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옮겨놓은 '공부론'을 저녁을 먹고 나서야 시간을 내 마무리짓도록 한다. 사실은 가짜 학위와 관련해서 역시나 예일대 박사학위를, '인크레더블'하게도 32살의 나이에 3개나 획득했다고 소개된 '석학' 조중걸/조송배 교수가 생각이 나서(http://blog.aladin.co.kr/mramor/1055226 참조) '강유원'을 다시 검색했다가 우연히 김영민 교수의 칼럼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에 대한 논평('신문읽기의 어려움')을 읽게 되었고 그 두 기사를 아침에 옮겨놓았었다. 먼저 어떤 내용인지는 비교해가며 한번 읽어보시길. 필자 소개상으론 '철학자 vs 회사원'이 아니라 '철학자 vs 철학자'이므로 맞장을 뜨는 게 문제되지는 않겠다. 동급이니까.

  

한겨레(07. 05. 20) '아뵤~’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

“이소룡이 유연성으로 이룬 스타일을 흉내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길 소망했다. 쿵푸처럼 공부도 그런 것이다. 칼이든 펜이든 진실을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들면 자신의 스타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술가 리샤오룽(이소룡, 1940~1973)은 어떤 ‘스타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태하거나 보수적인 치들은 종종 스타일에 반감을 지니지만, 스타일은 주류의 각질을 뚫는 아웃사이더의 징후로 일정한 혐오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헤겔과 마르크스의 분쟁에서 보듯이, 스타일이 없이는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

미완의 <사망유희>를 유작으로 남긴 채 이소룡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잡룡들을 내세워 모작들이 제작되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다는 사실만 날로 분명해졌다. 그러나 양식(Typus)은 스타일이 아니다. 요컨대 스타일은 흉내와 더불어 죽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식은 오히려 흉내내기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고해질 뿐이다. 그래서, 스타일에는 매순간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치열한 실존의 열정 속에서 승화시키는 아이러니의 빛이 있다. 키르케고르처럼 말하자면 스타일 속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양식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문화적 법식이다. 가령,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이란 꼭 그런 것이다. 나아가,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 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소룡의 쿵푸(工夫) 스타일에는 형이상학적인 게 없다. 철학도이기도 했던 그는 더러 노자류의 잠언을 흘리면서 ‘물처럼 되라!’는 주문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테크닉은 간결하게 정곡을 찌를 뿐 실없이 용장스러운 데가 없다. 그는 스크린의 스타가 됨으로써 스펙터클화한 영자(英姿)를 탁이(卓異)하게 뽐내면서, 군부독재와 개발지상주의의 아버지 체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모든 불량스러운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우리는 교실에서 책상을 마구 뛰어넘고 헛되게 쌍절곤을 돌리다가 형광등을 부수곤 했다. 그의 스타일은 응당 양식으로 굳어지면서 스타의 비용을 치르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 양식 속에서 우리의 스타일이 부활하기를 소망했다.

그는 자신의 무술을 설명하는 중에 형(type)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늘 ‘자기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디-자인(de-sign)이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사인(sign)이고, 탈(脫)코드는 그 자체로 가장 매력적인 코드’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중적 이미지, 그 시절인연(時節因緣)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15살의 과도기를 깜냥껏 지나면서 이소룡의 스타일을 향한 불가능한 욕망을 반복강박적으로 양식화했다. 과거,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었다. 즉, 동화(同化)-이화(異化)의 변증법을 금강산을 스쳐가는 계절처럼 무심히 반복하는 것! 그리고, 이른바 염화시중의 길은 그 깨침의 극점에서 비밀처럼 보여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비경인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이미지가 재현하는 한편 우스꽝스러운 양식은 스타가 된 아웃사이더들의 세속적 운명이다. 그들은 스타일을 양식 속에 죽이면서 세속의 명성을 얻는다. <사망유희>에서 노란 체육복을 입은 채 예의 괴상한 새울음을 토하며 상대의 쌍단봉을 대적하여 회초리처럼 길게 깎은 대나무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은 몹시 흥미로운 파격이다. 그 복색과 무기의 취지는 그가 늘 한결같이 그의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유연성(pliability), 즉 주류의 엄숙주의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유연성의 이단과 다를 바 없다. 뛰어난 춤꾼이기도 했던 그는 그 이단적 유연성으로써 그만의 무술 스타일을 얻었으나, 그 스타일을 대중의 환호 속에서 양식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대중적 스타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연성은 오직 실전 무술의 실용성을 위한 것이었다. <징비록>(1647)에서 유성룡은 신립의 호령이 번거롭고 요란스러워 반드시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했고, 인재 등용의 귀재였던 세종대왕은 말수를 줄이고 듣기에 기민했다고 했지만, 쿵푸도 공부 곧 그런 것이다. 주먹이든 말이든, 칼이든 펜이든,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해야 한다. 연암 박지원도 학문과 문장을 논하면서 억지로 기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요점은, 자신의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곧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언거번거한 말은 외려 어눌한 것보다 못하고, 형(型)만 요란스러운 동작은 실없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추억! 그것은 그대로 어떤 공부의 환상이다.(김영민/철학자)

