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미들리의 <본성과 양육>(김영사, 2004)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고 나는 나중에야 구해놓았다. 교양과학서 서가에 꽂아두기만 했었는데 도킨스 덕분에 다시 꺼내들었다. 국역본에서 챙기고 있지 않은 책의 부제는 '유전자, 경험,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Genes, Experience, and What Makes Us Human)'이다(국역본의 부제는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이다). 도킨스 왈, "도중에 놓기 힘든 책이다. 얼마나 훌륭한 작가인가. 그는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다."
저명한 이 과학저널리스트/저술가의 책들은 국내에 네 종이 번역돼 있는데(<붉은 여왕>의 경우는 개역본이 나왔다) 나는 물론 모두 챙겨두었고 <이타적 유전자>는 영어본도 갖고 있다. 참고로, <HOW TO READ 다윈>(웅진지식하우스, 2007)과 <리처드 도킨스>(을유문화사, 2007)의 저자/편자인 '마크 리들리'는 혼동하기 쉽지만(내가 예전에 혼동했었다) 또 다른 '리들리'로서 도킨스의 제자이자 현재는 옥스포드대학 동물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12인의 털보들(Twelve Hairy Men)'은 <본성과 양육>(원제대로 하면 <양육을 통한 본성>)의 '머리말'이다. 지난 2001년 '게놈' 발견의 가져다 준 충격이 이후에 씌어진 것인데 전체적인 요점을 미리 짚어주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과학서는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시사점도 던져준다.
먼저 요점은 이렇다: "나는 인간의 행동이 본성과 양육 모두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어느 쪽도 편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용의 도'를 취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게놈은 실제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왔지만 그 변화는 논쟁이 종료되었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누르고 승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논쟁의 양쪽이 중간에서 만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주장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반대로 인간 행동이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이 밝혀지면 논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본성 대 양육 논쟁이 아니라 양육을 통한 본성 논쟁이 될 것이다."(17-8쪽)
그리고 시사점. 리들리는 가상의 사진 한 장을 떠올려보자고 제안하는데, 1903년에 찍힌 이 사진은 "가령 바덴바덴이나 비아리츠 같은 휴양지에서 열린 국제회의의 기념사진이다." 이 가상의 사진이 국역본 속지에 들어 있는 것인데(그러니까 인물들은 모두 조합된 것이다) 거기엔 '1903년 4월 1일 프랑스 바이리츠에서'라고 돼 있다(만우절에 찍은 사진이다!). 비아리츠는 프랑스 남서부의 해변 휴양지이다. 즉 아래 사진 같은 곳에서 국제회의를 연 걸로 치자는 것이다.
참석자는? "사진 속 인물들은 남자들이지만 어린 소년도 있고, 아기도 있고, 유령도 있다(*실제 나이를 고려하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나머지는 중년이나 노인이고, 모두 부유한 백인이다. 모두 12명인데, 나이에 걸맞게 대부분 수염을 기르고 있다. 미국인, 오스트리아인, 영국인, 독일인이 각각 2명이고,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스위스인이 1명씩이다."(18쪽) 이 사진의 모델이 된 건 "1927년 솔베이에서 찍은 물리학자들의 유명한 단체사진(아인슈타인, 보어, 마리 퀴리, 플랑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렉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이건 진짜 사진이다!).
이 물리학자들의 단체사진과 견주기 위해 리들리가 불러모은 "12명은 20세기를 지배하게 될 중요한 인간 본성 이론을 완성한 사람들이다." 이 가상의 사진을 옮겨올 수 없으므로 다만 상상만 해보시길(국역본에 들어 있는 사진은 모두가 서 있는 걸로 보아 리들리가 상상해본 사진과는 다른 버전으로 보인다. 국역본 편집자들의 작품인가?).
