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이런저런 기사들을 읽고 옮겨놓는 것이다. 더구나 며칠 전에 읽은 기사라면 불은 라면 먹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다. 얼마전부터 '6월민주항쟁20주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상상변주곡’가 열리고 있는데, 총 9회에 걸쳐서 이루어질 이번 토론회는 현재 두 차례 진행되었다. 도정일 교수에 이어서 발제자로 나선 이는 문화평론가 진중권씨인데, 컬처뉴스의 관련기사와 함께 그 발제문 '신체의 지질학'을 옮겨놓는다. 농경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돌입한 한국사회 정치의식의 변화추이를 '지질학'적 시각으로 포착하고 있는데, 그의 강점이 '진중함'에 있다기보다는 '순발력'에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그는 담론의 유희가 무엇인지 아는 평론가이다).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상상변주곡’ 두 번째 행사가 지난 5월 3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렸다.

컬처뉴스(07. 05. 04) 새로운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상상변주곡’ 두 번째 시간(5월 3일)은 진중권 문화평론가의 발제로 시작됐다. 진중권 평론가는 「신체의 지질학」이라는 발제를 통해 농경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정보화 사회로 돌입한 한국사회의 사회적 특징과 변화된 ‘정치의식’을 분석했다.

 

 

 

 

 

 

 

 

 

 

진중권 평론가는 “급격한 지각 변동이 지질학적 지층에 고스란히 기록되듯이, 급격한 사회 변동 역시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 안에 고스란히 축적”되는데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를 거쳐 정보사회로 변모하는 것이 반세기도 안되는 동안에 이뤄”짐으로써 “한국사회 안에는 농경사회의 신체와 산업화의 신체, 정보사회의 신체가 공존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생존을 걸고 싸우는 처절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와 일종의 퍼포먼스의 성격을 띤 놀이로서의 정치가 공존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시위 모습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 같은 두 가지 형태의 정치가 공존하는 것은 압축성장으로 인해 한국사회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민중운동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NL’과 ‘PD’의 대립과 관련해서도 ‘신체의 차이’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NL은 “산업화 과정에서 몰락한 농민들의 좌절감, 개발에서 배제되어 낙후된 농촌지역의 소외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로 위협받는 농민계급의 위기감 등을 미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로 승화시킨 것”이며, PD는 “7~80년대에 이루어진 산업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혁명가들이 갖춰야 ‘철의 규율’은 무기물(철)을 유기적 신체의 모범으로 삼는 산업화의 이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NL과 PD의 대립은 두 개의 다른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실은 두 개의 다른 신체의 대립”이라는 것이다(*그 신체는 물론 '농민의 신체'와 '노동자의 신체'로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세계적으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역사의 종언, 서사의 종언, 정치의 소멸, 그리고 주체의 죽음과 같은 문자문화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정보사회로 진입을 완료한 한국 역시 “정보가 재화가 되고, 상품이 비물질화하고, 소비가 기호화하고, 생산이 정신화하고, 노동이 오락화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보사회의 특징은 “그저 지적인 유행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력의 수준이 과거의 산업적 신체와는 다른 신체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보적 신체를 가진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의 변화된 정치의식은 이러한 탈문자화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역사에 최종목표가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들에게 미래는 그저 SF의 시간일 뿐이고, 역사는 그저 퓨전사극의 배경일 뿐”이다. 때문에 “이것을 단지 젊은 세대의 ‘보수화’로만 볼 수 없으며, 진보나 보수의 이항대립을 넘어선, 완전히 차원이 다른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방송 3사의 고구려 드라마를 예로 들면서 “문자로 씌어지는 역사가 사라진 곳에 영상으로 그려지는 신화가 등장하고 있”으며 “텍스트로 무장한 386세대의 역사적 의식은 디지털 영상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의 신화적 의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은 토론에서 손석춘 전 한겨레 논설위원은 “NL이 우리사회에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북쪽에 전쟁위협을 가하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유지되고 있고 한국사회에 미치는 규정력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며 “농경 신체적 특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비약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정보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 해체논리와 관련해 “노동자계급의 단결 문제는 새삼스럽게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그 해체논리에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준영 문화평론가는 “농경사회 신체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중권 선생이 말한 요즘 세대가 가진 정보사회의 신체가 불과 10년 만에 확고하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의문이 생긴다”며 “9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발견한 변화된 모습은 정보화 사회로의 변화라기보다는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 세대들이 소시민화되는 경향이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진중권 평론가는 “정보사회가 빠르게 우리사회에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문자문화의 전통이 짧고 낙후돼 있었기 때문이며, 농경사회에서 남아있던 구술문화, 다시 말해 소리와 이미지를 기억하는 신체는 바로 인터넷이라는 기술과 만나면서 급속하게 이입됐다”고 답했다. 그 밖에도 ‘황우석 사태’에서 보여준 젊은 세대들의 ‘디지털파시즘’의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와 연관돼 산업화 시대로 역행하고자 하는 ‘보수화’된 젊은 세대의 경향성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위지혜 기자)

