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시협회장을 맡고 있는 오세영 시인 같은 분은 여러 가지로 분주하겠다. 지난달말 읽은 문화일보의 기사까지 떠올라서 한국일보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8. 09) 오세영 한국시인협회장, 11일부터 기념행사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를 효시로 한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햇수로 100년을 맞았다. 올해는 회원 1,000여 명의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이하 시협)가 창립된 지 50주년이기도 하다. 시협은 이번 주말부터 뜻 깊은 해를 기념하는 다양한 문학 행사를 개최한다(별도 기사 참조). 작년 3월부터 2년 임기의 회장을 맡아 행사 준비에 분주한 오세영(65) 시인을 만났다.
국내 순수시단의 중견이자 이달 정년을 맞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시인은 월간 <문학사상> 이달 호에 “한국 문단을 양분한 ‘문학과 지성’ 파와 ‘창작과 비평’ 파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외면 당해 왔다”는 요지의 회고록을 실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아래 문화일보 기사 참조).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의 주도로 창립된 시협이 50돌을 맞았다.
“자유당 시절 대표적 문화단체인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약칭)이 어용 단체 노릇을 하는데 반발해 시협이 창립됐다. 독재에 맞서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취지였다. 신석초, 서정주, 김춘수, 조병화, 정한모, 김남조 등이 회장을 맡으며 한국 시단의 정통을 계승해왔다고 자부한다.”
-11~13일 동아시아 시인 포럼 주제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동아시아 시의 역할’이다.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상충하는 시대다. 세계화의 실상은 미국화로, 서구적 가치와 표준이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고유의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동양적 가치관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자는 취지다.”
-한국 현대시를 연구하며 19권의 학술서를 냈다. 시사(詩史) 100년을 평가한다면.
“한국 현대시 100년은 한마디로 정치사였다. 문학이 정치 권력에 기대고 시류를 쫓았다. 1920, 30년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만 존재했고, 해방 이후에도 참여, 민중이란 구획을 벗어난 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순수시조차도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란 정치적 상황을 의식한 것이었다. 문학다운 문학, 문학으로서의 문학이란 의식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점은 시단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다.”
-현실참여적 시풍은 시대적 요청 아니었을까.
“맞다. 나는 문학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80년대만 해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문학이 복무한 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훌륭한 시가 문학적으로도 그렇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소설과 달리 전달적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젊은 시인들의 탈정치성은 어떻게 보나.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영상 문화에 익숙한 세대답게 환상, 해체 등을 표방하는 감각적 작품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앞세우는 서정적 작품.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어서 자유롭지만, 시 세계를 지탱해줄 철학이 부족해 보인다. 문태준, 김경주 등은 깊은 사유가 서정성을 뒷받침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학사상>에 기고한 글이 화제가 됐는데.
“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창비와 문지가 자기 경향이나 계열에 참여하지 않는 작가들을 고립시켜왔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등단 작가와 발표작이 크게 늘어난 요즘엔 평론가가 옥석을 가리는 역할을 잘해내야 할텐데, 이들이 특정 문학 권력에 편입돼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작품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23년 봉직한 대학 강단을 떠나게 됐다.
“다음달 중순에 마지막 강의가 예정돼 있다. 정년에 맞춰 42년 간 써온 시집 17권을 2권으로 묶은 책을 냈다. 창작을 계속할 테니까 ‘전집’은 아니고 ‘집합본’이랄까. 이달 중순엔 동창이나 문단 지인들이 나에 대해 쓴 글을 묶은 문집이 나온다. 서울을 벗어나 꽃, 나무를 기르며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이훈성기자)