"우선 머리 위에 떠 있는 유령은 찰스 다윈(1809-1882)인데, 이 사진을 찍기 11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턱수염이 가장 길다. 다윈의 생각은 원숭이의 행동에서 인간의 특성을 찾는 것으로, 가령 미소 같은 보편적 인간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진 왼쪽 끝에 꼿꼿이 앉아 있는 노신사는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1822-1911)으로, 81세의 나이에도 매우 정정해 보인다. 양쪽 뺨에는 구레나룻이 흰쥐처럼 매달려 있는 골턴은 유전의 열렬한 옹호자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61세인데, 각지고 어수선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 본능의 옹호자인 그는 인간이 가진 충동이 다른 동물보다 적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다고 주장한다."
"골턴의 오른쪽에 서 있는 식물학자는 인간 본성과 관련된 모임에 참가한 것이 못마땅한 듯 헝클어진 턱수염에 찡그린 인상을 하고 있다. 그는 55세의 네덜란드인 위고 드브리스(1848-1935)로, 유전의 법칙을 발견했지만 30여년 전, 모라비아의 수사 그레고르 멘델이 자신보다 10년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안 후로는 늘 우울한 표정이다."
"그 옆에 선 54세의 러시아인 이반 파블로프(1849-1936)는 회색 턱수염이 유난히 무성하다. 경험주의 옹호론자인 그는 마음의 열쇠가 조건 반사에 있다고 믿는다."
"그 앞엔 유일하게 말끔히 면도한 존 브로더스 왓슨(1878-1958)이 앉아 있다. 파블로프의 이론을 '행동주의'로 발전시킨 그는 단지 훈련만으로도 성격을 임의대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파블로프의 오른쪽에는 통통한 체격에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독일인 에밀 크레펠린(1856-1926)과, 깔끔하게 턱수염을 기른 비엔나 출신의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서 있다."
"47세의 동갑인 두 사람은 후대의 정신병 의사들에게 '생물학적 설명에서 벗어나 개인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각자의 이론을 가르치는 중이다."
"그 옆에는 사회학의 개척자, 에밀 뒤르켐(1858-1917)이 있다. 45세의 나이에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른 그는 사회적 실체가 그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정신적 파트너에 해당하는 사람이 그의 옆에 서 있다. 45세의 프란츠 보아스(1858-1942)는 축 늘어진 콧수염과 결투의 상처가 보이는 위세 당당한 얼굴을 똑바로 들고, 인간 본성이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 본성을 만든다고 목소리 높여 주장한다."
"맨앞의 어린소년은 스위스에서 본 장 피아제(1896-1980)로, 그의 모방과 학습이론은 세기 중반에 결실을 맺을 것이다."
"유모차 속에 있는 아기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콘라트 로렌츠(1903-1989)다. 1930년대가 되면 그는 하얀 염소 수염을 자랑하면서 본능에 대한 연구를 부활시키고 각인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설명할 것이다."
세기의 학자들을 이렇게 다 불러 모아놓고 저자 리들리가 제기하는 주장: "나는 이 12명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주장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그들은 모두 옳았다.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며, 도덕적으로 옳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진실의 씨앗을 간직한 독창적인 개념으로 인간 본성의 과학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옳았다. 그들 모두 거대한 벽에 벽돌을 놓았던 것이다."(21쪽)
요컨대 "인간 본성은 다윈의 보편성, 골턴의 유전, 제임스의 본능, 드브리스의 유전자, 파블로프의 반사, 왓슨의 연상, 크레펠린의 역사(개인사), 프로이트의 형성적 경험, 보아스의 문화, 뒤르켐의 노동 분업, 피아제의 발달, 로렌츠의 각인이 모두 결합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합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설명도 부실해질 것이다."
여하튼 그만하면 화려한 캐스팅이다.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 여행'을 매트 리들리와 함께 시작해볼까...
07. 08. 05.
P.S. '12인의 털보들' 가운데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은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그밖에 골턴과 드 브리스, 그리고 왓슨과 보아스도 국내에는 소개된 바가 없지 않나 싶다(왓슨의 경우엔 그의 제자인 B. F. 스키너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다윈과 프로이트도 제외하고 나머지 5명의 책들만 꼽아보도록 한다(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외
■ 이반 파블로프
■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외
■ 장 피아제, <교육론>
■ 콘라트 로렌츠, <솔로몬의 반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