진중권 (문화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신체의 지질학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거기서 다시 정보사회로. 이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반적 변화의 양상으로 보인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이 모든 변화가 한국에서는 유례없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농경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변모하는 것이 반세기도 안 되는 동안에 이루어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급격한 지각의 변동이 지질학적 지층에 고스란히 기록되듯이, 급격한 사회의 변동 역시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 안에 고스란히 충적되어 있다.

서구에서 산업혁명은 19세기에 일어났다. 그래서 서구인들에게 농경사회는 아득한 역사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바로 농경사회의 추억과 연관된다. 거의 모든 인구의 가정에 농경사회의 신체를 가진 이가 존재한다. 신체는 늘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을 보이기에, 산업사회로 이행을 완료한 다음에도 농경사회의 기억이 가까운 사회의 성원들은 몸속에 여전히 농경사회의 습속을 갖고 있게 된다.

다른 한편, 근대화의 흐름에 뒤쳐져 식민통치를 겪었던 뼈아픈 역사적 경험은 한국인들을 미래주의적으로 만들었다. 황우석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기술에 대한 믿음은 한국에서 거의 종교적 신앙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한국은 사회의 일반적 발전 수준 이상으로 IT 인프라가 발달해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신체는 온갖 디지털 기기와 결합되어 있다. 한국인의 몸은 어느덧 세계에서 가장 사이보그화한 신체가 되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한국전쟁 후에 일어난 사회운동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신체의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무능에서 비롯된 정치적 현상이다. 신체의 ‘근대화’에는 크게 두 가지 과제가 따른다. 첫째는 사회 성원들을 자율적 판단과 행위의 능력을 가진 독립적 인격으로 바꾸어 놓는 민주화의 과제이고, 둘째는 그들의 신체를 자연에서 떼어내어 기계와 결합시키는 산업화의 과제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 두 과제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비록 미국식 민주주의의 형식을 취했지만, ‘국부’라는 호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승만 정권의 통치 스타일은 외려 봉건적 군주제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 정권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갖지 못한 채, 그저 부패와 비효율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4.19 혁명은 결국 시민들이 막연하게 느끼던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의 필요성에서 비롯된 시민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4.19 혁명 이후 내각제를 받아들인 것은 나름대로 대통령제의 제왕적 성격을 수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또 민간정부에서 수립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4.19가 그저 정치적 혁신의 운동에 그치는 게 않고, 경제적 산업화를 포괄하는 폭넓은 의미에서 근대화 요구라는 것을 그 정부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혁명으로 수립된 준비 안 된 정권이 이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기란 불가능했고, 바로 그 좌절에서 탄생한 것이 5.16 쿠데타였다.



민주화 없는 산업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민주화 없는 산업화’였다. 박정희가 즐겨 사용하던 ‘인간개조’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의 시급한 문제는 신체를 자연에서 떼어내 기계와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저곡가 정책 등 박정희 정권이 도입한 이농정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해방 후 90%에 이르렀던 농민의 비중은 그 후 급속히 감소한다. 자연을 등지고 도시로 올라온 신체들은 군사정권의 군대식 훈육을 통해 폭력적으로 기계와 결합하게 된다.

