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안토니오 가우디는 각인되는 이름이다. 가우디를 알지 못한 채 방문하기도 어렵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떠나기도 어렵다.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여전히 이 세계적인 건축가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으며, 140년 넘게 아직도 건축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도시의 랜드마크이기 때문이다(가우디의 사망 100주년인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어제의 여정은 바로 그 성가족(스페인어 사그라다 피밀리아‘의 뜻) 성당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완성된다면 세계 최대규모의 성당이 될 거리고 하는데(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출물로 에펠탑과 경합할 수도 있다고. 현재까지는 에펠탑이 넘사벽이라 한다). 여권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관람을 위해서는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는 것 같은 소지품검사를 거쳐서 입장해야 했다. 그리고 곧장 만나게 되는 특유의 거대한 외관. 전문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건물의 외양과 내부를 둘러보며 여행자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울 수 있었다(스폐인의 3대 관광명소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전,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한다. 코비드 직전에 정점을 찍은 방문자는 연간 450만명).
가우디에 관한 책은 두엇 구입했었는데 읽어보진 않았다(귀국하면 찾아봐야겠다). 가우디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성당의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정확한 추이는 모르겠지만 스페인에서도 종교인(스페인의 경우는 가톨릭신자)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을 듯싶은데 이 마지막 고딕성딩의 용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다. 이미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돌의 시대(돌로 된 책의 시대) 중세가 책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고 정확하게 진단했다. 그러고보면 건축물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뒷북성‘ 건축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에펠탑 사이에 끼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바르설로나 자체가 뒷북성 스페인의 근대화의 표본이 되는 도시다).
기공연도를 보더라도 1882년에 착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에펠탑을 앞선다. 18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에 맞춰 완공된 에펠탑은 1887년에 기공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축조되었는데(파리에서 열린 네번째 박람회였다), 바로 전해인 1888년 박람회 개최지가 바르셀로나였다(에두아르도 멘도사의. <경이로운 도시>에는 자칫 만국박람회 준비공사가 늦어져 파리와 경쟁하게 될까봐 우려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로 마드리드와 앙숙관계이지만 바르셀로나와 비교되는 도시는 파리이기도 하다. 내년가을 프랑스문학기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과 에펠탑을 방문하게 되면 이 문제도 더 생각해봐야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방문을 마친 뒤 우리가 항한 곳은 가우디의 설계로 유명한 구엘공원이었다.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의 의뢰로 가우디가 지었다고 하는데(공원조성과 함께 추진한 주택분양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역시나 가우디 건축의 독특한 발상과 섬세한 고려를 음미하게 해주는 여러 건축과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조성돼 있어서 바르셀로나 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도 일품.
크루즈선들이 정박해있는 바르셀로나항의 해물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파빌리온(1929년 박람회때의 독일전시관)을 찾았고, 이어서 고딕지구와 람블라스거리를 중심으로 워킹투어를 진행했다. 2000년대 스페인문학 최대 베스트셀러라는 <바람의 그림자>(2001)의 배경공간이다.
한편 고딕지구로 접어드는 골목입구의 한 건물을 지나치기 쉬운데 바로 세르반테스가 1610년경 살았다는 건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현판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 건물의 존재는 미리 알고온 것이 아니다. 어제아침에 ‘바르셀로나의 세르반테스‘에 대해 검색하다가 알게 되어 찾아간 것이었다(<돈키호테> 2부 결말에 가서 돈키호테는 바르셀로나에 입성하며 해변에서 하얀 달의 기사와 결투를 벌이다 패배하여 결국 카스티아 라만차의 집으로 귀가하게 된다). 미리 짠 일정과 무관하게 덤으로 뭔가를 발견하는 일도 문학기행의 숨은그림찾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