미디어오늘(07. 06. 16) 신문읽기의 어려움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의 일이다.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내 친구 하나가 ‘요새 한겨렌지, 한거랜지 때문에 골 때린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같이 장사하는 사촌 형이 한자를 몰라서 그동안 신문을 통 못 봤었는데, 한겨레 나오고 나서는 신문을 어찌나 열심히 읽는지 세상 물정을 다 가르치면서 야단을 치는 통에 그런다”는 것이었다.

한글 전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깨우쳤는지를 뚜렷하게 느낀 사례 중에 그만한 것이 없었다. 이는 달리 보면 신문이 어떤 사람을 독자로 여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신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그런대로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우리교육 교사아카데미(www.uriedu.co.kr/edu)라는 곳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여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몇 주 짜리 강의를 한다. 수강생 전부가 교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래의 목적에 합당하게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읽어 볼만한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읽기에 필요한 내용을 곁들여 설명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함께 궁리해보는 것이 그 강의가 하는 일이다. 이 강의에서 가끔 사용하는 일종의 교재 중의 하나가 한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글인데, 더러는 신문기사가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사실 마땅한 기사가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강의에 사용하기 위해 신문을 검색하다가‘아뵤∼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라는 글을 한겨레(5월19일자)에서 읽게 되었다. 철학자 김영민씨가 쓴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준비하여 교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검토의견을 내게 하였다.

검토의 기준은 이러했다. 첫째, 주장하려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것이 글 첫머리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주장되고 있는가. 둘째,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핵심적인 개념들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가. 셋째,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이 적절하게 준비되어 배치되었는가. 마지막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독자가 읽기에 어려움은 없는가.

몇 분 동안 검토를 마친 교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것들이었다. ‘논지가 분명하지 않아 읽기가 짜증스럽다’ ‘스타일과 양식이 진짜 공부와는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정의가 없다’ ‘공부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자기가 얼마나 유식한지를 자랑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어떤 이는 ‘한겨레 편집담당자는 도대체 무얼 하기에 이런 글을 신문에 싣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였다. 나야 속사정을 모르니 ‘철학자의 난해한 글을 읽고 이해할만한 도사가 신문사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개로 넘겨버렸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신문을 읽는 사람 중에 이 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자 원고지 열 매 남짓한 이 글을 이해하여 공부법에 관한 뭔가를 터득하려면 “헤겔과 마르크스의 분쟁”은 무엇인지,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은 또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인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헤겔의 철학을 전공한 나도 “동화(同化)-이화(異化)의 변증법”은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건 다 제쳐두고라도 한글 전용에서 출발하였기에 어려운 한자말을 풀어서 쓰려는 방침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 한겨레에서 “영자(英姿)”나 “탁이(卓異)” 같은 낯선 한자어가 들어가 있는가하면 굳이 나란히 쓰지 않아도 될 ‘Typus’와 같은 라틴어를 곁들인 이런 글을 싣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철학자 김영민씨가 어떤 의도로 이 글을 썼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가 이소룡에게서 뭘 배우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신문이라는 공공매체의 편집담당자에게, 그것도 한겨레의 담당자에게 꼭 묻고 싶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이도 한번 쓰윽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싣는 이유는 뭔가. 그런 글을 실으면 김영민씨의 표현처럼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스타일이 생겨나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신문이 되는가.(강유원/ 철학자)

07. 07. 18.

P.S. 나는 이소룡 세대가 아니다. 그의 영화 <정무문>(1972)을 극장에서 보긴 했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분류하자면 나는 성룡 세대이고, 성룡보다 먼저 나를 매혹했던 이는 <소림 36방>(1977) 같은 영화에서의 유가휘였다(왜 있잖은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요즘처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게 아니라 으레 쇼브라더스의 홍콩무협영화를 보던 시절 말이다).

유가휘? 황비홍의 직계제자라고도 하는 이 '무술인 배우'는 <킬빌2>에도 우마 서먼의 상대역 도인으로 나오기도 했다(소림 '무술인 배우'의 계보는 알다시피 이연걸이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지난달인가 <소림 36방>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잠깐 다시 보니 30년전에 느꼈던 '비장함'은 온데간데 없고 유치함만이 남아 있었다(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때쯤 학교의 단체관람으로 봤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대표작을 <소림 36방>에서 <소림 용문방>으로 바꾸었다.  