문화일보(07. 07. 31) "나는 좌파 문학의 왕따,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나는 좌파문학권력의 ‘왕따’였다.”
곧 서울대 국문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는 오세영(65·한국시인협회장) 시인이 문학인생을 회고하며, 자신은 ‘순수문학’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창작과비평파’(창비파)와 ‘문학과지성파’(문지파) 등 소위 ‘민중 문학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됐고, 대학 강단에서도 좌파문학에 경도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토로해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인 오 시인은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그동안 17권, 1100여 편의 시를 쓴 순수문학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1985년 이후 22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올 1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한다. 이처럼 손에 꼽는 강단문인이자 순수문학 시단의 ‘원로’가 주요 문예지는 물론 각종 문화단체를 장악한 ‘문학권력’을 겨냥해 이같이 발언함에 따라 논란이 뒤따를 것 같다.
오 시인은 30일 발간된 ‘문학사상’ 8월호에 실린 “문단의 외톨이 혹은 ‘왕따’”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2005년 발간된 영문 한국시인 인명사전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음사가 출판하고 한국문학번역원이 발행한 이 인명사전은 당시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던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을 위해 만든 것. 이미 오 시인의 시집은 독일에서만 3권이 번역·출간되는 등 4개국어로 해외에 소개될 정도였으나 우리 시인의 인명사전에 정작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그에 앞선 수년전 당시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몇 개의 주요 외국어로 한국 현대 문단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발간할 때도 오 시인은 이름조차 제외됐다. 오 시인은 “프랑크푸르트 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도 그때(소책자 발간)의 위원들이 포함된 것을 보니 속칭 ‘왕따’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며 우연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이어 그는 “19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권력을 양분했던 ‘창비파’와 ‘문지파’가 발행하는 문학지나 그들 세력이 접수한 그 어떤 문학지로부터 단 한번도 원고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들 유파의 핵심 비평가나 시인들 역시 그 어떤 글에서도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며, 시단의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시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경우에도 내 이름만큼은 생략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핍박받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민중 시인”이라고 자조했다.
그는 ‘왕따’의 이유로 자신의 ‘순수문학’ 지향을 꼽았다. 우선 민중문학 계열이 ‘어용’으로 몰아붙인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박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지냈으며, 또 김수영과의 문학논쟁으로 민중문학으로부터 무차별 비판을 받은 이어령과 가깝게 지내는 등 “그(순수문학) 인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내가 그들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터”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나는 문학이 원래 정치의 도구는 아니며 시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나는 문학이란 원래 정치의 도구라고 주장하는 민중문학의 일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오 시인은 주장한다.

그는 20여년의 서울대 봉직 시절도 “고독했다”고 되돌아 보았다. 오 시인에 따르면, ‘순수학문이 소외되고 정치 우선주의가 전횡’했던 그 시절은 ‘교수의 가르침보다 운동권 선배의 말이 더 권위가 있었으며, 운동권·좌파·주사파가 선정한 독서목록 이외에 다른 어떤 책도 읽기를 거부’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현대문학 강의 역시 그 추세를 따라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한물간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마치 아카데믹하고 절대적인 방법론인양 활개를 쳤다. 그것들을 최상의 것처럼 옹호하는 교수들이 있었으며 그래야 인기도 얻고 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오 시인은 “그럼에도 나는 대세를 거부하며 고집스럽게 순수문학과 시의 본질을 옹호하고 신비평이나 형식주의, 구조주의를 강의했으니 학내외에서 얼마나 눈에 든 가시같이 보였으랴”라고 되물으며 “지금 생각하면 따돌림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용으로 몰리지 않은 것만큼은 천만다행”이라고 회고, 그가 학생은 물론 교수진으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대접받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오 시인은 “나는 순수문학파이다”라고 다시 분명히 밝히면서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08. 09-10.

P.S. 문지와 창비쪽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오 시인은 '문학사상' 같은 곳에서는 언제나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20년전 지난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소월시문학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도 바로 오세영 시인이었다(나는 수상시집을 갖고 있다). 그때 수상작인 '그릇1'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시인이 생각하는 '순수시'의 한 전형이겠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이란 구절이 인상적이군)...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