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문학기행의 첫 일정은 에밀 졸라의 집, 메당의 집 방문이었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거리(주말이어서 시간이 단축되었다). 파리의 교외지역인데 19세기와는 달리 지금은 부르주아들의 저택도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 <목로주점>(1877)의 히트 덕분에, 그리고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 졸라는 집장기간의 복원공사 이후에 2021년에 개장했다고.

건물 자체는 사진으로 이미 본 터여서 친근하게까지 느껴졌다. 졸라는 10여년에 걸쳐 저택과 주변 택지를 구입하고 증축, 확장했다(집은 연결된 세 동으로 구성돼 있는데 <목로주점> 성공으로 중앙 동을, 그리고 <나나>와 <제르미날>의 수입으로 좌우 동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드레퓌스박물관이 된 별채를 손님들을 위해서 지었다.

이 졸라의 저택을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찾았고 ‘메당의 저녁‘은 모임의 이름이 되었다. 그들 가운데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이 모파상과 위스망스, 도데 등이다. 1880년에 나온 사화집 <메당의 저녁>은 1870년 보불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모음집으로 모파상의 대표작 ‘비곗덩어리‘를 수록하고 있다.

졸라의 집은 기대 이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1902년 졸라의 사망한 뒤, 1906년 아내 알렉산드린이 건물을 관에 기증하고 이후에 상당기간 동안 고아들의 보육시설로 이용됐던 걸 감안하면). 작가의 공간(특히 서재)이 고스란히 복원되기는 졸라의 공간을 상상하는 데는 충분했다. 정면의 큰 채광창(원래는 스테인드글라스였다고 한다)을 둔 서재에는 넓다란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얼핏 봐도 골동품의 인상을 주는 의자는 졸라가 실제로 앉았던 것이라고 한다.

˝한줄도 쓰지 않은 날은 없어야 한다˝가 신조였던 졸라는 주로 오전 네 시간에 집중해서 작품을 썼다. 오후에는 산책을 즐기며 정원을 둘러보고 메당을 센느강 풍경도 즐겼으리라. 산책로 한쪽에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졸라의 흉상도 있어서 그 옆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졸라의 집 구경은 바로 별채의 드레퓌스박물관 견학으로 이어졌다. 2021년 10월에 개괸했으니 이제 2년 된 곳이다. 입구의 박물관삽을 통과하면 바로 전시실로 들어서게 되는데, 드레퓌스사건과 관련한 온갖 자료가 망라돼 있어서 프랑스사회를 양편으로 갈라서 들끓게 했던 사건의 한복판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1894년에 프랑스군 참모본부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기소에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이 최종적으로, 드레퓌스의 무죄로 종결된 건 졸라가 사망한 뒤인 1906년이다.

프랑스의 맹목적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그리고 군부의 비뚤어진 자존심과 기만의 합작품이었던 이 사건은 1898년 졸라가 드레퓌스의 무고와 군부의 거짓선동을 비판하는 격문 ‘나는 고발한다‘를 일간지에 발표함으로써 극적인 전환점을 맞았고 이로 인해 졸라가 기소되기까지 했지만(졸라는 영국으로 피신하여 8개월간의 망명생활을 한다) 결국은 진실의 승리로 귀결된다(졸라는 자신의 기고글들을 모아 <전진하는 진실>(1901)을 출간하기도 했다).

사건이 그렇게 종결되면서 드레퓌스 대위(이미 복권돼 진급했었지만)는레종도뇌르 훈장을 받고 졸라는 판테옹으로 이장된다(작가로서는 1885년 빅토르 위고 이후 판테옹에 안장된 대표 사례다). 졸라를 단순히 작가라는 말 대신에 지식인-작가로 부르게 된 배경이다. 졸라 이후 ‘지식인-작가‘는 프랑스문학의 특징이자 전통이 되며 앙드레 지드와 장 폴 사르트르로 바톤이 이어진다...

졸라의 집과 드레퓌스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졸라의 성취와 업적에 대해서, 작가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일행이 더 흥미를 가졌던 이야기는 졸라의 예기치않은 사생활, 즉 아내의 하녀였던 잔느 로즈로와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녀에게서 얻은 두 자녀(졸라 사후에 에밀졸라라는 성을 갖게 된다)에 관한 것이었다. 늦은 나이에 외도로 자녀들을 얻게 된 졸라는 사진술을 배워 이들의 사진집까지 펴낼 정도의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마침 기념품샵에 <에밀 졸라와 사진>이라는 양장품 불어책이 있기에 기념으로 구입했다.

가볍게 비가 흩뿌리는 만추의 주말, 우리는 반나절의 졸라 기행을 뒤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의 마지막 70일을 보낸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우아즈(‘우아즈강변의 오베르‘란 뜻)로 향했다.(이번 문학기행은 부분적으로 미술기행도 겸하고 있는데, 고흐는 오베르 쉬르우아즈와 오르세미술관 특별전에서 만나보게 된다. 반 고흐 이야기는 특별전을 관람하고 적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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