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출간된 신간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책은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다. 저자도 출판사도 모두 생소한데, 눈길을 끈 것은 저자의 프로필. "1965년 출생. 현재 오사카여대 인문사회학부 강사. 저서로 <자유>, 역서는 <부정적인 것과의 체류(슬라보예 지젝)>, <제국>(네그리) 등이 있다."로 돼 있다. 즉,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와 <제국>(이학사, 2001)의 일역판 역자인 것이다(저자의 '반폭력론'에서 지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나라마다 사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인문서의 역자는 그 나름의 식견과 인문학적 파워를 갖춘 경우가 많다(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옮긴 가야트리 스피박이 가장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250쪽이 안되니까 비교적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간에 눈길이 가는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물론 '폭력'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들이 최근 유행을 타고 있기 때문.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출판, 2007)이 가장 최근의 예일 텐데, 이 주제에 관한 책들만 모아놓고 읽어도 한 계절은 족히 잡아먹겠다. 그 경우에도 사카이의 책은 유익한 가이드북이 돼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신간을 비교적 크게 다룬 리뷰를 하나 챙겨둔다.

한국일보(07. 08. 11) 정당한 분노의 표출, 그 폭력이 악인가?
“폭력에 대한 폭력을 억누른다고 하는 것은 폭력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테러>(*<휴머니즘과 폭력>)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 이 책은 ‘불온하게’ 묻는다.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그저 야만일 뿐인가? 그렇다고 굳게 믿는 평화 지상주의자라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도 ‘급(級)’이 있고, 그러므로 구분짓기가 필요하다는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호해야 할 어떤 폭력’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집요하게 독자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오사카시립대 사회학부 준교수인 저자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 반드시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에 가해지는 더 큰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무감각을 비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서 시작해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 프란츠 파농,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프리드리히 니체, 미셸 푸코에 이르는 다양한 폭력의 담론들을 비교, 분석하는 이 책은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될 수 없는 폭력 내부에 철학적 구분선을 긋기 위해 ‘반폭력’(anti-violence)이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는 비폭력(non-violence)은 물론 ‘폭력에는 폭력을’을 구호로 내세우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과도 구별되는 반폭력은 폭력을 구조화하는 제도 차제를 해체하려는 폭력이다. 여기서 반폭력을 다른 폭력들과 구분하는 기준은 적대성과 주권. 적대성이란 자기자신이나 타자를 향해 분출되는 증오와는 다른, 구조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뜻하며, 주권은 폭력 수단을 독점하고 그 폭력을 누구에게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를 일컫는다. 저자는 폭력이 반폭력이 되기 위해선 올바른 적대성을 갖되, 주권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반폭력의 구체적인 예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저자는 북미자유협정에 저항해 무장봉기한 멕시코 게릴라 집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첫 손에 추켜세운다. 그들이야말로 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적대성에 기반한 폭력은 억압받는 자를 자기혐오로부터 구원한다. 폭력은 행위뿐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의 영역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에 폭력의 전개는 자기치유의 과정과 고스란히 겹치기도 한다.
프란츠 파농의 말처럼 “구체적인 폭력행사 전에 적을 확인하고 어디에 균열이 생겼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여 전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비로소 뿌리 깊은 의존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시 한번 묻는다. “이래도 당신은 폭력은 모조리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박선영 기자)
07. 08. 10.
P.S. 조금 다른 방향에서 맥을 짚은 기사도 옮겨놓는다. 나로선 더 수긍이 가는 리뷰이다.

중앙일보(07. 08. 11) 폭력의 밑바탕엔 항상 공포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라고 말했다. 숙명. 그래서인지 폭력은 참 다양한 형태로 우리 옆에 있다. 전쟁과 테러,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 집단 따돌림, 그리고 자살과 사형….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양상의 폭력을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일본의 소장파 사회학자인 저자는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가 옳은가”를 화두로 던지며, 폭력의 속성을 파헤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무책임하고 공허한 주장이다. ‘폭력은 안 된다→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이란 역설을 잉태하고 있어서다.
역사적으로 폭력이 정치적 의미를 띤 경우가 많았다. 민족분쟁이나 종교전쟁이 그랬다. 하지만 최근의 폭력 양상은 점차 정치성이 없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대까지만 해도 브라질에서 유괴는 정치적인 목표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정치성을 초월한, ‘의미 과다’의 폭력도 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테러리즘이 그 예다.
저자는 폭력의 밑바탕에 ‘공포’가 있다고 분석한다. 92년 LA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 사건’을 보자. 25세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이 LA 근교를 드라이브하던 중 경찰의 검문을 받고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킹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경찰에 둘러싸여 주먹과 발, 경찰봉으로 맞았고 두 차례의 전기충격 공격까지 받았다. 볼과 발목뼈가 으스러지고 두개골이 아홉 군데나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찰이 무죄로 풀려났다. (판결이 난 날이 바로 LA폭동이 일어난 날이다.) 어째서 ‘무죄’인가.
“로드니 킹을 공격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경찰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할 무시무시한 육체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 측 변호인단의 주장이 먹혀들어 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도(inversion)’현상으로 해석했다. ‘강자’에 속하는 측이 ‘약자’에 속하는 쪽을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현상이다. 우리 주변에선 ‘노숙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일반 시민의 심리’가 그 예가 된다. 이런 ‘전도’는 사람들을 쉽게 폭력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 ‘예방을 위한 대항폭력’으로 정당화되고, 침략적 성격의 전쟁이 ‘자위’를 구실로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테러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저자는 테러리즘의 특징으로 ‘쇼’라는 점을 들었다. 국지적인 피해로 한정된 공격이 미디어를 통해 증폭돼 세계를 뒤흔드는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쇼’라는 측면에서 테러리즘과 비폭력 행동-간디의 소금행진 같은-은 통한다. 저자는 어느 특정한 폭력을 비난하거나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옹호 받아야 하는 폭력으로 ‘적대성을 갖되 주권의 쟁취를 목표로 하지 않는 폭력’을 들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적대성’이란 옳지 않은 제도나 폭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의미하며, ‘주권’은 폭력 수단을 독점하고 그 폭력을 누구에게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폭력의 예는 뭘까. 우리 역사상 80년 광주항쟁이 아닐지. 쉽지 않은 결론이다.(이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