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메이커에서 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의 독서일기를 옮겨놓는다.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과 레비나스에 대해서는 작년에 나도 여러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가령 http://blog.aladin.co.kr/mramor/816934). 다음 학기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강의할 예정인데, 다시금 레비나스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생각도 해볼 겸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뉴스메이커 732호(07. 07. 10) [독서일기](20)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나는 곧 너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구? 어느 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읽다가 노트 한쪽 여백에 끄적인 글귀다. 나의 레비나스 이해는 강영안과 서동욱의 이해에서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을 통해 레비나스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론적 탐구를 평생 시의 주제로 삼았던 한용운도 “나는 곧 당신이어요”(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라고 썼다. 다른 맥락이지만 시인 랭보도 “나는 타자다”라고 쓴 바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며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을 나의 실체라고 이해했는데, 근대 독일의 관념철학은 이걸 주체로 바꾸었다. 나는 항상적으로 나 자신인 바, 신체를 가진 또 다른 존재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홀로 나일 수 없고, 타자와 맺는 관계의 맥락 속에서 나로 태어난다. 수없이 많은 너 속에서 발견되며, 거꾸로 말하자면 너는 타자의 자리에 놓인 나다. 그렇다고 나와 너는 존재의 위상학에서 동일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는 떨어져 있다. 나는 너의 부재 속에서 비로소 나다. 나는 너에게로 향함으로써 이타적 실존을 산다.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한용운, ‘사랑의 측량’)

사랑은 나의 자기됨과 내 존재의 확장을 포기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는 나를 너에게 줌으로써 살아지는 이타적 실존이다. 너와 사랑에 빠진 나는 자발적으로 너에게 갇힌 자요, 너의 볼모가 된 자다.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랑을 가능케 한 호르몬이 작동하는 동안이지만 너를 위해 산다. 이는 “존재 안에서는 결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음이지만 존재를 넘어서는 탁월이며 높음”이다. 나는 너를 환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너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레비나스는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레비나스의 중요 저작들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그의 철학은 대부분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할 게 틀림없다. 레비나스는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집안에서는 러시아 말을 사용하고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자라났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한 현상학자였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탈무드 선생이자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이고 프랑스 철학의 큰 흐름 속에서 사유한 철학자다. 레비나스는 반유대주의에서 비롯한 폭력과 인종주의가 널리 퍼진 서유럽에서 학대받는 유대인으로 산 경험과, 경험을 넘어서서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현상학의 맥락에서 자아와 타자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철학에 이어지는 주제다.

‘타인의 얼굴’은 레비나스의 나와 자기성, 타자와 고통을 통한 주체와 윤리학, 신과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나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와 같은 구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들 각자는 각 사람에 대해서 각 사람에 앞서 잘못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다”고 썼다. 주체성이란 타자와의 윤리적인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다. 레비나스는 도스트예프스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책임이 더 많다”. 레비나스가 주체의 철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운 타자의 윤리학은 나를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 즉 대속자 그리스도에까지 밀고 올라간다.

타자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나, 주체라고 부르는 이 존재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내가 생각하는 한, 그 생각함이 곧 나의 존재함의 증거다. 나는 사유하는 실체이고, 사유하는 실체를 대상화하며 자기 앞에 세우는 존재가 바로 나다. 내가 생각함을 생각하는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니체는 부정한다. 니체에 따르자면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들어져 첨가된 것, 그 뒤에 숨겨진 것”이며, 그 본질은 “허구”다. 니체는 “‘정신’도, 이성도, 사고도, 의식도, 영혼도, 의지도, 진리도 없다. 이들은 모두 쓸모없는 허구다”라고 말한다. 니체의 철학은 과격한 주체 부정의 철학이다.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자기됨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나타난다. 나의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행위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향유라고 한다. 향유는 나와 세계가 관계하는 방식, 신체를 매개로 한 생물적 교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마실 때, 물과 공기와 햇볕 등을 즐기고 있을 때 무리에서 저를 분리해서 오롯한 ‘자기’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향유는 개체에 작용하는 개별화의 원리다. 나는 향유를 통해서 자기로 거듭난다. 즉 “즐김과 누림”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레비나스는 잠, 불면, 음식, 노동, 거주, 타자, 여자, 아이와 같은 일상성과 밀접한 것들이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이라고 강조한 철학자다.

