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에서 인터뷰한 건 아니고 독일신문 '디 차이트'(독일의 '더 타임스'쯤 되나?)와의 인터뷰 기사를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다. 주제는 이민 문제이다. 최근에 나온 하종오 시인의 시집 두 권도 우리 주변의 이민 노동자들 문제를 다룬 것이어서 리뷰 기사를 같이 옮겨놓았다. 유럽에서만큼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다민족, 다국적 사회로 진입해가고 있는 상황이므로 참고할 만하겠다(최근 '국경'이란 주제가 한국문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 챙겨둘 만하고).   

프레시안(07. 05. 23) "왜 사람은 자본처럼 '超國'하면 안 되는가?"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점점 더 세계를 불평등하게 구획한다. 못 사는 나라의 국민들은 생존을 향하여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꿈꾸며 위험을 감내하고 국경을 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복잡하고 비싼 비자 발급의 절차를 완수하지 못하고 국경을 넘는 순간 그들은 곧장 범죄자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누군가 범죄자라는 것은 시민사회로부터 합법적인 격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법의 이름으로 기본권의 상당 부분을 제약당한다.


  
다시 한 번 끔찍한 여수의 출입국 관리소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자. 한번쯤 왜 그들이 한반도 남단의 어느 항구 도시에 범죄자로 낙인 찍혀 상당한 날들 동안 감금되어 지내야 했는지, 과연 그것이 정당한 조치였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그들은 정말로 화재 경보 시설도, 화재 진화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어느 인권 후진국의 감옥에 갇혀 원인 모를 화마를 당해 자신의 생을 마감해도 마땅할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이었던가?


  
한참 전부터 이민으로 들끓고 있는 유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내놓고 있는가? 이미 1980년대에 현대 사회학의 명저로 손꼽히는 <위험사회>를 저술해 우리의 지성계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도 탐독했다는 <적이 없는 민주주의>의 저자인 세계적인 석학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학 교수(사회학) 역시 자신의 지역이 앓고 있는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진지한 처방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벡 교수는 독일의 <디 차이트(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이 신문 5월 12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민은 범죄가 아니며 인권이다"라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그는 "이민문제는 이민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며 우리 스스로 구축한 경계체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이민에게 씌워진 범죄라는 굴레를 벗기기 위해 그것을 합법화하되 '이민세'의 도입과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적인 관리체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유럽과 우리의 맥락은 다소 상이하지만, 이주 노동자의 사회통합 과제의 심각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 분명 그의 주장에는 진지하게 경청할 부분이 있다. 이에 <프레시안> 독자에게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는 벡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필자가 전문 번역한 것이다(☞원문 보기)(박명준/기획위원ㆍ전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연구원)

- 당신은 국경을 열자는 말을 하려는가?
  
"우선 이민 문제의 상당부분이 이민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협소하게 구축한 '경계체제(Grenzregime)'를 통해 이민문제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이민 문제라는 게 오랜 역사를 지니는 것인데….
  
"그렇다. 이민문제는 오랜 국민국가체제에 뿌리 박고 있다. 국민국가라고 하는 틀 안에 있으면서 우리는 사람을 움직이도록 만들려 한다. 오늘날 유연성과 이동성–스스로를 변화시킬 태세를 갖추는 것–은 높게 평가된다. 그렇지만 누군가 보다 잘 지낼 수 있고, 보다 좋은 삶의 기회를 예상할 수 있는 그 어디로 이동해 가려는 태세를 지니는 것은 그가 국경을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에 이르러 우리에 의해 범죄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이동성(Mobilität)이 아니라 이민(Migration)이라고 명명되며, 이는 우리가 구축해 놓은 '경계체제'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국경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말인가?
  
"문제의 핵심을 짚자면, 이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이민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민은 인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계 안에 갇혀 국민국가적인 컨테이너 안에서 하는 영토적인 사고가 만들어 내는 범죄와 같은 것으로 취급될 행동이 결코 아니다. 우리(독일)의 교회는 정당이나 노조에 비해 이러한 관점에서 이민을 보다 잘 정의내리고 있다. 이민자들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아니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준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 이민을 인권으로 간주하는 것은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데….
  
"지금껏 우리는 높은 이동성을 지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본이 세계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경험해 왔다. 자본가들은 자본의 이동성에 맞추어 명백히 국경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고 있다. 정보라는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경계를 초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유독 사람이 국경을 넘어서려 하면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긴장과 갈등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우리 특히 서구는 인권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에 경주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내지는 생존의 조건을–향하여 국경을 넘어서 움직이려 할 때에 우리는 정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보내는 정지 신호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순간, 그들은 불법을 저지르는 범죄자로 취급된다. 왜 국경을 넘는 이민도 한 국가 내에서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논쟁을 하려 하지 않는가?"
  