잠시 여담이 새어나왔는데, 사실 소림사 무예로 잘 알려진 '쿵푸'가 '공부(工夫)'와 같은 어원을 갖는, 그러니까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 말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다(오래전 김용옥의 책에서 처음 그런 내용을 읽고 '그렇구나!' 했었지만 이젠 그런 내용을 접하면 식상하다). 예전에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799694)에서 주장한 대로 나는 '자기단련'이나 '자기연마'로서의 '공부'보다는 '가르치고 배움' 혹은 '가르치면서 배움'으로서의 '학습'에 더 놓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비변증법적이다.

 

 

 

 

해서,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가 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김영민은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가 있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그것은 자기만의 문체(스타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영자(英姿)'나 '탁이(卓異)' 같은 낯선 한자어"나 "굳이 나란히 쓰지 않아도 될 ‘Typus’와 같은 라틴어를 곁들인" 이유는 그런 문체를 만들어나가는 그의 (혼자만의) 보행/산책과 관련되며 구경꾼-독자들과는 무관하다.

'몸으로 하는 공부'를 주창하는 강유원은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타자를 끌어들이는데, 그건 '가르치는 자'로서의 자신의 포지션을 항상 고려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인용한 칼럼에서 그는 '교사들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다른 '공부'를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기본적으로는 강유원 역시 '쿵푸로서의 공부'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공부는 각자가 하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근육을 단련한다고 해서 남들의 뱃살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자기 뱃살은 자기가 빼야 한다. 

하지만 '이소령에게서 배우는 공부'가 있다면, '성룡에게서 배우는 공부'도 있을 법하다. 어떤 성룡인가? 바로 '재수없는 영화' <취권>(1978)의 성룡이다. 무술이라기보다는 코미디를 닮은 성룡식 쿵푸.  

"평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중하게 행동하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옷 속에 감추어놓은 무골을 드러내고 한 방에 적들을 제압해버리는 이소룡! 그는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었고 도탄에 빠진 약자들의 구원자이다. 그러나 <취권>에서의 성룡은 이소룡과 정반대의 면모를 하고 있다. 그가 연기한 황비홍은 약자들의 구원자들이기 보다는 아녀자들에게 치근덕대는 무뢰배이고,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 아닌 무술 연습이 하기 싫어 잔꾀를 부리는 말썽꾸러기이다. 까불거리는 모습은 진중함과는 거리가 먼데다 무도인이라면 당연히 정정당당해야 할 승부에서 번번히 속임수를 쓰곤 한다.

결국엔 그의 필살기가 되는 ‘취권’도 각이 잡혀있는 절권도와는 사뭇 다르다. 비록 ‘술에 취한 여덟 명의 신선들의 비기’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것은 시전함에 있어 결코 ‘가오’를 기대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무술이다. 여기에 성룡은 (지금은 그의 영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지형지물이용 무술’을 융합했으니, 그의 권법은 ‘무예’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예’였다. 이소룡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성룡은 ‘광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취권>, 또 한 마리의 용(龍)을 탄생시키다', Joycine, 04. 02. 17)

요는, 보행 공부나 몸으로 하는 공부 말고 '잔꾀'로 까불거리며 하는 공부도 있다는 것. 자신의 무공으로 상대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지형지물'을 임기응변으로 이용해서 어쩌다 상대를 제압하는 수도 있는 법이고. 비록 우스꽝스럽고 '가오'가 잘 안 나오기는 해도 이걸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고 삶의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다면 나름 그럴 듯하지 않을까?.. 아침에 우연히 마주친 기사(=지형지물)들 때문에 잠시 '기예'를 부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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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5 17:41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필라멘트 2007-07-18 12:29   좋아요 0 | URL
철학자들이야 뭐 어떤 현상을 어려운 개념으로 해석하는게 그들의 일이니 뭐라 할 순 없지만, 강유원씨 말마따나 박사학위자들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일반 신문독자들에게 들이댄게 화근이군요. 신문 편집담당자가 독자들이 '게오르크 지젤이 설명하는 양식'이나 '동화-이화의 변증법' 정도는 알 거라고 본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독자들이 저 글을 읽고 불편함내지 거부감을 좀 느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7-07-18 23:29   좋아요 0 | URL
독자의 수준을 탓하기엔 너무 체하는 글입니다...

섬나무 2007-07-18 18:52   좋아요 0 | URL
두 분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됐었는데요 강유원씨의 주장은 일리 있음에도 거침 때문에 거부감이 듭니다. 김영민씨 글의 매력은 저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생한 단독자적 체취이기도 합니다. 저도 신문에서 저런 글을 만났다면 그 신문의 편집담당자가 궁금했을 겁니다. 누굴까 이런 싱싱한 파행?을 결행한 사람은?