타자란 누구인가? 타자는 낯선 이다. 그 낯섦은 차라리 타자의 본질이다. 낯선 것은 끔찍하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했다. 타자는 언제나 내 앞에, 지금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 수 없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으로 서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을 가진 존재다. 타자는 내 앞에서 감추어진 그 무엇인데, 그것을 찾는 몸짓이 에로스다. 애무는 에로스의 현실태다. 애무는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을 만지는 행위다. 감추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출산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다. 아이의 출산으로 나는 비로소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 운동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타자란 모두 잠재적 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적대하고 죽이는 일을 정당화하고, 결국은 전쟁, 폭력, 인종청소와 같은 20세기의 비극은 나의 존재를 앞세우고 나의 존재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서 나온 것이다. 타자를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

서양철학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이라는 근본 악을 막지 못했다. 세 형제의 맏이인 레비나스는 두 동생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가 서양 철학을 비판하면서 타자에 대해 다르게 사유함을 하나의 철학 체계로 완성해낸 것은 이 근본 악을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선을 행함으로써만 이 근본 악을 넘어설 수 있다.(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

07. 07. 06.

P.S. 옮겨놓고 나서 읽어보니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리뷰이다. 게다가 '나는 곧 너다'? 이보다 反레비나스적인 구호도 없는데, 아무래도 필자가 자아도취적인 읽기/일기를 적은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비공개로 돌렸다가 들인 품이 아까워 열어놓는다. 겸사겸사 이남인 교수의 서평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서평은 전적으로 후설주의자의 입장에서 씌어졌다(아래 책에는 후설과 레비나스를 비교하는 논문도 포함돼 있다).  

교수신문(06. 01. 27)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제 해명…"무비판적 수용은 아쉽다"

이 책은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주체 개념이 “그의 초기 철학에서 중기 철학 그리고 후기 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 발전하는지를”(15쪽)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우선 1장은 레비나스의 삶과 철학을, 2장은 주체 문제가 서양근대철학에서 논의되어온 과정을 정리한다. 거기에 이어 3장은 『존재에서 존재자로』, 『시간과 타자』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익명적 존재사건에서 주체가 출현하는 과정, 주체의 출현에서 타자와의 만남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초기 철학을 다루고 있고, 4장은 『전체성과 무한』을 중심으로 향유, 거주, 노동, 타인의 얼굴 등의 문제를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중기 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5장은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토대로 대속적 책임의 문제 등을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6장은 고통 현상을 분석하면서 주체와 윤리 문제의 관계를 다시 검토하고 7장은 서양철학에서 레비나스가 이룩한 공헌을 정리한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현대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재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으며 국내 학계에서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그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으나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비나스의 철학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이 책의 출간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20여 년 동안의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된 연구를 토대로 출간된 이 책은 앞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연구를 위한 필독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여러 작품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 및 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주체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서 레비나스 철학을 해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분석되고 있는 레비나스의 작품들은 모두 아주 난해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저자는 이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철저히 분석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까지 해명하고 있다. 그를 통해 익명적 존재사건, 향유, 거주, 노동, 얼굴, 책임, 대속 등 레비나스 철학의 여러 가지 어려운 주제들이 해명되었고, 주체 개념과 관련해 레비나스 철학의 전체적인 모습도 밝혀졌다.

