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국에 대한 아주 간단한 입문서'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오면서((http://blog.aladin.co.kr/mramor/1504292) '제국'을 화두로 한 몇 권의 이미지들을 같이 나열했는데, 그 중 또다른 신간인 <제국의 최전선>(갈라파고스, 2007)의 저자가 <타타르 가는 길>의 저자 로버트 카플란(1952- )이란 건 오늘 다른 인터뷰-소개기사를 읽고 알았다. 기사는 얼마전 리처드 도킨스와의 인터뷰로 눈길을 끈 김수혜 기자의 '솜씨'이다. 책상머리에서 몇 페이지 뒤적이고 머리로 조합해내는 기사가 아니라 '몸으로 부때끼며 얻어낸' 기사의 장점이 살아있다. '인문학적 먹물들' 치고 카플란의 책들을 거부감 없이 읽을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짐작컨대, <남한산성>의 저자 또한 그러할 것이다). 사자들이라면 토끼에 대해 공부할 건덕지도 없겠지만 같은 우리안의 토끼들은 사자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제국'은 그런 사자이다.
조선일보(07. 08. 18) 전 세계로 진군하는 ‘제국’의 첨병들
미국은 제국(帝國)인가? 로버트 카플란(Robert D. Kaplan·55)은 “제국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州)의 한 소도시 자택에서 글을 쓰다 전화를 받았다. 뉴욕 퀸즈에서 트럭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30년간 이스라엘·이라크·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을 취재해온 사내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말투를 썼다. “나는 기자(journalist)이고, 현실주의자(realist)이며, 마키아벨리와 홉스와 처칠에 공감을 느낀다”고 했다.
“미국은 제국이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특정 국가가 세를 불려 제국을 이루고 타국을 압박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최소한 이 책에선 카플란의 관심 밖이다. 그는 대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제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국의 회로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먹고, 믿고, 바라고, 따르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카플란은 2002년 겨울부터 2004년 봄까지 예멘·콜롬비아·몽골·필리핀·아프가니스탄·지부티·이라크의 미군 병영을 돌았다. 후방의 사령부 브리핑 룸 대신 전선의 야전 막사를 찾아갔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갑론을박하는 엘리트 대신 군장을 지고 행군하는 부사관들과 몸으로 부대꼈다.
요컨대 로마 제국에 빗대자면, 카이사르가 아니라 백인대장을 찾아나선 여정이었다. 원제 ‘Imperial Grunts’ 자체가 ‘제국의 보병들’이라는 뜻이다. 카플란은 자신이 만난 미군 특수부대원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대의 정체성으로 승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 보존보다는 자신들이 수행하는 역할의 보존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옆의 병사가 자기 임무를 대신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26~27쪽).
그는 촉촉한 낱말을 쓰지 않는다. 진지를 구축하듯 단순한 구조와 건조한 낱말을 쓴다. 그래도 행간에서 야전 군인에 대한, 숭앙에 가까운 공감이 스며 나온다. 가령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시(市) 서쪽에 있는 특수부대 포사격기지에서 젊은 하사가 전사한 일이 있다. 카플란은 군 비행장에서 간소한 장례식을 지켜봤다. 군목이 구약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을 읽었다. 존 웨인이 감독·주연한 영화 ‘그린 베레’(1968년작)의 주제가가 울리는 가운데, 관이 수송기에 실렸다. 병사들은 곧바로 기지에 돌아갔다.