- 이민을 규제 없이 진행되도록 하자는 말인가?
  
"우리는 이민을 즉각 위험한 것으로 매도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이민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저지는 성공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이민에 대항하여 더 견고한 법률과 외부를 향해 점점 더 높은 장벽을 세워 우리들을 보호하려고 해 왔다. 하지만 불법 이민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불법 이민자들이 없다면 우리의 많은 사회적인 서비스들이 결코 정상적으로 영위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문제는 기업가적인 에너지에 충만하여 보다 나은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떻게 합법적인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 그렇다면 하나의 길이 존재할 것 같다. 바로 유럽연합(EU)의 확대 같은 것 말이다.
  
"옳다. EU의 확대로 인하여 과거의 경계체제는 이제 모든 회원국들을 위하여 제거되었다. 그것은 '국가들의 이민(Lädermigration)'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은 EU의 확대를 통해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 온 새로운 통행질서(Durchlässigkeit)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반면 이제 우리는 이민을–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관리(steuern)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민세(Migrationssteuer)의 도입과 같은 것은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 이민자들에 입국금(Eintrittsgeld)을 부과하자는 말인가?
  
"그렇다. 이리로 와서 일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절한 기여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민세다."
  
- 그것이 어떻게 제정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민세의 부과방식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 이민세 관련 법안의 제정 방식이나 그 이민세의 부과 수준은 아직 쟁점이 아니다. 이민세의 도입과 같은 방식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고 실험이 우선 중요하다. 이민의 합법화는 새로운 긍정적인 영향력을 지닐 수 있다. 이미 합법적인 산업화 단계에 이른 범죄 도주 행각의 기반을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입국 통제업무를 담당하는 관료체계를 철폐하도록 할 것이다. 이민을 하나의 부정적인 현상으로 간주해 온 유럽식의 사고의 고착도 이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민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수용토록 하기 위하여 분담금을 지불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가가치의 창출을 위해 기여하는 가운데 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세는 이민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 만일 이민세가 이민자들의 '관리'를 위해 쓰인다면, 그것이 이민을 더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금 또 다른 불법적인 방식의 이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장애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현실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험을 해야 한다. 이민세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세금을 상이한 방식으로 부과해 볼 수 있다. 이민을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탈범죄하기 위해서는 이런 실험이 필요하다. 이민을 범죄화하여 생산해 내는 경계체제를 완화시켜야 하며, 불법화는 종식되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 이득을 취하고 있는 (진짜) 범죄자들의 기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알콜 금지의 사례와 비교해 보고 싶다. 알콜을 금지하는 곳에서 국가는 알콜의 남용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 내 왔다. 스웨덴이나 1930년대 미국에서의 알콜 금지가 높은 범죄율을 만들어냈던 것을 생각해 보라."
  
- 하지만 만일 이민세가 사고실험을 넘어서 현실화 되려면, 전 유럽 차원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국가로 하여금 이민자들의 통합을 위한 재정 지출 부담을 덜고 이를 통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만들어 그들이 사회의 새로운 하층민이 되거나 새로운 문맹집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세금의 부과에 의견일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컨대 프랑스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듯이 그러한 논의는 현재 출발단계에 있다. 아직 어떤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조는 기초임금의 보장을 완전고용에 대한 대안으로 삼아 보려고 사고했던 과거 프랑스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본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 사이에 많은 논의가 더 진전되었고 구체적인 모델들도 논의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민세에 대한 사고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경계체제에 대한 사고가 고정화되는 것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다. 우리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발전시켜야 하고, 국경을 넘어서서 사고해야 한다."
  
- 합리화와 포퓰리즘의 수단을 통한 코스모폴리탄적 제안이라고 보면 될까? 과연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까?
  
"기꺼이 그 작업을 나의 과제로 삼도록 하겠다."