로쟈 2007-07-18 23:29   좋아요 0 | URL
김영민씨의 확연한 '문체'는 개성이겠지만 저는 외국어를 섞어쓰는 건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동무와 연인' 같은 연재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Joule 2007-07-19 01:16   좋아요 0 | URL
그래도 내 뱃살은 내가 빼야 한다는 말은 너무 뼈저립니다. 아참, 저 지젝 너무 좋아하게 되었어요. How to Read 라캉 다음 책 좀 추천해 주세요. 더는 귀찮게 안 물어 볼게요. 지금 같아서는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쪽을 읽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추천해 주시면 덩달아 같이 읽어 제 뱃살 단련에 도움이 좀 되지 않을까 싶네요.

jouissance 2007-07-19 02:3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강선생 칼럼 실린 이후에 쓰여진 김선생의 칼럼들은 확실히 이 정도까지 과하진 않아요. 짐짓 무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김선생이지만 어떤 자각이 온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김선생 글들을 조금 챙겨보는 사람으로서 항상 불편했는데 강선생에게 감사해야겠어요^^

Joule 2007-07-19 02:39   좋아요 0 | URL
어머나, 주이상스는 지젝의 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라딘에도 주이상스가 있었네요.

caute 2007-07-19 20: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외국어를 섞어쓰는 게 문제가 되나요? 우리는 외국어로 공부합니다. '외국'어가 아닌 외국'언어'에 대한 자신의 고민이 있다면 그로부터도 자신의 사유 속에서 고유한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참 전에 강유원씨의 글을 알고 있었지만 지나갔는데, 로쟈님 덕분에 강유원씨 홈피에 일부러 들러 사태를 확인했습니다. 강유원씨는 애초 김영민 선생에 대해 편견이 많더군요. 저역시 편견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런 편견으로 낙서는 하되 긴 글은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텍스트 이해와 명석한 표현을 추구하는 분이 왜 그리 한 사람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이해와 왜곡을 하면서도 계속 그에 대한 이야길 할까요. 싫다는 거겠지요.
현재 자신의 철학의 할 일과 방법에 대해 두 분은 다릅니다. 그럼에도 강유원씨의 삐딱하며 감정적인 지적(그 사람의 문제와 의도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 사람의 글쓰기만을 도려내 문제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치기' 이상으로 여겨지진 않군요!) 때문에 김영민 선생의 작업에 대한 실체 없는 비판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글읽기의 어려움을 가지고 그의 글쓰기의 문제를 얘기하자면(그것이 신문이란 대중적 매체라 하더라도) 철학자의 글쓰기는 도대체 어떤 정형화 속에 빠져야 마땅할까요? 저는 김선생과 개인적으로 거의 알지 못하며 항상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의 글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를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곰곰 생각해보면 그의 이야기들은 따라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산 철학의 수입과 앙상한 전달에 급급한 철학동네에서 나름 생동하는 글쓰기를 하는 이라 여겨왔지요. 물론 그의 글에 등장하는 생경한 언어들이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며 한 사람의 사유를 더듬어간다면 글읽기의 본령인 사유 체험이 되는 것 아닐까요.(신문연재에 국한해서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씨'와 '선생'의 호칭은 김영민의 글은 몇 권이나마 접하며 나와 얼마나 다르건 그가 자신의 사유와 말하기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가려는 우리 시대의 선생들 중 한 분이라 생각하게 됐지만, 강유원에 대해선 글의 교류라 할 만한 계기가 없어 생긴 차이입니다(제 게으름 때문이겠지요). 강유원에 대한 저의 인상은 강단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자기 공부하는 사람의 한 모델을 보여주는 사람이라 할까요.