이 책은 앞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레비나스 철학 연구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 문헌” 등 두 개의 부록이 붙어 있는데, 이 부록은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시간, 역사, 신체, 언어, 여성성, 예술, 종교, 신 등 레비나스 철학의 여타의 중요한 주제들,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레비나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철학자와 레비나스의 관계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은데,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이처럼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름대로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지니고 있다. 첫째, 저자는 “나의 관점”, “나의 방식”(16쪽)에 따라 원전을 읽고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고 밝히고 있으나, 자신의 관점, 자신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나의 관점”, “나의 방식”을 밝히기 위해서는 다른 연구자들과의 비판적 대결이 필요한데, 다른 연구자들과의 비판적 대결이 이 책에 거의 나타나 있지 않은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둘째, 저자는 레비나스와 아무런 거리도 취하지 않은 채 레비나스가 표명하는 모든 견해를 옹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독자들이 레비나스 철학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레비나스 철학을 올바로 이해한다 함은 그것이 지닌 의의와 더불어 한계 및 문제점까지도 이해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뒤에서도 부분적으로 지적되겠지만 레비나스 철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 및 문제점은 그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많이 논의되어 왔는데, 저자는 그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록 자세히 논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때그때 간단히 짚고 넘어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셋째, 필자는 레비나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현상학자였다”(292)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기저기서 레비나스의 현상학적 분석을 소개한다. 평소 레비나스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해석해온 평자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있지 않으며 현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모호하다. 저자는 레비나스가 현상학자였다고 주장하면서도 레비나스를 따라 “얼굴은 현상이 아니다”(179)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현상”은 후설을 비롯한 레비나스 이전의 현상학자들의 “현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후설의 입장에서 볼 때 얼굴이 “현상”이 아니며 따라서 후설의 현상학은 얼굴을 다룰 수 없는 것일까? 후설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를 수 있는 것, 즉 넓은 의미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은 모두 “현상”이다. 레비나스도 얼굴에 대한 경험, “절대적 경험” 등을 말하고 있듯이 “얼굴”이 후설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현상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만일 얼굴이 “현상”이 아니라서 전혀 경험될 수 없다면 레비나스는 “얼굴”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얼굴의 현상학”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레비나스가 후설, 하이데거 등 이전의 현상학자들에 대해 가하는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초개인성이나 익명성”(78)을 지향하는 “탈인격적” 사유로 규정하는데, 현존재의 “개별화”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탈인격적 사유”로 규정함은 무리일 것이다. 또 저자는 후설의 현상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240)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관념론”(117)이며 후설의 “초월론적 주체”는 “주체의 절대화”(46)의 산물이라든가, 또는 후설의 초월론적 주체가 “역사성과 상황성”(257)과는 무관한 주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는, 필자가 『현상학과 해석학』(서울대출판부, 2004)에서 밝혔듯이,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넷째, 책의 구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6장은 “고통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미 3~5장의 논의를 통해 발전사적 분석이 이미 끝난 상태에서 6장에서 고통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6장은 발전사적 논의와 무관하며 고통의 문제는 초기 철학을 다루는 3장에서도 논의되었다. 또 결론으로 제시된 7장은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된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비록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전사적 연구의 결론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책 전체의 구성을 고려하면 6장과 7장은 사족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두 장을 빼든지 부록으로 처리하고 3장, 4장, 5장의 논의를 확장시키면서 그를 토대로 어떤 결론을 도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이남인/ 서울대 철학과)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nathema 2007-07-07 00:21   좋아요 0 | URL
장석주는 그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똑똑한 전문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07-07 11:22   좋아요 0 | URL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죠. 다만 철학에 대해선 좋아하는 만큼의 식견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눈팅 2007-07-07 18:11   좋아요 0 | URL
주체와 대상에서 타자와 주체로 말을 바꿔봐야 뭐 새로운 사상이 나올까요. 사르트르의 '타자는 지옥'이란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지금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을 사기쳐 먹으려는 범죄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에게 타자는 법이자 밥이고 명령이자 망령입니다. 악마적인 타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해도 천개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를 읽어보려 시도는 해봤는데 아무래도 저와는 맞지 않더군요.쓸데없이 모호한 관념론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쟈 2007-07-07 22:43   좋아요 0 | URL
"주체와 대상에서 타자와 주체로 말을 바"꾸는 것은 레비나스와 무관합니다. "쓸데없이 모호한 관념론자"도 레비나스에겐 다소 억울한 레테르 같습니다. 그의 철학(윤리학)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이라...

schizolyric 2007-07-09 12: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강영안 선생님과 이남인 선생님의 강의를 둘 다 들을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인데요... 이 선생님이 후설주의자이듯이 강 선생님은 (칸트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주의자이신 듯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이 잘 드러나지 않고 레비나스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분위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듯... ^^;;

로쟈 2007-07-09 19:20   좋아요 0 | URL
이남인 교수도 후설에 대해서는 '예리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제가 읽은 몇몇 논문의 요지는 '후설 안에 다 있다'여서요...

mravinsky 2007-07-09 20: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후썰 안에 다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이라면
철학은 플라톤 안에 다 있다.
이것도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