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때문에 자연스레 떠올린 책은 토머스 소웰의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다. 작년 3월초에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비전의 충돌>을 꼽으면서 내가 떠올린 책이 <본성과 양육>이었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830562). 서평거리가 될 만한 책으로 전부터 염두에 두고는 있었는데, 오늘에야 책을 손에 넣었다. 한 신간서적을 구하러 서점에 들렀다가 아직 입고가 안 되었다기에 잠시 두리번거리다 들고 나온 게 바로 소웰의 책이었던 것. 언론 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다가 그 중 가장 긴 것을 옮겨놓는다.

프로메테우스(06. 02. 22) 인간과 세계를 보는 두 시각의 차이

최근 『비전의 충돌』이라는 새 책이 나왔다. 원제는 A Conflict of Visions고 부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다. Thomas Sowell이 2002년에 발표한 것으로 채계병이 번역했고 이카루스미디어에서 2월 15일 출간했다.

‘문명의 충돌’의 아류작인가, 비전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을 유발시키는 책 제목이었다. 저자 토머스 소웰은 현재 스탠포드 대학 교수다. “그는 고전 경제 이론에서 사법적 행동주의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분야의 주제에 대한 많은 논문과 에세이는 물론 9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책날개에는 40여권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는 “미국의 학자 두뇌집단의 한 명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3기에 걸친 미국 행정부의 자문을 맡았었다. 「포천」, 「포브스」, 「월 스트리트 저널」 등 150개 이상의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고 한다.

책 표지의 광고로 “랜덤 하우스가 조사한 미국 독자가 뽑은 논픽션 부문 20세기 명저”, “소웰은 공정하고 분명한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뉴욕타임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 학자가 정치투쟁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 대한 연구에 잊혀지지 않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토머스 소웰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도 환영받는 저자이다(Ingram)”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환영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서문’으로 넘어간다.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개의 시각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에서의 ‘비전’은 시각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시각에 따라 각 사상가들의 주장과 정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소웰이 제시하는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성악설(혹은 성오설)과 성선설로 이해할 수 있다. 소웰은 서양의 대표적 사상가들을 이러한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소웰은 서문에서 “우리 모두는 비전을 갖고 있다. 비전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소리 없이 결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비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이해관계의 갈등은 단기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비전의 충돌은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제 비전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제1부 '비전은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넘어간다.

제1장 제목은 '비전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이다. 소웰은 "비전은 논리나 사실에 기초한 검증에 활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육감이나 '본능적 느낌'과 같은 것이다. 논리가 사실에 기초한 검증은 비전이 원료를 제공한 후에나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육감과 느낌이라, 다소 실망스럽지만 더 들어보기로 한다. “특정 비전- 혹은 특정 비전의 충돌 -은 결정이 내려지는 장소의 분위기를 지배할 수 있다. 역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속삭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사고의 흐름에 기여하는 것이다”고 한다.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다
제2장 제목은 '아담 스미스의 제약적 비전과 윌리엄 고드윈의 무제약적 비전'이다. 2장을 읽으면서 이 책이 생각보다 흥미로운 책이라고 느끼게 됐다. 학적 깊이나 구체적인 논증은 약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넘나들며 크게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어 사상가들의 집합을 제시하는 부분들이 재밌다.

“사회에 대한 비전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 개념에서 차이가 난다”로 시작한다. 루소와 홉스의 인간관의 차이를 거론한다. 소웰은 “서로 다른 관점에 기초해 자신들의 분명한 철학, 정치, 혹은 사회 이론들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인간의 도덕과 정신의 본질에 대해 아주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제도에 대한 그들 각각의 개념 또한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로 유명해지기 거의 20년 전인 1759년, 철학자로서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이론』”에서 가정이지만 중국의 모든 주민이 지진으로 사라져버린 사건과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잃었을 때를 비교한다(*<도덕감정론>으로 번역돼 있다).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지만 그의 사고 과정은 이미 경제학자의 것이었다”고 한다. 소웰은 에드먼드 버크에 이어 알렉산더 해밀턴도 스미스와 같은 ‘제약적 비전’ 입장이라고 소개한다. 제도의 결점은 그 제도를 만든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도덕’적 문제로 해결하기보다 “일련의 ‘균형’적인 도덕적 인센티브 체계”를 중시한다. 그런 관점은 『국부론』으로 이어진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으로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을 거론한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관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 책이다. “아담 스미스가 인센티브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사회·도덕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윌리엄 고드윈은 인간의 오성과 기질로 인간은 의도적으로 사회에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본성’인가, ‘조장’된 것인가?
“인간의 이기심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스미스와 달리 고드윈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로 그 보상 시스템에 의해 인간의 이기심이 조장되는 것으로 보았다”며 심리적 혹은 경제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드윈의 비전은 “보상에 대한 기대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정신을 개선시키는 데 해가 된다”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마르키 드 콩도르세도 무제약적 비전파다. 수학자로서 콩도르세는 “완벽해질 수 있는 능력을 수학적 극한에 대한 무한히 점근선적인 접근으로 인식했다.” 고드윈은 의도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미덕’, 의도적으로 해를 입히는 것을 ‘악’, 우연히 해를 입히는 것을 ‘태만’으로 불렀는데 우연하게 유익하게 하는 경우를 뺐다. “아담 스미스의 비전 전체에서 중심적인 것이 고드윈에게 빠져 있는 항목이다.”

