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이란 말에서 당신이 어떤 이념적 경계, 가령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의 사색>(한겨레출판, 2002) 같은 책을 떠올렸다면 좀 미안한 일이다. 아래 기사에서 '경계인'은 '경계성 성격장애인'을 가리키고 나도 그런 뜻의 제목을 붙였다. '경계성 성격장애로부터 내 삶 지키기'란 부제를 가진 신간 <잡았다, 네가 술래야>(모멘토, 2007)에 관한 리뷰인데, 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두 가지 근거를 갖는다. 하나는 우리 주변에 '경계인'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다는 것.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게 다른 하나다. 부제를 고려하건대 저자는 경계인들의 주변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취지로 책을 낸 듯싶다. '심리치료'로 분류되는 책들의 홍수 속에서 한 권 건져놓는다.

한겨레(07. 08. 04) 경계성 성격장애인, 이 ‘웬수’ 같은 그대여!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이 시에는 폭발하는 질투와 좌표 잃은 사랑이 염천의 개처럼 헐떡인다. 그렇지만 문학적 열정과 회한이 상대를 할퀴고 끝내 자신마저 할퀴는 실제 상황으로 바뀐다면 그사람은 경계성 성격장애인(이하 경계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피부의 90%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은 사람과 같다. ‘정서적 피부’가 없어 사소한 접촉에도 심한 괴로움을 느끼니까. 경계인은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예측 못할 행동으로 주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자꾸 도망가는 것 같아 조바심내고, 검은과부거미한테 쏘인 것처럼 펄쩍펄쩍 미쳐 날뛴다.
경계인의 참담한 고백을 들어보자. “어제 약혼자에게 악을 쓰다가 약혼반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논리적 이유는 없지만, 그가 바람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머니와 통장을 뒤진다. 직장으로 찾아가서 그가 있는지 확인한다. 별일 없으면 안도감과 함께 창피함을 느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헛일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변 사람이다. 경계인은 누군가를 붙잡아 술래로 만들어야 하고, 그 대상이 된 사람들(이하 비경계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자신이 왜 그 사람한테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경계인보다 더 참담한 비경계인의 말도 들어보자. “직장에서 귀가 시간이 5분이라도 늦어지면 아내는 끊임없이 전화를 건다. 친구들과 외출할 수도 없다. 영화를 보는 중에도 벨이 울린다. 스트레스가 심해 이제는 아내와 함께가 아니면 친구와 어울리는 일도 그만두었다.”

경계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은 배우자, 연인, 가족, 친지 등 그들의 곁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 경계인을 아끼기 때문에 훌쩍 떠나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때로는 ‘감정 노동’이, 때로는 ‘정서적 전투’가 필요한 지피지기의 살벌한 전장이다. 비경계인의 생생한 증언이 이 책의 고갱이다. 그 생생한 증언은 ‘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이며 훌륭한 ‘생활의 지혜’다. 자,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80년대 ‘이런 사람을 신고하자’는 국가안전기획부의 간첩 식별법 같은 몇 가지를 열거해 본다.
△그 사람이 감정변화가 극심한지 △자신의 행동을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반대로 타인의 행동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는지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의도와 다르게 왜곡해 공격하는지 △흑백논리의 양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는지 △자신이 관심의 초점이 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고 느끼는지 △바라는 바가 변화무쌍해서 도저히 비위를 맞출 수 없는지 △과음, 약물남용, 폭식, 난폭운전 등 자해적 행동을 하는지 △당신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늘 빠뜨리는지를 살펴보자.
해당 사항이 많다면 당신은 피곤하다. 그러나 쉽게 매도하지는 말자. 경계인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수칙들을 숙지하면 비경계인이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을 얻게 된다.
주변에는 비교적 중증인 나 자신을 포함해 경계인 의증 환자들이 여러 명 보인다. 실제로 1996년 서울 여자대학 3곳의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 5.6%가 경계인이었다. 그들은 타인과 친밀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 약물을 쓰기도 하지만 감정, 행동, 사고, 생리적 요인까지도 세심하게 보살펴야 한다. 각각의 사례들은 그와 당신 사이에 놓인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를 밀어내며 소통의 첫 단추를 끼우게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계인도 하늘에서 떨어진 별종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 가진 특징을 좀더 과장되게 지닌 사람들일 뿐이라는. 그러므로 경계성 성격장애인은 나와 당신에게 들이대는 반성의 거울이다.(손준현 기자)
07. 08. 04.

P.S. 혹 주변에 '경계인'이 없다면(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지만) 경계성 성격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영화들을 참조해볼 수 있겠다. 김혜수 주연의 <얼굴 없는 미녀>(2004)가 그런 영화이다('경계인' 증상에 더 맞는 제목은 '피부 없는 미녀'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