필라멘트 2007-07-19 11:14   좋아요 0 | URL
caute님의 댓글에 대해 잠시 제 생각을 남겨봅니다. 위 포스트의 본질은 꼭 김영민씨와 강유원씨 사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읽는 대상의 지적 수준을 고려한 글쓰기의 효율성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또한 이 문제는 전달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독자에 대한 예의의 문제이기도 하구요. 김영민씨의 글은 제가봐도 일반 신문독자들의 수준을 넘어선 글입니다. 고등학생 수업시간에 대학수준의 강의를 한다고 해서 그 선생님이 결코 유능한 교사는 아니라고 봅니다. 수업대상이 고등학생임을 알면서도 어려운 대학수준의 수업을 한다는 것은 은연중에 지적과시의 의도가 있는거겠지요. 김영민씨도 컬럼청탁을 받았을때 읽는 대상이 일반 신문독자들임을 고려했어야했고 그에 맞는 글을 썼더라면 더 좋을 뻔했습니다. 김영민씨의 글이 비평지에 실렸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독자층을 고려한 지식의 적절한 분류나 배치도 하나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caute 2007-07-19 12:5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필라멘트님. 미묘하지만 이 포스트의 본질에 대해선 저와 이해가 다르신데요. 뭐 중요친 않지만, 이 포스트의 출발은 신정아씨가 환기시킨 외국학위와 실제적 공부내용이라는, 공부의 한 현실과 관련한 로쟈님의 관심이 아닐까요. 허나, 제 댓글은 댓글들의 지형이 만드는 흐름, 거기서 감지되는 분위기와 관련한 것입니다. 과민한 탓도 있겠지요. 또 주인장이 철학자 대 철학자로 그들의 글쓰기에 대한 입장을 대질시킨 것 아닌가요?
더구나 저는 김영민 선생의 글이 신문 책소개 코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일반독자는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그에게 감응받은 일반적인 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신문 연재용 그 글을 비평지(학술적인)에 싣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학술적인 글로서 실릴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뜬금 없지만, 고등학생은 고전문학 못 봅니까? 저도 어릴 때 집에 을유문화사판 고전문학 전집이 있었지만, 오에 겐자부로가 중학교 때 블레이크에게 감응받았다고 한 기억이 나네요. 글읽기도 여러 경로와 때와 인연이 있겠죠.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을 통해 그런 감응을 일으키는 글을 마주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섬나무님 말대로 파격이고, 작은 즐거움이죠.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시대와 사회와 역사, 인간의 현실과 무관한 자기 도취의 현학이겠지요.
님이나 로쟈님은 김영민 선생의 글이 젠 채 한다는 전제에 있으니 서로의 관점이 다른 거죠(피상적이긴 하나, 가까이서 본 바론 과시의 정서 같은 건 없는 분이죠. 그냥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학인일 뿐이지요. 강유원씨도 그런 분일거라 짐작은 합니다만). 그리고 위 글 내용으론 강유원씨 글이 더 문제 있는 글쓰기인데도(실제적으로 예의가 없는) 그것은 지적되지 않는 점 이상하네요. 강유원씬 어떤 판관의 위치에 있나요?

필라멘트 2007-07-19 14:09   좋아요 0 | URL
caute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논쟁을 유발할 성격의 글은 아니라고 봅니다. 컬럼에 대한 각자의 관용의 정도 문제이니 파격적인 글도 실릴 수 있다고 보신다면 어쩔 수 없는거겠죠. 또한 수준 높은 글이 독자의 수준을 더 높일 수 있다고 보는 분들도 있을 거구요. 다만 저는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제 생각을 피력했을 뿐입니다. 꼭 김영민씨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런 파격적 시도들이 오히려 '거북함'과 '외면'의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신문컬럼들을 쓰는 분들은 소위 그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전문학자들이나 연구원들도 일반 신문독자들을 고려해서 내용을 순화시켜 기고합니다. 예컨대 어느 경제학자가 전공인들만이 이해가능한 어려운 경제이론들을 동원해 학술적으로 쓴 컬럼이라면 적어도 신문상으로는 결코 좋은 컬럼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전문분야에서 내공이 깊은 전문가 혹은 학자라도 <신문>이라는 전달매체의 특성을 뛰어넘는 글의 기고는 파격일수는 있겠으나 비효율적이고 낯설음의 부작용을 또한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건 글의 기고에 대한 각자의 관용의 문제이니 저와 생각이 다르다할지라도 caute님의 의견 또한 깊이 존중하면서 저의 생각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p.s
로쟈님의 개인 서재에 저와 같은 미혹한 객이 의견을 피력한답시고 분위기를 좀 흐려놓은 것 같아 로쟈님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로쟈 2007-07-19 16:27   좋아요 0 | URL
수업(계절학기)이 있는 날이어서 아침에 미처 댓글을 달지 못했는데, 벌써 의견들을 나누셨군요.^^ caute님의 의견은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나 '자리' 문제라고 봅니다. 자신의 책에서라면 허물이 아니겠으나 일간지 지면에서 "키르케고르처럼 말하자면 스타일 속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양식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문화적 법식이다. 가령,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이란 꼭 그런 것이다. 나아가,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 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라고 쓰는 건 누가 보더라도 현학의 과시 이상은 아닙니다(혹은 '혼자만의 보행'이거나). 강유원은 거기에 대해 비판적인(하지만 상식적인) 코멘트를 한 거라고 생각하고 저도 이 건에서만큼은 그의 의견에 따릅니다.