한편, ‘인간개조’는 남한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 역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사회개조, 자연개조와 더불어 무엇보다 ‘인간개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민주화 없는 산업화라는 점에서 북한의 성과는 적어도 60년대까지는 남한의 것보다 더 눈부셨다. 하지만 경제적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체제의 유지를 위해 농경적 신체의 봉건적 충성심을 온존시켰다. 북한식 사회주의가 가진 그로테스크한 특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는 군대식 훈육이 어느 정도 작동한다. 노동력의 단순투입으로 생산력을 제고하는 단계에서는 군대식 충성심을 가진 기계화한 신체야말로 외려 효율적이다. 하지만 사회의 생산력은 결국 사회 성원 개개인의 수행능력(이른바‘노동력의 질’)에 달려 있다. 게다가 노동력의 단순투입에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산업화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외려 군대식 신체가 발전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회 민주화의 요구는 이때 터져 나오게 된다.

박정희의 죽음과 더불어 ‘민주화 없는 산업화’의 시대는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 정권은 역사에서 반동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폭압적인 통치를 행했지만, 경제의 영역에서만은 국가통제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정책을 편 것은 데에 주목해야 한다. 한 마디로, 당시의 산업의 발전수준에 맞는 개혁을 도입하되, 그것이 민주화로 확산되는 것을 폭압적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 전두환 정권의 존재이유였다.

민중운동
하지만 그런 봉합의 시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는 6월 항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6월 항쟁을 주도한 것이 학생과 넥타이 부대였다는 것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경제의 영역에만 가두어둘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라는 요구로 볼 수 있다. 물론 민주세력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등장하고, 이로써 군사정권은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계속되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통치는 연성화하기 시작한다.

이어 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정치적 민주화의 분위기 속에서 그 동안 가장 억압을 받아왔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다. 이미 운동의 이념화는 80년대에 급속도로 진행되었지만, 그것의 계급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88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의 일이다. 다른 한편, 민주화로 인해 열린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념적 금기를 깨려는 시도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이다.

하지만 80년대 말에 일어났던 동구권의 몰락과, 북한 사회의 답보 내지 퇴보는 너무 늦게 나타난 이런 이념운동의 싹을 잘라 버렸다. 사회주의권의 급작스런 붕괴는 이념세력으로 하여금 자기 혁신을 통해 현대화를 할 틈을 주지 않았고, 역사적 텔로스를 잃어버린 이념운동은 곧 불어 닥친 포스트모던의 탈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 혹은 30년대에나 어울릴 구태의연한 수사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박제가 되어갔다.

NL과 농경적 신체
민중운동의 두 기둥은 실은 한국사회가 거쳐 온 두 개의 발전단계, 그 과정에서 형성된 두 개의 신체를 대표한다. NL은 농경적 신체의 이데올로기다.
산업화 과정에서 몰락한 농민들의 좌절감, 개발에서 배제되어 낙후된 농촌지역의 소외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로 위협받는 농민계급의 위기감 등을 미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NL의 이데올로기다. 게다가 NL 이념에 원형을 제공한 북한 체제 자체가 농경적 특성을 온존시킨 봉건사회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NL적 신체들이 산업화 이전의 농촌공동체 정서를 가지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조직화를 하기보다 ‘관계 맺기’를 활용하고, 논리적 설득보다 정서적 ‘감동’을 강조하고, ‘품성’이나 ‘의리’와 같은 전근대적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은 문자문화가 이전의 구술문화에 속한 신체들의 전형적 특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렸던 신학철 화백의 그림, 즉 농부가 쟁기로 미제 문화를 몰아내는 그림은 NL적 신체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NL의 이상 속에는 미국에 반대한다는 네거티브한 요소와 산업화로 잃어버린 공동체적 삶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라는 포지티브한 요소가 공존한다. 80년대 운동권에서 NL이 주류로 떠오른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한국인들 신체가 여전히 농경문화에 젖어있음을 말해준다.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문맹률은 90%에 달했다. 오늘날 문맹자는 거의 없게 됐지만, 문자문화로의 진입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의 신체는 여전히 구술문화의 특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

PD와 기계적 신체
PD는 7~80년대에 이루어진 산업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이들도 역시 ‘군대’의 은유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로 시작되는 인터내셔널가의 번역에는 기계와 결합한 노동자의 군대적 신체가 세계를 해방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담겨 있다. 농업생산과 달리 신체를 기계에 맞춰야 하는 산업생산에는 규율이 필요하다. 그것이 또한 혁명가들이 갖춰야 ‘철의 규율’이 된다. 이 표현에는 무기물(‘철’)을 유기적 신체의 모범으로 삼는 산업화의 이상이 반영되어 있다.

