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좀 지나간 일이 돼 버렸지만 서재 방문자수가 지난달말인가 20만명을 넘어섰다(그 사이에 7천명 넘게 방문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서재의 문을 일시적으로 닫고 '휴가'에 들어갔던 때인지라 따로 챙기질 못했다. 다행인지 우연인지 20만을 캡쳐해두긴 했는데, 날짜를 다시 확인해보니 6월 1일이다. 아래가 남은 기록이다(today는 왜 다운된 건지 모르겠다). 

183200000 

그 사이에 또 조촐하게 기념하려고 했던 즐찾 1111명도 훌쩍 지나쳐버렸다(지금은 1147명이다). 요즘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퍼오는 글이 많고 아주 '대중적인' 글들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방문객이 이처럼 많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기 이전에 다소 의아한 일이다(당신은 무슨 기대로 '로쟈의 서재' 아니 '로쟈의 저공비행'을 찾는가?). 하긴 대다수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나는 동료 알라디너보다는 외계의 염탐꾼들이 더 많이 다녀가는 것으로 짐작하고는 있다. 여하튼 그런 숫자에 현혹되어 매일같이 서재에 물붓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종의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처럼 책임감이 좀 부족한 경우에도(나는 줄줄이 '가'를 받은 초등학교 성적표에서 책임감이 '나'였다). 

그래서 기획하게 된 것이 '로쟈의 한줄'이다(벌써 몇 차례 아이템은 잡아놓았는데, 한줄 정도야 수시로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이어서 작업량이 꽤나 늘어날까 미리부터 걱정되긴 한다). 취지는 그냥 카테고리가 말해주는 대로이다. 눈에 띄는 한줄에 대해서 자세하게 뜯어보거나 뒷조사를 해본다는 것. 가령 며칠 전에 옮겨놓은 인터뷰(http://blog.aladin.co.kr/mramor/1322403)에서 작가 황석영의 말.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워털루>(1970)를 보라고. 그 사람이 워털루 싸움의 앞뒤 사흘로 나폴레옹의 정점과 몰락을 카메라로 어떻게 담아내나 보라고. 윌리엄 프레이커 감독의 <몬티 월쉬>(1970)를 또 봐. 그렇게 촬영감독이 중요한 거야.

 

 

 

  

 

여기서 오늘의 한줄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워털루>(1970)를 보라고."이다. 본다르추크는 <전쟁과 평화>(1968)로 잘 알려진 러시아감독이다. 그리고 워털루는 러시아 진격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절치부심 끝에 치른 마지막 전쟁이다(알다시피 그는 여기서도 패장이 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주도한 프랑스군과 웰링턴이 주도한 영국군, 프로이센 등을 포함한 연합군이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대전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패배하고,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위키백과)

이탈리아와 러시아 합작으로 찍은 이 영화는 아마도 전작인 <전쟁과 평화>에 고무되어 제작된 게 아닌가 싶다(http://www.youtube.com/watch?v=IEYvfy8zKzk). <워털루>를 본 기억은 없지만 전투장면의 스틸사진상으로는 <전쟁과 평화>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장쾌한 스펙터클을 뽐내지 않았을까 싶지만(가장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의 하나로도 꼽힌다) 동시대 러시아 감독인 타르코프스키의 평은 아주 신랄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1997)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본다르츄크'란 표기는 '본다르추크'로 고쳤다).

"오늘 본다르추크의 <워털루>를 보았다. 불쌍한 작가다. 수치스런 작품이다. 본다르추크에게 작품 <워털루>를 위임했던, 이탈리아의 디노 라우렌티스 제작팀에서 온 로베르토 쿠오마라는 이탈리아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영화감독으로 이탈리아에 초대하고 싶은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란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일이 잘만 된다면 카뮈의 <페스트>를 영화화하고 싶다."(49쪽)


 

 

   

 

1970,년 9월 18일자 일기의 한 대목인데, 국역본에서 9월 14일자 일기로 처리돼 있다. 영역본을 옮기면 "Today I saw Bondarchuk's Warterloo. Poor old Seryozha! It's embarrassing."(21쪽). '세료자(Seryozha)'는 '세르게이'의 애칭이다. 속되게 말하면 '맛이 갔군, 세료자!' 정도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본다르추크와는 달리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는 것. 결과적으론 <요셉과 그의 형제들>도 <페스트>도 그의 필모그라피로 남지 않았다. 두번째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로 상당기간 마찰을 겪은 후에 그가 찍게 된 세번째 영화는 <솔라리스>였다.  

해서, "<워털루>를 보라고."란 황석영의 말은 "<워털루>를 보았다."란 타르코프스키의 말에 의해 반향되고 굴절된다. 그것은 이중적이다. 워털루 자체가 나폴레옹 자신의 영광과 굴욕을 상징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 서재의 운명 또한 그러할 것이다...

07.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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