“대원들은 장례식을 이튿날 더 여유 있게 치르자는 상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본국에 돌아가면 폴의 가족을 따로 찾아갈 예정이었다. 그들은 전사한 동료에게 바치는 최고의 조의는 그들이 속한 포사격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368쪽)
아프가니스탄에서 특전단을 지휘하는 한 미군 중령은 카플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게 우리가 할 일이죠. 그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죽이고, 생포하고, 파괴하는 것 말입니다. 선생 눈에는 이들이 비정하고 거친 친구들로 보일 수 있어요. 그것은 이들이 전투를 직업으로 하고, 그것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355~356쪽)
카플란은 군을 “무인(武人)의 철저한 윤리의식으로 모든 것이 철두철미하게 이뤄지는 세계”라고 묘사한다(161쪽).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의 교칙은 ‘의무, 영광, 국가’이고, 일상을 지배하는 수칙은 ‘해야 한다’(You Must) 이다.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 특수부대원은 필리핀 군에게 전투 훈련을 시킬 때,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좋은 편이다. 우리는 적을 죽인다.” (272쪽)
카플란의 눈에 비친, 미군 기지 바깥 세상은 지저분하고 혼란스런 제3세계다. 미군은 그 흐물흐물한 세계에 ‘등뼈를 기증하는 자’이다. “미군이 온 뒤 살기가 쉬워졌다”고 칭송하는 현지인의 얼굴에서 그는 “식민주의를 갈구하는 눈빛”을 읽는다(255쪽).
몽골에서 카플란은 톰 윌헴 중령과 함께 서리 내린 메마른 고원을 지나 중국-몽골 국경지대를 돌았다. 윌헴 중령은 알류산 열도, 베를린, 모스크바, 보스니아 등지를 돌며 뼈가 굵었다. 윌헴 같은 야전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미 육군이 펴낸 매뉴얼 ‘유격대 지침서’다.
카플란은 ‘제국’을 “자국이 완전무결하게 안전해야 한다는 요구가 세계 정복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모든 나라에 불안감을 유발하는 고립주의의 한 형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제국은 “영광보다는 필요에 의해” 건설된다.
가령 미국은 2차 대전 때 독일과 일본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련과 손을 잡아야 했고,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전사들을 무장시켰다. 소련이 무너진 뒤, 이들이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떠올랐다(17~18쪽).
미국이 제국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그가 보기에 우문(愚問)이다. 전세계 59개 국가와 영토에 기지를 두고, 170개 국가에서 매년 비밀 군사 작전을 시행하는 나라가 제국이 아니라면 뭔가? “당신이 북극에 서면, 자동적으로 한 발은 미군 북부사령부 권역에, 다른 한발은 태평양 사령부 권역에 딛고 선 셈이 된다. 발의 위치를 한 번 바꾸면 이번엔 유럽 사령부다.” (17쪽)
그가 보기에 세계는 ‘모던’하지도, ‘포스트 모던’하지도 않으며 그저 고대(古代)의 연장일 뿐이다. 그는 책에서 끊임없이 미국을 로마 제국과 병치시킨다. 카플란은 전화 너머로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한 많은 기자들이 ‘뭐가 잘못됐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다녔는데, 나는 애초에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갔다”고 말했다. “미군 바깥에 서서 미군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대신, 미군 한 복판에 들어가서 미군의 눈으로 세계를 본 다음,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군의 시각’을 알려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카플란이 본 미국 제국의 미래는 그러나 꼭 밝지 않다. 카플란은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며, 세계는 다극화될 것”이라고 했다. 카플란 개인에게 그것은 “미국에 바람직한 현상”도, 그 반대도 아니다. 기자 카플란에게 그것은 다만 ‘사실’(fact)일 뿐이다.
◆ 더 읽을 만한 책
로버트 카플란은 1973년 코네티컷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버몬트주(州)의 시골 신문에 잠깐 근무하다 아프리카로 훌쩍 떠났고, 이어 이스라엘에 가서 미군 이등병으로 1년간 복무한 다음, 동유럽·발칸 반도·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돌며 여러 미국 신문에 글을 썼다. 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진 뒤, 세계 질서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글을 차례차례 발표하면서 대표적인 네오콘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카플란은 지금까지 11권을 썼다. 그 중 국내에 소개된 책에는 ‘무정부 시대가 오는가’(원제 The Coming Anarchy·코기토), ‘승자학’(The Warrior Politics·생각의 나무), ‘타타르로 가는 길’(원제 Eastward to Tartary·르네상스)이 있다.(김수혜 기자)
07. 0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