한국일보(07. 05. 23) 詩, 한국의 아시아인들을 말하다

이제 물러설 데가 없다. “낯선 남자 둘이 문 열고 들어 오자 / 젊은 네팔리는 창문을 뒤어 넘었다“(<단속>) 적어도 골절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 보자. “동남아인 노동자들이 돈 모아서 돌아가면 / 자기네 나라에서는 부자가 된다고 / 한국인 노동자들은 모을 돈이 없다고 / 동남아로 기계를 옮겨가는 게 더 남은 장사라고”(<체불>) 어설픈 동정은 금물이다. “비수기에 봉급 제때 챙겨 받고도 / 성수기 오면 봉급 더 올려 받으려고 / 동남아인 여종업원 둘 직장을 옮겼다.”(<몸값>)

공장주들이 철저히 ‘생계형’일 때, 문제는 달라진다. 자본 대 임노동, 착취와 피지배의 도식을 선뜻 들이댈 수 없다. “공장주는 늙은 장모를 모시고 와서 / 전기 재봉틀 앞에 앉혔다 / 밤새워 옷을 박지 않으면 / 젊은 네팔리의 진료비를 댈 수 없었다”(<단속>). 모두 한국 사회의 없는 자들이다. 중견 시인 하종오(53)씨가 뿌리 뽑힌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큰 공장은 아예 불법 체류자들을 고용할 수조차 없게 돼 있으니까요.” 21세기 한국판 프롤레타리아는 시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국경 없는 공장>, 동남아 국제 결혼 문제를 시로 옮긴 <아시아계 한국인들>(이상 삶이보이는창 발행)을 나란히 냈다. 별세계의 사람들처럼 여겨졌던 그들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 온 것은 3, 4년 전. 사업 하는 지인의 주변에서 풍경처럼 눈에 띄던 그들이 정서와 내면을 가진 인간들로 비치기 시작했다.

“25년째 살고 있는 면목동의 오래 된 지하 가내 공장에서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통역은 엄두도 못 낼 상황, 다만 고통의 무게만이 가슴에 와 닿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시들은 서정적 접근보다 서사적 접근이 강하다. 설익은 다민족 사회, 한국의 적나라한 모습은 <아시아계…>에 그려져 있다. 열차 객석에 앉아 동남아 말로 잠꼬대하던 그들은 칭얼대는 아이를 한국말로 달랜다.

다르게 생겼다 해서 학교에서 따돌림 받는 아들을 보며 냉가슴 앓는 필리핀인 어머니, 한국 남자와 외국 여자가 결혼은 했지만 서로 속내가 달랐음을 확인하고 돌아 서는 한 쌍의 이야기 등 수록 시들은 날만 새면 부르짖는 세계화 타령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고발한다. “이제 3세대까지 확산될 그들에게 가난의 재생산 구조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시는 차갑기까지 하다. “시인은 감정이입해서도, 동정이나 연민해서도 안 되죠.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겁니다.” 냉정한 시선, 소설과 같은 시란 올 초, 도달한 결론이다. “이제 소설 같은 시를 써 보고싶어요. 감정 개입 없이 서사가 진행되는, 소설 같은 시죠 .” 감정의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 대한, 하종오식 대응책이다. “진실은 시인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 있어요.”

강화도에 칩거하면서 김포의 공장, 외국인 노동자 등 급변한 우리 현실을 똑똑히 봐 온 시인에게는 현재 600여 편의 미발표작들이 햇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집착을 끊어 버리니 3개월째 담배에 손 안 대고 살아요. 단, 시에 대한 집착만 못 끊고 이러는 거죠.”

07. 05.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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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5-25 01:21   좋아요 0 | URL
아직은 '사고실험' 단계라니까 더 두고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민자들의 통합을 위한 재정 지출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의 문제일 텐데, 사회적 합의란 게 쉽게 도출될 거 같지는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7-05-29 21:00   좋아요 0 | URL
이전에 어떤 분이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자본가들이 그런 것처럼 지자체에 어느 정도의 돈을 기부하고 시민권을 주는 방식을 검토해보자 라고 얘기하시는 걸 본 적이 있는데요. 자본가가 돈을 투자한다면, 노동자는 노동으로 그 사회에 역할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 돈까지 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현실에서는 더욱 맞지 않는 것이, 이주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데, 거기다 재정부담까지 져야 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죠. 이민자들이 그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가 인권이라면, 그것은 전체 사회의 부담이 되어야지 이민자들에게 그 부담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장애인의 사회통합(통합이란 말은 때로 참 웃기죠)을 위해 장애인에게 재정부담을 지우지는 않잖아요?

로쟈 2007-05-29 23:27   좋아요 0 | URL
하지만 현실적으로 원하는 이민자/이주노동자를 아무런 제한없이(쿼터 제한 없이) 수용하는 나라도 없는 것 아닌가요?(통장에 돈 한푼 없이 이민갈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실제로 한국만 하더라도 상당한 비용부담을 떠안고서(빚을 지고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이민세에는 그걸 '양성화'한다는 취지도 포함돼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웃기는 노릇일 수 있지만 웃기는 일이야 워낙에 널려 있으니 예외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