그리고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쿵푸로서의 공부'가 갖는 문제점이었습니다. 자기단련의 문제, 자기 뱃살 빼기의 문제로 공부를 환원하는 태도가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의 함정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이소룡의 스타일(혹은 복근)을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것처럼 그에게서 배우는 '공부' 또한 일반화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술을 설명하는 중에 형(type)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늘 ‘자기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디-자인(de-sign)이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사인(sign)이고, 탈(脫)코드는 그 자체로 가장 매력적인 코드’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중적 이미지, 그 시절인연(時節因緣)과 같은 것이었다." 같이 (대중적으로는) 소통불가능한 문장이 나온 것이겠지만...

kritiker 2007-07-19 17:2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강유원의 김영민비판을 여기에서도 보게되는군요(존칭생략)
그 비판(의 도를 넘은 비난)은 오래된 것이어서 제가 그의 홈피나 그의 홈피에 있는 각종 강의를 통해 들은 것만도 벌써 3년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근데 딱 위의 비판 수준에서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의 열독자--가끔 분열이 일어나곤 하지요^^--로서 보자면,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김영민은 강유원이 자기를 지목하기 전까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며 김영민의 스타일상 여전히 별 관심이 없을 것이며^^, 강유원에게 김영민은 철학이라는 두껍을 쓴 비교秘敎주의자로써 타기 내지는 비난과 비아냥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김영민은 별 신경쓰지도 않으니--많은 비판에 단 한번도 응답이 없음-- 강유원의 비판만 보자면, 그는 이전의 김영민 글 전반에 대한 비아냥에서 칼럼의 대상에 대한 것으로 타겟을 좁혀갔지만 여전히 김영민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칼럼의 존재 성격도 모르는 이가 쓴 칼럼' 정도로 요약될 위의 비판에서 그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김영민의 자기현학에 대한 지적정도입니다.

이들의 비판들에서 철학자 대 철학자의 대결같은 것은 앞으로도 생겨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글, 책 하나 제대로 읽어줄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서--그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볼지니!-- 무슨 학문적인 비판들이 오고 가겠습니까.
그저 이들이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주먹질이나 안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판이란 모름지기 상대의 텍스트에 대한 몰입이 선행해야 할 것이고, 엄밀한 독해에서 나오는 내파일 것인데, 위와 같은 강유원의 비판은 항상 외면적 인상 비판이나 구절 비판에 머물 뿐이지요.
단언컨데 앞으로의 강유원의 김영민 비판도 그 차원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강유원은 김영민의 책 한권 제대로 읽어본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caute 2007-07-19 20:4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로쟈님/오랜만에 들어와 쓸데없이 시끄럽게 군 거 죄송하고요.^^;; 저도 어떤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나와 달라도 근기를 가지고 줄기차게 자기 스타일의 공부길을 만드는, 그 일반화할 수 없는 진정성은 존중하고 싶습니다.
kritiker님/저역시 씁쓸한 맘으로 공감합니다. 남의 언어로 된 책은 못 쫓아가 전전긍긍이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물들지 않습니다. 아니, 행여 옷이라도 젖을까봐 빙빙 돌아 갑니다. 가면서 돌이나 던집니다.

눈팅 2007-07-19 21:58   좋아요 0 | URL
김영민 글의 특징: 명사구와 명사절이 많아 힘이 없습니다. 이는 스타일이 아니라 나쁜 글쓰기입니다.
예:1.과거,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었다.-->과거에 제자는 스승의 양식을 모방한 후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다.2.그러나 이소룡의 이미지가 재현하는 한편 우스꽝스러운 양식은 스타가 된 아웃사이더들의 세속적 운명이다.-->그러나 스타가 된 아웃사이더들은 이소룡의 이미지를 우스꽝스러운 양식으로 재현하였다.

참조:How to Write, Speak and Think More Effectively-Rudolf Flesch
김영민 선생은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kritiker 2007-07-19 22:5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우스운 것은 아직 학자라는 타이틀조차도 따지 못한 사람들이 항상 누군가를 가르칠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외면적으로 비교해 차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 대상의 논리를 따라가며 그 논의의 엇갈리는 부분을 내파하는 것입니다. 차이에 근거한 외면적 비판만큼 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길을 뚫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학문적인 성과이든 그것을 넘어선것이든 말입니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굴 손쉽게 가르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상의 존재가 우습게 보이더라도 학문적 구성을 하는 것은 상당한 고통을 요하는 것이요, 그런 일을 10년 이상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비웃음치고 지나칠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유원이든 김영민이든 그 사람에게 취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겸손하게 그사람에 즉卽해서 취하면 될일이지, 깜냥도 안되면서 누굴 가르치려는 것인지...참 안습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비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상대방에 대한 비판들에 일희일비 할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겨보며 그들의 한계를 짚어보는 것이 더 현명할 테지요.

