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저널 담비에서 경희대학원신문에 실린 리뷰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올봄에 세상을 떠난 보드리야르의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 관한 것인데,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되지 않은 책이라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그건 조만간 이 주저가 소개되기를 기대한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보드리야르에 관한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그냥 그의 '책'이다.

경희대학원신문 151호(07. 05. 22) 장 보드리야르와 『상징적 교환과 죽음』

얼마 전 보드리야르는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 작별인사를 남겼다. 데리다와 부르디외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 보드리야르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추모의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모란 무엇일까? 추모(追慕)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모순적인 태도를 압축해 놓은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추모는 ‘죽은 자를 저편의 세상으로 추방하는 동시에 그를 그리워하는 행위’이다.

보드리야르가 『상징적 교환과 죽음』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현대사회란 죽음을 추방함으로써 세워진 일반 정치경제학이라고 비판하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추모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려 보내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추모란 산 자들에 의해 죽은 자들의 삶이 재구성되는 의례적 행위이며, 한 사상가의 사후의 삶 또한 한 사회의 의례적 행위를 통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발리바르가 알튀세르를 가리키면서 말했던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에 대한 지위이다. 알튀세르, 보드리야르, 니체… 등등의 사상가들의 운명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그들의 언급에는 무언가 외상적인 지점,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의 차원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 예를 들자면 인간의 숭고한 기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원숭이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니체의 말과 같은.

이러한 외상적 진리에 대한 한 가지 대처 방법이란 이들의 주장을 뻔한 인용구의 목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뻔한 인용문의 목록은 그들을 읽지 않아도 그리고 이해하지 않아도 그들을 존중하는 가장 탁월한 (니체적인 의미에서) 교양적인 행위가 아닐까? 그 다음으로는 이들이 대항하고자 했던 상식들을 이들의 주장에 대한 대안점 또는 극복점으로 제시하면서 이들이 제시했던 ‘소화되지 않는 진리’는 회피된다. 이와 같은 전범은 아마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일 것이다.

한때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을 보지 못했다”라는 수사적 클리세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때 유행했던 (편견으로서의) 상식은 보드리야르는 영화 매트릭스의 사상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매트릭스 밖의 실재를 상정해 놓았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매트릭스 밖 실재의 장소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는 점에서 전혀 보드리야르적이지 않다. 보드리야르에게는 그와 같은 안정적인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뮬라시옹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가져주는 불편함과 영화 매트릭스가 가져다 주는 불편함 속의 안락함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시뮬라시옹이라고 불렀을까?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보드리야르는 소쉬르가 불러일으킨 언어적 전회를 기꺼이 떠맡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언어적 전회는 재현 이전의 실재를 부정하며, 재현 이전의 실재란 재현이 만들어낸 사후적 효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실재보다 더 한 실재란 시뮬라시옹에 대한 역설적인 정의이다. 이미 우린 존재론적으로 실재와 마주칠 수 없다면 실재 보다 더 한 실재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린 보드리야르가 르페브르의 제자라는 점, 그리고 르페브르가 근대성의 사회학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드리야르는 보들레르, 벤야민 등과 견줄 수 있는 근대성의 시인이자 비판가이다. 그의 근대성 이론은 마르크스와 니체와 뒤르켐과 마르셀 모스 등에 근거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추상적 체계로서의 자본이 기호의 영역을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과정이 소비의 사회이며, 그 결과 섹슈얼리티 마저도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의 법칙에 필적할 만한) ‘쾌락률 하락의 법칙화’하는 것이 일반 정치경제학체계, 즉 시뮬라시옹이다.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최첨단의 이론가가 구식의 개념인 마르크스의 ‘사물화’ 논리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상품관계가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자전주기와 축적주기를 갖는 자동적인 운동으로 전화되듯이 시뮬라시옹 또한 인간들간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었던 기호들의 관계가 이제는 역으로 인간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자동적인 자전주기와 축적주기를 갖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뮬라르크의 자전이란 자본의 축적운동의 기호화와 그 기호에 의한 현실의 모델화일 뿐이다. 그리고 이 시뮬라시옹의 원주민은 니체적인 최후의 인간(the lastest man)으로 주제화된다. 따라서 그가 되불러 오고자 하는 것은 뒤르켐과 모스의 인류학에서 정식화되었던 상징적 교환의 전복적인 논리이다. 왜냐하면 상징적 논리란 사물화된 추상적인 체계가 아닌 유혹과 결투 그리고 의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관계에 의한 기호의 점유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근대화의 과정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하며, 이 근대화를 넘어설 어떤 급진적인 논리를 찾고자했던 사상가였다. 우리가 그의 논의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후기에 주춤거렸던 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틀이다. 그리고 우린 역으로 그를 다시 급진화해야만 한다.

이제 정리해 보자. 진리는 보드리야르가 그토록 비판하였던 한 사회의 나르시시즘적인 위로도 위안도 아니며, 오히려 이 나르시시즘을 깨는 불편함과 불안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차원은 보드리야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된다.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혹이 시작된다.” (『허무주의에 관하여』 중) 그리고 보드리야르는 그의 후기 글들에 대해서 ‘테러리즘적인 글쓰기’라고 명명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글들에 도전할 것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과 유혹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저서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서 논의된 결론을 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린 그를 그의 글 속에서 살게 할 수 있고, 바로 이 행위 속에서 그를 살아 있는 주장으로 간주하고 그럼으로써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에게 사후의 삶을 주도록 하자. 즉 그의 문자 속에서 그를 거주하게 하자.(이병주/ 언론정보학부 강사)

07.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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