PD는 문자문화의 전형이다. NL이 인간을 믿는다면, PD는 텍스트를 믿는다. 그들은 인간관계보다 사상서적을 더 신봉한다. 이들에게는 품성보다는 논리가 중요하고, 의리보다는 원칙이 더 중요하다. 농경적 신체에게 이런 태도는 당연히 ‘차갑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논리보다 정서를, 원칙보다 인간미를 더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그 영향력이 일정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NL과 PD의 대립은 두 개의 다른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실은 두 개의 다른 신체의 대립이다.

문자문화의 소산인 PD는 세계와 문자의 동일성을 굳게 믿는다. ‘자본주의를 알고 싶은가? 그러면 자본론을 읽으라.’ 이것이 문자문화의 상식이다. 하지만 80년대 말에 있었던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이들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무너진 것은 사회주의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자본주의)=텍스트(자본론)’이라는 믿음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텍스트에 대한 불신이 시작되고, 이들은 대거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 빠져들게 된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역사주의’는 문자문화의 산물이다. 텍스트는 선형적이어서 거기에는 처음이 있고, 또한 끝이 있다. 창세가 있고, 종말이 있다. 가장 위대한 책인 성서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묵시론으로 끝난다. 마르크스의 역사도 원시공산주의에서 시작하여 발달한 공산주의사회로 끝난다. 포스트모던은 이런 문자문화적 사고방식의 종언을 의미한다. 종교적 의미에서든, 세속적 의미에서든 사람들은 더 이상 역사에 최종목적(telos)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역사의 종언, 서사의 종언, 정치의 소멸, 그리고 주체의 죽음. 서구 자본주의가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산업혁명기에 형성되었던 문자문화의 역사주의는 종말을 고한다. 이것은 그저 지적인 유행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력의 수준이 이전과는 다른 신체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론의 변화는 토대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를--앞서서 혹은 뒤늦게--반영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사회주의권 몰락의 충격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한국사회에서도 ‘탈정치화’는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90년대 이후 한국이 정보사회로 진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한 사회의 노동인구 중에 재화의 직접적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정보의 생산, 가공, 유통에 종사하는 이들의 비율이 절반을 넘을 때, 그 사회를 ‘정보사회’라 부른다. IT 분야에서 선두권에 속하는 한국은 이미 정보사회로 진입을 완료했다. 정보가 재화가 되고, 상품이 비(非)물질화하고, 소비가 기호화하고, 생산이 정신화하고, 노동이 오락화하는 사회는 당연히 과거의 산업적 신체와는 다른 신체를 요구하게 된다.

