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근작 <폭력의 역사>(2005)의 국내상영 소식은 예고된 바 있는데, 곧 상영되는 모양이다(데이비드 린치의 신작 <인랜드 엠파이어>와 함께 최근 가장 주목되는 개봉작이다. 상업적으로가 아니라 영화적으로).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이 두 감독의 영화세계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지만 아직 온라인에서는 읽을 수 없기에 대신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동시 상영관'에서 <폭력의 역사>에 대한 리뷰만을 옮겨놓는다. 분량이 읽기에 적합한 것도 옮겨오는 이유이다(기사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문화일보(07. 07. 24) 가정을 지키려는 ‘家長의 폭력’

‘비디오드롬’과 ‘플라이’, ‘크래쉬’와 ‘엑시스텐즈’ 등의 영화로 기억되는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인간의 육체와 기계가 결합해 이루어지는 하이브리드(hybrid)한 영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영화는 공포와 공상과학(SF)을 오가며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극단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울 수 있는 존재인가를 파헤친다.

‘비디오드롬’에서는 인간이 텔레비전과 몸을 합치고 ‘크래쉬’에서는 주인공들이 결국 자동차와 섹스를 나누는 식이다. ‘플라이’같은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기계 대신 다른 생명체, 곧 파리의 유전자를 합쳐 결국 파리인간이 되고 만다.

이 해괴망측할 만큼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얘기들을 통해 크로넨버그는 의도적으로 반(反)휴머니즘의 노선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반인간주의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탐구 곧 진짜 휴머니즘에 대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그의 기이한 상상력이 닿으려고 하는 지점이다.



국내에서 뒤늦게 단관상영되는 크로넨버그의 2005년작 ‘폭력의 역사’는 전작들에 비해 에피소드들이 상당히 ‘인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기계인간이나 파리인간 따위는 이번 작품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는 이제 극단적 사유의 관념론자라는 평가를 벗어나려는 듯 인간 삶의 구체적 행태를 뒤좇는 데 주력한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소박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비고 메텐슨)은 변호사인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평온한 일상은 어느 날 이 식당에 별다른 이유없이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두 악당의 이미지는 마치 트루먼 카포티가 쓴 ‘콜드 블러드’의 두 악한들을 연상시킨다) 톰은 여종업원의 목숨을 위협하는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자신도 다치게 된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톰은 사람을 구한 영웅으로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악몽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왔다는, 언뜻 보기에도 마피아로 보이는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 일당은 톰 스톨의 식당과 집을 오가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칼 포가티는 톰이 20년전 필라델피아에서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킬러 조이 리치였다며 그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한다. 자신은 절대 조이 리치가 아니라고 부인하던 톰 스톨은 이들의 집요한 추궁에 조금씩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폭력의 역사’라는 다분히 학술적 분위기의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역사적 이론이나 사회정치적인 거대담론을 내세운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폭력의 일상성 혹은 그 순환성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인 삶에 노출돼 살아가고 있으며 폭력적인 문제에 얼마나 근접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 굴레에서 자유롭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폭력은 결국 폭력으로 계속해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폭력의 일상화는 9·11 이후 전세계에 만연돼 있는 테러의 공포와 무관치 않다. 주인공처럼 일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애썼던 현재적 삶의 가치가 무엇이든, 잊고 싶은 과거가 어떻든 그 구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가해자였고 누가 피해자였으며 궁극적으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기생명력을 가지고 운행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아내 에디는 20년 가까이 과거를 속여 온 남편 톰을 용서하지 않는다. 톰으로 하여금 과거의 킬러, 곧 조이 리치의 삶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건 결국 누구인가. 칼 포가티 같은 마피아 일당인가 아니면 톰에게 마음의 벽을 쌓는 아내 에디인가. 폭력의 공모자는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이다.(오동진 영화평론가)

07. 07. 24.

P.S. 폭력에 관한 책 몇 권을 독서목록에 올려놓고 있다. 그러다 공연히 톰의 경우처럼 '폭력적인' 나 자신을 '재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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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7-2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 이런 영화는 CGV 강남 같은 데에서는 개봉 안하나열?

로쟈 2007-07-2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그런 게 보이지 않는 폭력이지요. 대신에 쓸데없는 영화들만 주변에 널려 있는 현실...

수유 2007-07-28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데이비드의 영화는 즐기진 않으나 봐두어야 할 영화로 분류하고 날짜를 정하는 중입니다..그러고보니 즐겨 달려가 행복하게 봐야 할 영화들과 <폭력의 역사>같은 영화와 여유를 가지고 음미하듯 천천히 걸어가 볼 영화들로 내 방학의 영화들이 나누어지네요..^^

로쟈 2007-07-28 21:27   좋아요 0 | URL
방학의 '여유'가 느껴지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