김영민 비판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지젝식으로, 김영민의 단점 그리고 한계라는 것을 지적하고 고쳐버린다면, 그의 장점도 아울러 날라가 버리겠지요.
또 김영민은 effective한 글을 쓰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글은 그의 학위논문인 <현상학과 시간>(까치)에서 마감되었지요. 김영민의 effectivity 수준을 평하고 싶다면 그 책 한번 보고 평가하시지요.

로쟈 2007-07-19 23:13   좋아요 0 | URL
김영민 교수의 책은 <현상학과 시간>을 물론이고 <철학과 상상력>부터 시작해서 5-6권 정도 읽었지만(그의 강의를 들었던 한 동창의 권유로) 어느 시점부터 읽지 않게 되더군요. 최근에 연재물에서는 좀 달라진 듯도 한데, 참신한 문제제기를 그에 걸맞지 않는 고투의 문체가 다 침식해버린다는 게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지젝식으로'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식'을 말하기 위해서 '학자라는 타이틀'까지 필요한 것인지요?..

kritiker 2007-07-19 23: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김영민 글쓰기의 비극이지요^^ 학문적인 글쓰기가 아니래서 학자들 사이에서 백안시당하고, 대중들에게는 전달력이 떨어지는...

김영민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 그의 글을 전혀 읽지 않고 씌어진 것인데, 만약 그 비판을 듣고 그 단점이라는 것을 고친다면 김영민이 의도한 모든 것 역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단점이라는 것에 대한 외면적 차이 비판이 가지는 의미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을 참고했습죠^^)

김영민에 대한 위의 비판을 '상식'이라고 말하시는 것인가요?
누군가를 비판할 때 누구의 책을 읽어보세요라는 것을 비판이랍시고 즐겨 던지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는데,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 비판의 대상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욱 어려우며, 비판 대상의 논리에 즉해서 내파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며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손쉬운 인상비판이나 차이 비판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비판의 대상에게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비판의 대상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제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밟고 올라갈 과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요.
배우는 이들이라면 배움의 대상 앞에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생활양식으로서의 겸손함이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몰입, 즉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김영민의 위 텍스트에 의하면 '동화'의 행위이겠지요. '동화'이후에서야 비판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대하는 텍스트 하나하나를 공대하는 마음가짐 정도는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야 제대로 된 비판이 나올 것입니다.
'학자라는 타이틀'정도라도 가지고 있다면 위의 행위를 하지 않고 지 꼴리는대로 해도 별 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비판이라는 것을 하려면 제대로 읽어보고 하라고 하겠지요. '창조적 오독'이런 말로 자신의 지적 불성실함을 변명하지 말고 쏘아주면서 말입니다.

로쟈 2007-07-20 00:01   좋아요 0 | URL
레닌을 비판하기 위해선 먼저 레닌전집을 읽어야 한다거나 푸코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푸코 전집을 미리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이명박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시시콜콜히 탐문한 이후에 '비판 대상의 논리에 즉해서 내파'해야 하는 건가요?(이 경우 원초적인 한계는 '네가 그 시대를 살아봤어?'라는 반문에 놓이겠지요.) 그렇지 않은 비판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구요? 하신 말씀의 취지는 가늠할 수 있지만 하나마나한 얘기입니다. 작은 풀꽃 하나라도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란 질문과 똑같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따져묻고 이해할 수 있으며 비판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되는 말과 안되는 말을 가려볼 수 있으며 보다 나은 글이 어떤 것인가를 재고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제가 아는 메타-상식입니다...

눈팅 2007-07-20 01:02   좋아요 0 | URL
아마리우스에서 '신참'이 쓴 글 '책'을 찾아 'gg절절'이 쓴 덧글을 읽어보세요. 전형적인 김영민의 문체:"학문이란 우선 역사, 곧 삶의 흐름새라는 생각은 여전히 결연하고, 그 흐름새 속에 새로운 지경(地境)들이 가득 담겨져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다."
나쁜 문장을 비판하는 마음이 자연스럽다고 저는 믿습니다. 참고로 저는 김영민이 다루는 소재를 좋아하고 그의 책을 여러권 읽었습니다.강유원의 적절한 비판이 없었다면 신문독자에게 더 심한 비난을 샀을 겁니다. 사실 김영민의 에세이는 한겨레에서 편집만 잘 하면 읽을만 할 겁니다.

