 더 가정 속으로 개입하고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대체될 수 없는 역할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아버지의 사회적인 몰락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3)아이에 대해 친권을 소유할 권리

아버지임을 생물학적 ‘진리’에 근거시키려 하는 것은 아버지임의 기초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를 출산자로 정의하려 할 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오히려 아버지는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2. 아버지의 세 차원


(1)이름으로서의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와 아이 사이에 제3의 자리를 설치한다. 어린아이에 대해 그녀는 글자가 새겨질 자리에, 즉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 불렀고, 라캉은 대타자, 혹은 상징적 질서라 일컬었던 구조에 제3의 자리를 설치한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어머니를 위한 아이의 욕망이 아니라, 어머니 자체에 대한 아이의 욕망이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아이는 어머니 자체를 욕망하는가? 아이의 욕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이에게 처음으로 생기는 질문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

 

어머니는 끊임없이 왔다갔다한다. 왜? 대답은 어머니로부터 온다. 아버지의 이름의 기표를 통해 어머니 속에, 대타자 속에 있는 결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체에게 해답이 주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의 기표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기표를 대체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에 대해 의미, 즉 팔루스(phallus)의 의미가 생겨난다. 여기서 팔루스란 어머니가 가지고 있지 않은 (육체적) 기관이 아니며, 남자의 이미지도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욕망 그 자체, 즉 결핍의 기표이다. 어린아이는 팔루스가 되고 싶어한다.


(2)이상형으로서의 아버지

이름으로서의 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이상형으로서의 아버지는? 그는 어린아이로부터 온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가 지나고 초자아가 내면화되는 나이, 즉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될 때 어린아이는 실재의 아버지를 지워버린다. 아이는 대신 은밀히 아버지 상을 생각해내는데, 이것은 모든 면에서 보통이 넘는 모습이다. 아이가 이러한 아버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능력 있는 아버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욕망에 걸맞는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를 충족시켜줄 능력이 없다. 그리하여 그의 나르시시즘이 깨진다.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려고 하지만 아이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는 이상형으로서의 아버지를 찾는다. 아이는 이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가 끝나면 아이는 자기를 그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바 있듯이 아버지의 입법자적 음성, 양심의 음성을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프로이트는 아버지가 남겨준 이 유산에 초자아라는 이름을 주었다(초자아는 오이디푸스의 유산이다).

 

(3)한 여자의 남자

 

프로이트는 법률 격언을 인용하여 어머니는 확실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불확실하다고 말한 바 있다. ‘아버지임’의 진리는 다른 질서에 속한다. ‘아버지임’의 진리를 증명하려 할 때 생물학적 지식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린아이에 대하여 실재의 아버지는 한 여자의 남자이다. 실재의 아버지는 어린아이에게 거세, 즉 ‘아니라고 말함’을 도입하는 아버지이다. 너는 네 어머니의 팔루스가 아니다, 너는 네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재적 아버지는 이러한 거세의 대행자이다. 그는 결코 복수심에 불타는 경쟁자로 아이를 거세하지는 않는다. 실재적 아버지가 거세의 대행자라는 말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어린아이를 위해 베일을 드리운다는 의미이다. 그는 어떤 특정한 여자를 자신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고 어린아이를 위해 베일을 드리운다. 달리 표현하면 실재적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 그 여자에 관한 자신의 향유를 알지 못하게 한다.


 

실재적 아버지는 아들 함이 나체로 보았던, 취해서 침대에 누워 잠든 아버지이다. 그 아들은 자기의 지식을 다른 형제들이 나누어 가질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다가와 아버지에게 외투를 덮어주었다. 노아는 나중에 잠이 깨어 이들에게 감사하고 함을 저주했다.


창세기 9:18-29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 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07.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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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8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강의자료라구요?
만약 제가 지금 대학생이라면 이 말들을 듣는 즉시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08-28 18:24   좋아요 0 | URL
대학 강의용은 아니구요. 2장은 좀 어렵지만 1장은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비로그인 2007-08-2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강의 들어보고 싶어요 :)

로쟈 2007-08-28 20:56   좋아요 0 | URL
그냥 뒷얘기로만 들으시는 게 좋으실 듯한데요.^^;

허영 2007-09-0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노아는 왜 함이 아닌 가나안에게 저주를 한 걸까요?ㅡㅡ;

로쟈 2007-09-07 15:51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목사님께 물어봐야겠는데요.^^;

지혜 2007-09-14 13:32   좋아요 0 | URL
가나안은 직접적으로 범죄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아비 함과의 혈통적 유대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저주의 내용 자체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혈통에 대한 저주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자식에 대한 아비의 권리와 책임 때문에 이런 결과가 가능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큰성경,편찬대표 김의환 박사,성서교재간행사>에 해설 부분에 이렇게 씌여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