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신문을 미리 훑어보다가 7월 2일이 이탈리아계 미국 소설가 마리오 푸조의 기일이란 걸 알게 됐다. 그걸 빌미로 씌어진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 소설가 마리오 푸조가 1999년 7월 2일 79세로 사망했다. 푸조는 <대부>의 작가다. 그는 <대부>의 제사(題詞)로 발자크를 인용하고 있다. “커다란 부의 이면에는 반드시 커다란 범죄가 존재한다.” 발자크의 말은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한 수상한 기원을 지적한 것이었다. 푸조는 이를 <대부>에서 마피아 대부인 비토 코를레오네의 말로 변주한다. “누가 그들의 이해관계에는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는 손해가 되는 그런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코폴라가 만든 <대부> 3부작을 나도 영화로는 보았지만 푸조의 원작소설 <대부>는 읽어보지 못했다. 제대로 된 국역본이 나왔었나, 미심쩍어하며 찾아보니 웬걸 주요 작품이 <마지막 대부>(늘봄)까지 출간돼 있었다(나는 보급판 두 권을 장바구니에 옮겨놓았다). 출간 소식을 접했을 법도 하지만 주의하지 않고 지나쳤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래서 우리도 '마리오 푸조'를 갖게 된 것.
하지만 우리의 마리오 푸조, 우리의 <대부>는? 거기에 걸려 있는 건 “커다란 부의 이면에는 반드시 커다란 범죄가 존재한다.”는 발자크의 명제를 입증해보이고 있는 한국소설이 우리 주변에 있는가, 이다. 한국사회의 '주류'와 그 '악(커다란 범죄)'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 있던가? 과문하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푸조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이탈리아계 이민 2세로 뉴욕에서 태어난 푸조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탈리아계 미국 마피아 코를레오네 집안의 이야기로 20세기 미국사회의 폭력과 권력의 역사를 다룬 <대부>는 그가 46세 때 생활비로 출판업자한테서 5,000달러를 선불로 받고 쓴 소설이라 한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2,00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1972년 불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말론 브랜도, 알 파치노 등의 놀라운 연기(얼마 전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을 보고 그 눈부신 여주인공 다이안 키튼이 벌써 61세가 됐으며, 그가 35년 전 ‘대부’에 26세의 나이로 출연했던 걸 생각하고는 새삼 세월을 실감하기도 했다)에 니노 로타의 아름다운 주제곡이 어울린 영화 ‘대부’는 몇번을 다시 봐도 멋진 작품이다(http://www.youtube.com/watch?v=4Y4i7gmP6ac).
푸조의 원작소설은 영상이 결코 다 표현하지 못하는, 비토 코를레오네의 저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거절할 수 없는” 문자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화려한 영화의 그늘에서 흔히 원작의 존재가 가려져 버리는 것을 보지만, 진실로 빼어난 원작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하종오 기자)
1947년 돈 꼴레오네의 호화 저택에서는 막내딸 코니와 카를로와의 초호화판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다. 시실리아에서의 이민과 모진 고생 끝에 미국 암흑가의 보스로 군림하는 마피아의 두목 돈 꼴레오네는 재력과 조직력을 동원, 갖가지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해결해 사람들은 그를 '대부(代夫)'라 부른다.
돈 꼴레오네는 9세때 그의 고향인 시실리아에서 가족 모두가 살해당하는 불행을 겪으며 미국으로 도피하여 밑바닥 범죄 세계를 경험하면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부모의 복수를 위해 시실리로 돌아온 그는 조직적 범죄를 통해 비약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돈 꼴레오네의 라이벌인 탓타리아 페밀리의 마약 밀매인 소롯소가 돈 꼴레오네를 죽이면 천하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다고 생각해 그를 저격, 중상을 입힌다.
돈 꼴레오네의 막내 아들 마이클은 대학 출신의 인테리어다. 아버지의 저격 사건을 계기로 조직에 개입하여 레스토랑에서 소롯소를 사살하고 시실리로 피신한다. 시실리아에서 시골 아가씨와 결혼하지만 집요한 추적으로 아내를 잃는다.
장남 소니는 자신의 여동생 코니를 학대하던 카를로를 혼내주나 이에 앙심을 품은 카를로는 자신의 패밀리와 소니를 배반하게 되고 이로 인해 소니가 처참하게 암살당한다. 돈 꼴레오네의 일가는 붕괴직전에 직면한다. 돈 꼴레오네 일가를 위해 귀국한 마이클은 대학시절 애인인 케이와 재혼한다. 얼마 후 손자와 뜰에서 놀던 돈 꼴레오네가 심장발작으로 급사, 마이클이 자리를 이어받아 이 집안의 양자로 오른팔 역활을 하는 변호사 톰을 참모로 조직을 단결시켜 적의 격퇴를 해 나간다.(씨네21)
그 원작은 러시아의 경우에 고전(클래식)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러시아어로는 '마리오 퓨조'이다). 그에 비하면 이 '대중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한 우리의 평가엔 좀 인색한 구석이 있다. 정작 우리시대의 발자크, 우리시대의 마리오 푸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걸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주변의 소설 주인공들은 대개 '커다란 부'와 무관한 도바리들이거나 백수들이었다. 자본가가 아닌 노농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적'들에 대한 비난과 야유는 심심찮게 들어봤지만 정작 그 '적'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엿볼 수 없었다(한국문학은 대저 '피해자들'의 하소연으로 충만하다).
