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어제 도서관 강의에서도 다룬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의의에 대해서, <톰 소여의 모험>과 비교해서 적었다...
한겨레(20. 09. 11) 지옥으로 가는 윤리적 모험
“미국의 모든 현대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책 한 권에서 비롯하였다.” 널리 알려진 헤밍웨이의 말이다. 통상 아동문학으로 분류돼 읽힌 <허클베리 핀의 모험>만 떠올리는 독자라면 선뜻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편 <톰 소여의 모험>과의 관계를 떠올려봐도 그렇다. 마크 트웨인의 “책 두 권”이 아니라 어째서 “한 권”인가? 자연스레 ‘두 모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묻게 된다. 더불어 대중성에 있어서 각자 당대를 대표했던 두 작가, 트웨인과 헤밍웨이 문학은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물을 수 있겠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완역판으로 읽을 때 던져볼 만한 물음들이다.
<톰 소여의 모험>(1876·이하 ‘톰 소여’)과 그 속편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이하 ‘허클베리 핀’)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지적할 수 있다. 1840년대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피터스버그(가상의 마을이다)라는 시공간 배경이 동일하고 개구쟁이 소년 톰과 그의 친구 헉이 등장한다는 점도 같다. 제목 그대로 그들의 모험담을 담고 있다는 점도. <톰 소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트웨인이 바로 속편 집필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특이한 것은 그 완성에 무려 8년이나 소요됐다는 점이다. 집필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외형만 보자면 그러한 지체는 이해하기 어렵다. 주인공이 톰에서 헉으로 바뀌지만 이야기 자체는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트웨인이 8년의 시간을 쏟아붓지만 작품 속에서 톰과 헉의 나이는 12∼14살 정도다. 작품 속 시간과 집필시간 사이의 이러한 간극은 무엇 때문에 빚어진 것일까.
뭔가 어림하게 해주는 대목은 <허클베리 핀>의 하이라이트로 지목되는 장이다. 주정뱅이 아버지에 의해 오두막에 갇혀 있다가 탈출한 헉은 왓슨 아줌마댁에서 도망친 흑인 노예 짐과 우연히 마주친다. 둘은 한동안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가며 뗏목 생활을 함께한다. 그리고 나이와 인종을 넘어선 우정을 자연스레 나눈다. 그리던 차에 헉은 짐에게 이백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기에 헉이 알고 있는 도덕에 따르면 마땅히 짐의 소재를 왓슨 아줌마에게 알려야 했다. 도망 노예와 같이 지낸 헉의 행동은 불쌍한 노파에게서 검둥이를 훔쳐낸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지옥의 유황불 속으로 떨어질 일이었다. 고민에 빠진 헉은 결국 짐의 소재를 알리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옥에 떨어지는 일을 면했다고 안도하는 헉에게 짐과 같이했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짐이 친절하게 대해준 일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고 불러준 일을 떠올렸다. 그런 짐을 배신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햄릿의 고뇌를 연상하게 하는 고심 끝에 헉은 편지를 찢어버리며 중얼거린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헉의 인생의 대사이면서 ‘미국의 셰익스피어' 트웨인의 유명한 명구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 장면에서 시사받을 수 있지만 <허클베리 핀>의 두 주인공은 톰과 헉이 아니라 헉과 짐이라고 해야 한다. 비록 <허클베리 핀>에서도 톰은 여전히 등장하고 짓궂은 장난을 꾸미지만, 그리고 톰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헉은 다시금 그의 조역으로 떨어지지만, 톰의 모험과 헉의 모험은 분명 성격을 달리한다. 톰의 모험이 악동적 상상력에 빚지고 있는 반면에 짐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지옥을 선택하는 헉의 모험은 윤리적 모험에 값한다. 공동체적 도덕을 넘어 보편적 윤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 바로 그러한 모험을 현대 미국 문학은 <허클베리 핀>에서 배울 수 있고 배웠어야 했다.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은 헤밍웨이 문학에서 헉과 짐이라는 짝을 떠올리기 어려워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산티아고 노인과 청새치를 사례로 들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