미래의 노동자계급
한때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농민계급은 오늘날 인구의 10%로 줄어들었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가운데 노동자계급이 농민계급을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다시 정보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 역시 해체의 운명을 맞는다. 노동계급의 힘은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에 기반한 조직력에 기초한다. 하지만 미디어는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조직’이라는 말은 고루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 대신 새로운 관계맺음의 방식, 즉 네트워크가 등장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산업노동자가 세계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정보사회에서 주요한 가치는 정보노동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이미 산업 노동자의 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주변화하고 있다. 그들의 대다수는 ‘계급’이라는 이름의 집단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위탁업체와 개별 계약을 맺어야 하는 고독한 노마드로 존재한다. 한편, 노동계급 중의 상층부는 일종의 ‘엔지니어’ 혹은 ‘매니저’로 특권화한다. 이런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란 어쩌면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블루칼라는 PC방에서 게임에 몰두하며 정보사회에 필요한 디지털 반사신경을 발달시키고 있다. 미래의 화이트칼라는 고학력을 가지고 대기업의 연구소에서 이른바 ‘R&D’에 몰두하고 있다. 이 새로운 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산업사회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의 욕망을 과연 산업혁명기에 형성된 ‘계급의식’이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낡은 좌파 이념을 리사이클링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보사회의 정치의식
빌렘 플루서는 정치를 ‘저개발의 정치’와 ‘과개발의 정치’로 구별한다. 저개발의 정치는 생존을 걸고 싸우는 처절한 투쟁으로서 정치다. 과개발의 정치는 일종의 퍼포먼스의 성격을 띤 놀이로서의 정치다. 이미 우리는 거리에서 두 가지 형태의 시위를 본다. 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투쟁으로서 시위. 그리고 문화 콘서트와 함께 열리는 촛불 집회. 한국에 저개발의 정치와 과개발의 정치가 공존하는 것은, 압축성장으로 인해 한국사회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티조선 운동은 네티즌들이 즐기는 가벼운 오락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노사모 운동은 온오프를 넘나드는 일종의 버추얼 리얼리티 게임으로 존재했다. 탄핵반대시위는 거대한 종합예술의 퍼포먼스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놀이로서의 정치, 즉 과개발의 정치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과잉진압으로 농민이 사망하고, 절망한 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시위대와 경찰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저개발의 정치가 공존한다. 시위를 하는 취향의 차이는 당연히 신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농경적 신체는 애써 기른 농축산물을 거리에 뿌려대며 절망감을 표현하고, 산업적 신체는 군대를 방불케 하는 조직적 전투로써 항의를 표현한다. 반면 정보적 신체는 비(非)물질적이어서 이런 저항의 물리적 방식에 거부감을 갖는다. 농경적, 산업적 신체에게 정치란 육체의 생존이 걸린 진지한 행위이나, 정보적 신체에게는 정치마저 비(非)물질화한 채로 가상, 유희, 오락의 영역에 편입된다. 저개발의 정치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과개발의 정치는 이미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대선은 보수신문이라는 활자매체 대(對) 방송과 인터넷이라는 영상매체의 대립으로 치러졌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인쇄의 정치 대신에 영상의 정치가 들어선다. 공약은 흑백이다. 그것은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적힌다. 반면 이미지는 칼라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대중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보라색과 초록색의 이미지뿐이다. 그 선거는 철저하게 가상으로 치러졌다. 문자로 공약을 하던 진지한 정치는 이제 시각적 스펙터클을 동원한 판타지의 정치로 바뀌어 가고 있다.

역사에서 신화로
역사는 문자문화의 소산이다. 문자문화의 종언과 더불어 역사주의 의식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정보적 신체를 가진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더 이상 역사에 최종목표(telos)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해방된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현재를 위하여 과거에 있었던 피억압의 기억을 조직해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그저 SF의 시간일 뿐이고, 역사는 그저 퓨전사극의 배경일 뿐이다.

시간이 클릭할 수 있는 공간이 될 때,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믿음도 약화된다. 그들에게 세계는 역사의 진행이 아니라, 동일한 이미지의 영겁회귀일 뿐이다. 때문에 정보적 신체를 가진 젊은 세대가 역사의식을 갖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것이 텍스트 세대의 눈에는 ‘보수화’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은 진보나 보수의 이항대립을 넘어선, 완전히 차원이 다른 현상이다. 진보/보수의 이항대립은 선형적인 역사관을 전제하나, 정보적 신체는 이미 그 지평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자로 씌어지는 역사가 사라진 곳에 영상으로 그려지는 신화가 등장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정치인과 학자들이 문자로 역사를 고쳐 쓸 때, 한국에서는 PD와 작가들이 미래주의적으로 역사를 영상으로 극화하고 있다. 방송 3사의 고구려 드라마가 일깨워준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의식’이 아니다. 판타지로 이루어진 황홀한 환각의 체험이다. 텍스트로 무장한 386세대의 역사적 의식은 디지털 영상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의 신화적 의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07.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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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뮤지션 2007-05-07 23:22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분석입니다. 사회의 성격 변화에 대한 진단을 그의 전문 분야의 언어로 훌륭하게 '변주'해내어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NL과 PD에 대한 언급까지 잊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진중권은 자신을 배출한 '신체'에 대한 소속감을 은연중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같습니다. (의외로 안 그런 것 같은 사람인데 말이죠.)

그나저나 자신이 배운 학문을 발판 삼아 그 학계의 지루한 풍토에 젖어들지 않고, 저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 결국 다 하는 사람들이 참 부럽네요.. ^^;

로쟈 2007-05-07 23:36   좋아요 0 | URL
그런 부러움은 천재뮤지션님의 닉네임과는 잘 안 어울리는 듯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