몇년 전 문학교수들과 평론가들의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힌 황석영. 하지만 나는 그의 <오래된 정원>을 얼마전 읽으면서 싱겁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80년 광주 이후 무려 18년만에 씌어진 이 장편소설이 시대의 벽화를 그려내기보다는 고작 서정적 소묘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 도바리의 감옥생활과 그를 뒷바라지한 한 여인의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감동적이지만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1인칭 소설의 한계이겠지만 그들이 왜 그런 삶을 살았는가가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역시 피해자들의 얘기만 늘어놓는 소설의 한계 아닐까(<오래된 정원>은 작가의 고백대로 '손풀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정공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데, 이 작품의 영화화를 앞두고 황석영은 임상수 감독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래된 정원>은 내게 '서사를 잃어버린 소설'로 읽혔다).
황석영 | 그래,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이 잃어버린 서사를 회복하고 담지하자는 선언이라도 하자. 사실 나 같으면 <바람난 가족> 그렇게 안 만들어. <대부>처럼 누아르로 만들지. 그게 천민자본주의 형성사 아냐.
임상수 | 선생님과 같이 하고 싶은 게 강남 형성사입니다. 변방이 어떻게 중심으로 바뀌는가. 천민자본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사실, 선생님이 영화감독을 하셔야 되는데.
황석영 | 에이, 무슨. 내가 지금 태어나면 나도 영화감독 하지, 뭐 하러 읽지도 않는 소설 써. 그래 나도 하고 싶다. 내가 구술로 다 불러줄게. 내가 시놉시스도 다 써오고. 삼부작으로 만들자.
마리오 푸조-코폴라의 <대부>란 무엇인가? 미국식 '천민자본주의 형성사' 아닌가? 작가 황석영이 언제라도 소설로 쓰거나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그것이 '강남 형성사'래도 무관하다. 3부작이어도 좋고, 4부작이어도 좋다(구술로 다 불러준다잖은가?). 한데, 황석영은 에둘러 간다. 심청과 바리데기 이야기로.
곧 출간된다는 신간 <바리데기>는 "중국대륙과 대양을 건너 런던에 정착한 탈북소녀 '바리'의 여정을 통해, 한반도와 전 세계에 닥쳐 있는 절망과 폭력, 전쟁과 테러의 모습을 담아냈다. '바리데기' 신화를 차용,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21세기 현실의 삶을 박진감있게 그려낸 소설."이라는데 시놉시스만으로도 또한번 간난의 삶을 산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충분히 제값은 하겠지만 대중성도 감안해서 쓴다는 '최고의 작가'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소설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눈길을 주게 되는 작가가 김훈이다.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일방적인 힘에 의해 바뀌지는 않을 거다.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들이 선이고 부자가 악인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고. 노동이 선이고 자본이 악인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고. 자본이 무너지면 노동이 무너진다. 그건 우리가 IMF시절에 직접 본 것이다. 회사가 무너지면 노동자가 잘사나? 천만에, 먼저 죽어 버린다. 결국 같은 거다.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생과 사는 서로 같은 거다."
최근 중도를 제창한 과거 '진보적' 작가와 달리 '보수적' 작가 김훈에겐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보수적이다.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자존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는 건 무지몽매한 일이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일단의 구체성만이 중요한 것이다. 나의 보수주의는 구체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먹고 살고 차가 막히는 걸 해결하고 계층의 문제를 해결하고 쓰레기가 떨어졌으면 주워서 버리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따지는 것은 헛된 일이다."
내가 경탄해마지 않는, <남한산성>에서의 젊은 칸의 문장들은 바로 그러한 세계관에서 배태되었을 터이다.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25쪽)
'너에게 속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아웅다웅 시비하고 평가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긴 하나 헛된 일이다. 그걸 마피아 대부 돈 꼴레오네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들의 이해관계에는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는 손해가 되는 그런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일방적인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엥겔스가 말하는 부르주아지도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는 그에 걸맞은 정치적 진보가 수반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영주들의 지배 아래에서는 피억압자 신분이었고, 꼬뮌에서는 무장한 자치 연합체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군주국의 납세의무를 지닌 제3신분이었으며, 그 다음에 매뉴팩처 시기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평형추였으며, 대군주국 일반의 주요한 토대였다가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이 갖추어진 이래로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였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다."(<공산당 선언>)
내가 읽고 싶은 건 그러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커다란 범죄' 이야기이다(심청과 바리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신경림, '농무')거나 "못난 사람들이라고 그리움과 기다림을 모르겠는가"(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의 세계는 서정시로도 차고 넘친다(젊은 작가들의 소설들에서도 궁상맞고 되바라진 똘마니들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소설은 뭔가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 황석영과 김훈은 그런 걸, 뭔가 어른스러운 걸 보여줄 수 있는 작가이다. 차이라면 황석영은 아직 안 쓰고(못 쓰는 게 아니라) 김훈은 아직 못 쓰고 있다는 것(안 쓰는 게 아니라).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난 소설가가 됐는데 아직도 당대 사회에 대한 글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앞으로 쓰려고 한다. 우리 시대의 사회에 대해서. 달라졌다면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정도. 성취와 좌절에 대해 쓰려 하는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못 쓰면 뭐 할 수 없는 거다. 억지로 할 생각은 없다."
해서 나는 두 사람이 현재로선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열심히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열심히 연필을 깎고 있다. 누가 먼저 '당대 사회'에 대한 기대치의 소설을 써줄지, 우리의 '돈 꼴레오네'가 돼 줄지 더 기다려봐야겠다...
07. 07.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