스미스는 자본가들이 사회에 대해 산출하는 경제적 이익은 “자본가의 의도는 아니다”며 스미스는 자본가의 의도를 “비열한 탐욕”으로 특징지었다. 자본가들은 “즐거움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조차 함께 만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들의 “대화는 사회에 대한 음모나 가격을 올리기 위한 어떤 계략으로 끝을 맺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자본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던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밀의 절충, 마르크스의 복합, 제퍼슨의 전향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 제도 때문에 편협해지고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현재의 비열한 교육과 비참한 사회 제도들이” 사람들이 일반적 행복을 누리는 데 “유일하게 진정한 방해물”이라고 한다. 소웰은 밀을 절충주의라고 보지만 이 부분만큼은 무제약적 비전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맬서스는 인간의 고통이 “인간 본성의 고유한 법칙 때문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규칙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소웰은 “제약적 비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들 중의 하나”로 맬서스를 꼽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과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미래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있는 독특한 복합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소웰의 책에서 이 사상가들은 마치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듯이 상반되는 주장들을 마구 쏟아낸다. 어수선하지만 싸움 구경은 재밌다.

“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무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의 큰 악- 예를 들면 전쟁, 가난 그리고 범죄 -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며 무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들의 특별한 원인을 찾고 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 부 혹은 법을 준수하는 사회의 특별한 원인들을 찾는다. 아담 스미스는 “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18세기에 두 차례의 대혁명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전자는 무제약적이고 후자는 제약적인 다른 비전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로베스피에르는 해결을 추구했고 해밀턴은 균형을 추구했다. 그런데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희생이 늘어나자 반대하게 된다. 소웰이 밀과 마르크스를 복합파로 분류했는데 제퍼슨은 전향파다.

이백 년간 계속된 이데올로기 갈등
“어떤 사람들은 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무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본성과 사회 인과율에 대한 어떤 분명한 핵심 가정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으로 모든 사회 이론가들을 구분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분류를 통해 중요한 많은 인물들과 지난 이백 년간 계속되어 온 이데올로기 갈등의 논점을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는 있다.”

무제약적 비전파는 18세기의 고드윈, 루소, 볼테르, 콩도르세, 토머스 페인, 홀바흐 그리고 19세기의 생 시몽, 로버트 오웬, 조지 버나드 쇼 이어 “20세기엔 정치학자인 해롤드 라스키, 경제학에서 솔스타인 베블렌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그리고 법학에서 이론에선 로널드 드워킨, 실천에선 어를 워런으로 대표되는 사법적 행동주의 옹호자들과 같은 전 학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적 비전파는 “세계의 악을 개선하고 진보를 조장하기 위해 도덕적 전통, 시장 혹은 가족들과 같은 어떤 사회 과정의 시스템 특성들에 의존”한다. 제약적 비전파는 토머스 홉스, 스미스와 “에드먼드 버크와 『연방주의자의 보고서』 저자들, 법학의 올리버 웬델 홈즈, 경제학의 밀턴 프리드만, 그리고 일반 사회 이론에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등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는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중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전향하기도 한다. 5장에서 ‘복합적 비전들’로 마르크스주의와 공리주의를 설명한다. 소웰은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바로 특정 이론의 구조와 작용에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나 내재되어 있는가 여부”가 기준이라고 한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이라는 이분법은 인간의 고유한 한계가 비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느냐 여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현실이다. “비전의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들이 충돌하게 된다.”(오창엽 기자) 

07.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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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arx 2007-08-14 02:24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몹시 민망하군요. 당시 인터넷신문 기자로서 매일 기사를 작성하는데, 신문사로 책들이 왔습니다. 영어공부법과 처세술 등의 책들이 많지만 가끔 신간인문서적이 출간 한달쯤 전에 오곤 했습니다. [비전의 충돌]은 개인적으로는 그리 호감가는 책이 아니었으나 그 주제, 저자의 주장 또 그 안에 언급되는 무수한 인물들에 대한 논평과 정보를 볼 때 좀더 폭넓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읽힐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압축하는 서평이 아니라 먼저 읽은 독자로서 그 내용을 음미했던 것이지요. 제 생각은 최소한으로만 포함해서요.
많은 언론사의 책담당기자들이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요약해서 기사를 씁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기자가 보도자료 압축한 걸 베끼기도 합니다. 사실 다 읽고 쓰나 홍보글을 표절하나 비슷하지요. 반면 인터넷신문의 경우 분량을 길게 할 수 있으니 전문서평기자나 객원기자가 있다면 보다 성실한 책소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출판사 쪽 분이 그러더군요. 책을 읽고 기사를 써서 고맙다고. 해당 책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든 안 하든 기사를 쓰려면 책을 읽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현실이 부박하니 당연한 게 특이한 게 되버리는 거겠지요.
훗날 이렇게 갈무리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잠을 줄여서라도 더 공을 들였어야 하는데 말이죠.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찾아본 서평들 중에는 가장 길고, 그래서 가장 유익한 서평이었습니다. 민망해하진 마시길.^^

푸하 2007-08-14 02:46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고 이를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건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