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1915-1980)의 '데뷔작'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가 번역/출간됐다(바르트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880102 참조). 예전에 한번 <영도의 에크리뛰르>(동인, 1994)라고 <기호학의 원리>과 합본으로 번역된 바 있는데, '무참한' 번역으로 기억된다(다행히/당연히 절판됐다). 이번에 나온 책은 본문 215쪽으로 생각보다는 두꺼운데, '역자후기'를 보니 1961년부터 1972년 사이에 씌어진 여덟 편의 비평문이 제3부로 묶여서 원래의 1953년판에 추가됐다. 판권란에는 1953년판이 기재돼 있지만 실상은 1972년 개정판을 옮긴 것이다.
내가 책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아마도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에서였을 듯한데, 김현은 롤랑 바르트에 관한 장에서 <잠재태의 기술>이라고 옮겼었다. 수잔 손택의 서문이 붙어 있는 112쪽의 얇은 영역본(3부가 들어 있던가?)을 읽은 건 대학원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로부터 이제 거의 15년만에 제대로 된 한국어본을 읽게 된다니 감회가 없지 않다(동문선의 책들이 그래도 외양은 아주 번듯하지 않은가?).
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한 <글쓰기의 영도>는 "바르트가 내놓은 최초의 평론집으로 그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알리는 신호탄"(217쪽)이다. 관련리뷰가 혹 있나 싶어 검색해 보다가 발견한 건 안 그래도 요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진중권의 '아듀' 칼럼이다.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재를 끝마치면서 쓴 것인데 나도 읽은 기억이 난다. 거의 폐허처럼도 보이는 작업실의 프란시스 베이컨 사진과 함께 다시 읽어본다. 칼럼에서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영도'가 바로 바르트의 표현을 빌어온 것이다(바르트와는 다른 의미로 쓰고 있지만).
씨네21(06. 06. 09)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글쓰기의 영도(零度)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글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다 토해내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게 어찌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동일한 글쓰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동일자의 무한증식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다양하다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격언처럼 세상이라는 것만큼 동일한 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도 없다.
하루라도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도 있다고 하나, 사실 미디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피부의 두께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노출의 적정량이 있다. 자외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피부가 상하고 마는 것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될 때 존재 역시 화상을 입어 상처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논객은 글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다보면 온몸으로 적대자들이 휘두르는 보복의 칼집을 받아야 한다. 비난도 적당히 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과도하게 받으면 무감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비난을 받는 것 자체가 쾌감으로 바뀌어버린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뭔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했다는 증거다.” 증상이 이쯤 되면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변태가 된다.
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게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그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다”는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쓸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수록 글쟁이는 제 말로 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가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다(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쓸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더이상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그 제로 디그리에 와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토해놓고, 더 토할 게 없어 위산까지 토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몸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이 지면을 개인적 넋두리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씨네21>의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제는 규점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진중권/ 문화평론가)
07. 08. 16.
P.S. 1년만에 다시 논객의 자리로 돌아온 걸 보면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의 자리를 지키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곁가지 이야기이고 바르트의 책들이나 한데 모아놓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의 표현을 빌자면 '텍스트의 즐거움'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면서 말이다. 실상은 그런 게 책읽기/글쓰기의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 이 세상엔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