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서 이청준 문학의 '보편성'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다. 실상 이창동의 <밀양>을 아직 보지 못한 분풀이이다(7월초에도 상영하는지?). 주변에서 볼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본 다음임에도 시간을 못 내는 처지라니! 예전에 읽은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는 얼마전에 단행본으로 나왔고 한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았다(칸느 영화제 수상직후 이 책의 표지는 곧장 <밀양>으로 바뀌었다). 영화를 보게 되면 다시 읽어볼까 한다. 아래 기사는 문학평론가 방민호 교수의 이청준 문학에 대한 예찬으로 읽힌다... 

한겨레21(07. 06. 21) 이청준, ‘한국적’으론 감당할 수 없어라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통해서다. 유럽 영화제에서 한국의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 것은 강수연씨 이래 20년 만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전도연씨와 <밀양>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에 따라다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밀양>의 원작이 이청준씨의 중편소설 <벌레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벌레 이야기>에 없는 이야기들이 첨가되고, 있던 이야기들이 삭제되는 커다란 변용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밀양>은 <벌레 이야기>를 모태로 삼은 작품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원작은 원작일 뿐이다. 영화는 원작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여기에 영화가 필요로 하는 숱한 예술적, 기술적 독창성을 발휘해야 하는 고난도 장르다. 그러니 영화의 시대일수록 그 텍스트를 이루는 문학이 중요하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 게 좋다. 똑같은 주장을 오스카 와일드는 비평가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서 펼쳤었다. 소설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한다고 해서 비평이 소설에 비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2년 전에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가서 느낀 것은 한국 문학이 아직 고립된 예술의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황지우씨가 던진 말이 있다. 그곳 유럽에서는 고은도 황석영도 아직 신인이나 다름없는 무명작가일 뿐이라던. 이 두 문학인은 유럽에서 그래도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이다.

번역될 수 없는 까다로운 미학
물론 몇 년 사이에 문학도 ‘한국’ 문학이라는 고유명사 표지로 만족하는 단계는 확실히 뛰어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인지도나 인식 수준은 미약한 편이다. 아마 이청준이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말보다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밀양>의 원작자라고 소개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당연히 언어 때문이다. 문학에서 언어 문제는 근본적이다. 한국어라는 말, 한글이라는 문자의 고립성이 한국 문학을 왜소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다. 세계인들은 한국어로 된 소설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다 그것이 원작이 되어 영화라는 도상적 기호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제시되어 ‘보편화되면’ 그때서야 기립박수를 치게 된다.

이청준 문학만큼 이러한 아이러니를 크게 보여주는 작가도 드물다. 최근에 들어와선 문체가 이완된 감도 없지 않지만 이청준씨는 한국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고양시켜 보여준 작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로 옮겨진 그의 연작들,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등은 한국어 문장의 운율미, 리듬감을 충만하게 실현한 것들이다. 이 언어적 요소는 마치 시가 완전하게 번역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로도, 외국어로도 번역되기 어렵다. 여기에 흔히 한(恨)으로 표상되는 한국적인 정서들이나 문화적 전통들, 고전적 예술과 민속의 세계 같은 것들도 외국인들이 이해한다고 해야 오리엔탈리즘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이청준 문학은 번역될 수 없는 미학적 특질들을 함축하고 있는 까다로운 문학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원래 영화 <서편제>의 원작은 소설 <서편제> 한 편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세 개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각기 따로 떨어진 작품들이 아니라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이라는 제목의 작품들까지 합해서 모두 다섯 편의 연작으로 꾸며진 연작소설집 <남도사람>(1988)의 일부를 이룬 것들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이 가운데 영화로 ‘번역’하기 쉬운, 다시 말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가감하기 쉬운 세 편만을 ‘적발’해서 <서편제>라는 화제작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면 이 <남도사람>은 이청준 문학 쪽에서 보면 <언어 사회학 서설>(1977)이라는 또 다른 연작창작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도 영화가 된 쪽은 <남도사람> 쪽이지 <언어사회학 서설> 쪽이 아니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남도사람>이 드라마타이즈(dramatize)하기 쉬운 요소들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데 있다.



인간의 노래이자 생활의 노래
이런 사정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 역시 <벌레 이야기>에 상당한 ‘작가적’ 삭감과 첨가를 가했는데 이것은 물론 영화감독의 창조적 권한 사항이다. 아무튼 <벌레 이야기>는 어떤 ‘희생’을 거쳐 영화라는 새로운 창조의 영역에 수용된 것이다.

여기서 한번 제기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청준씨의 소설들만이 이토록 빈번하게 영화화되는 것일까?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축제> <천년학>, 그리고 이창동의 <밀양>까지. 우리는 작가 이청준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상당히 긴 목록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청준 문학이 가진 보편적, 공통적 사상과 감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옛 작가 이효석은 <화분>(1939)이라는 장편소설에서 하얼빈으로 떠나는 피아니스트 영훈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두 개의 웅대한 곡을 작곡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탄생, 싸움, 운명, 죽음”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노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것, 사랑, 행복, 잔치, 고독, 슬픔, 사상” 등으로 이루어진 ‘생활의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을 “전 인류의 것” “동양의 것이며 동시에 구라파의 것이요, 구라파의 것이며 동시에 동양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류의 감정”에 호소하려고 한다.

이청준 문학이 바로 그렇다. 그의 문학에는 한국적인 표지를 붙여 만족할 수 없고 충당할 수 없는 인류 보편적 가치로 통하는 사상과 감정이 숨쉬고 있음이 인정된다. 우리는 이미 <서편제>나 <축제> 같은 작품에서 이것을 확인한 셈 아니던가?

<밀양>의 원작이 된 <벌레 이야기>는 분량으로 보면 크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과 죽음, 용서나 종교의 의미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깊은 작가적 역량이 투여되어 있다.

과연 종교적 믿음이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고통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기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단박에는 아닐지라도 이것을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종교라는 것이 과연 삶의 일회적(一回的) ‘본질’에서 오는 인간의 비애를 가라앉혀줄 수 있는가? 또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이 가져다주는 재생의 힘이 될 수 있는가?

기독교적 일원론의 견지에서 보면 삶은 신에게 귀의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의 의지를 따라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노예처럼 자비를 갈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된 종교적 세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죽음을 당한 아이의 엄마를 향해 신의 은총을 빌면서 사형을 받아들인 유괴범과 고통 속에서 신을 잃어버린 아이 엄마의 비극적인 ‘대결’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보편과 공통을 향해 비약하다
실로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여 사랑하고 죽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청준 문학은 이 근본적인 주제를 인간사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영화감독들은 비상한 사람들답게 이렇게 보편과 영원으로 통하는 이청준 문학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리라.

이청준 문학은 드라마타이즈됨으로써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체계의 고립적 한계에서 벗어나 영어로 번역되지 않고도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는 ‘문학’이 된다. 동시에 언어적 숨결의 독특한 가치는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을 아쉬워만 하지는 않기로 한다. 한국 문학에서도 영화처럼 보편과 공통을 향한 비약이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진전되고 있기 때문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07. 06. 2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6-2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은데로 임하소서 한권밖에 안 읽었지만...
인상깊었습니다. 요즘 소설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어요.

로쟈 2007-06-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배로는 아마 60년대 작가군에 들어가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