kritiker 2007-07-20 02: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로쟈님이 왜 흥분하시는지 알 수 는 없으나, '메타-상식'이라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뛰어넘는(무시하는)beyond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당연히, 레닌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닌전집을 읽어야 합니다!
로쟈님도 논문을 써보셔서 아시겠지만, 헤겔 전공했다하면 참고문헌에 헤겔 전집 쭉 써놓지 않나요? 다 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다 읽은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어떤 사상가를 전공하면서 사상가의 전후 사상에 대해 자기가 세운 가설이 모순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고로 강유원의 김영민 비판 중에 하나가, 탈식민성 비판하던 김영민이 지금 자기가 비판했던 외국학자들 글 잔뜩 인용하는 짓 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명박 이야긴 왜 써놓으셨는지?
하다 못해 이명박 검증한답시고 집안 식구들 계좌까지 '시시콜콜히 탐문'하고 있지 않나요? 지금 백분토론에서 한나라당 대선 주자 검증에 대해 나오는데, 박근혜처럼 DNA검사는 못하더라도, 차라리 이명박 검증하는 정도라도 해놓고 비판해야 학자로서 학문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로쟈님께서는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내재적 비판 아닌 인상 비판, 차이 비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라도 꼼꼼히 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이 '상식' 아닐까요?
'따져 묻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로쟈님은 눈앞의 텍스트 하나 꼼꼼히 읽는 것만으로도 '따져 묻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라고 하시고, 저는 제대로 된 비판--그게 철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의 비판이라면--을 하려면 문장의 지적 현학에 대한 지적, 문장의 비문 같은 거 뿐만 아니라 비판 대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저의 비판에 대해, 위의 로쟈님의 비판은 도저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로쟈 2007-07-20 09:25   좋아요 0 | URL
역시나 '자리'에 대해서 오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김영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는 게 아니며 그럴 의향도 없습니다(저에 대해 한마디 하기 위해 이 서재의 글을 다 읽으셨습니까?). 한 칼럼의 문장들이 난삽하다거나 소통불가능하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 일반 독자들이 그의 책들을 다 읽고 '내재적 비판'을 가해야 한다는 충고는 상식밖입니다. 이명박의 대운하론에 대해서 비판하기 위해 일반독자들이 토목공학과 대운하 경제학을 두루 마스터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것처럼. 저는 '메타-상식'이란 말을 '상식에 대한 상식'이란 뜻으로 썼습니다만, 이런 단순한 술어도 '합의(코드)'가 없다면 서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죠. 고고한 공부는 각자가 알아서 할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론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의 언어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눈팅 2007-07-28 21:23   좋아요 0 | URL
같은 성경이라도 스타일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입니다. 김영민은 원고를 킴제임스 버전으로 쓰는 셈입니다. 저는 예전에 킴 제임스, 투데이스 잉글리시, 컨템퍼러리 잉글리시 버전을 비교하며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다양한 층위의 표현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김영민 문체로 패러프레이즈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언문일치를 어기는 것은 확실히 시대착오적입니다. 김영민이 말하는 내용보다 말하는 방식을 문제화해야 합니다. http://www.biblegateway.com를 방문하여 각 버전의 성경을 비교해 보세요.


로쟈 2007-07-21 09:11   좋아요 0 | URL
30년 이상 써온 글쓰기이기에 이미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듭니다. 문체가 곧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kritiker 2007-07-20 13:2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레닌비판 비유부터 시작해 이명박 비유, 작은 풀꽃 비유까지 참 X친년 널뛰듯이 날라다니시는군요. 혹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이런 거 시험하고 계신가요^^?
소통의 의지가 없으신 로쟈님께 나름 성의를 가지고 글썼는데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같으면, 로쟈님과는 다르게 '로쟈님에게 한마디하기 위해' 이 싸이트를 다 보고 가겠습니다. 오랜 기간 다 보고 있기도 하구요^^


로쟈 2007-07-20 13:29   좋아요 0 | URL
김영민도 그렇지만 이기고 지는 데, 자기 실력 테스트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자존심이 있으시다면 이런 데서 시간낭비하지 마시고 고고한 자기단련에 더 정진하시길...

Joule 2007-07-21 02:44   좋아요 0 | URL
똑똑하고 영리한 댓글만 답해 주실 것 아니고, 저처럼 어리숙한 민심이 한 수 가르쳐 주십사고 고개 숙여 묻는 것에도 위와 같이 자상하게 한 마디만 덧붙여 주시면 김영민이나 강유원보다 더 감사해 하지 않겠습니까. 뭐 말 많으면 간첩이라는 옛말도 떠오르고 말이지요. 하핫.

로쟈 2007-07-21 08:50   좋아요 0 | URL
앗, 죄송.^^; 추천도서까지 생각해놓고 있다가 논전이 붙는 바람에... 지젝의 <라캉>을 읽으셨다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한번 더 '복습'해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의 승부는 피할 수 없는데, 비교적 잘된 번역서이지만 몇몇 오류들도 감안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후에 대중문화쪽으로 갈 수 있고, 이론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실 수도 있습니다...

joule 2007-07-21 12: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우는 소리 하길 잘했군요. 감사합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고 사이 E=mc2을 집어들긴 했지마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