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작가 김소진씨의 10주기이다. 지난주에는 이를 기념하는 동료, 선후배 문인들의 문집 <소진의 기억>(문학동네, 2007)이 출간됐다. 지난 겨울 젊은 평론가들이 이 문집과 관련한 원고 얘기를 하는 걸 들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작가의 신춘문예 데뷔작 '쥐잡기'(1991)가 발표된 지면과 첫 소설집 <열린사회와 그 적들>(솔출판사, 1995)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63년생 작가군'의 한 축이었던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어느덧 10년이다. 문단의 유망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그의 소설들을 미처 챙겨읽기도 전이었다. 이번에 추모문집이 나와서 든 생각이지만 김소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추모는 시인 기형도의 죽음/추모와 겹친다. 장르는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언론사 기자생활을 했던 일까지 공통적이다. 그리고 요절까지. 이들을 추억하는 선배 이경철 (전)기자에 따르면(http://daesan.or.kr/wepzine/2006winter/%BF%EC%B8%AE%B9%AE%C7%D0%C0%C7%BC%F8%B0%A3%B5%E9.htm) 두 사람의 죽음은 한국문단의 한 분기점들을 이룬다. 김소진에 대해 추억하고 있는 대목.

기 시인의 죽음이 젊은 시단의 한 분수령이 됐다면 1997년 4월 22일 소설가 김소진 씨의 34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젊은 소설계의 한 분수령이 된 상징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김 씨는 죽기 한 해 전 잘 다니던 한계레신문 기자직마저 팽개치고 소설에만 전념, 가장 주목받은 작가로 떠오르며 그해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도 수상했다.

스스로도 전업작가로 돌아서길 잘했다며 한 해 세 권의 소설집을 펴낼 정도로 창작욕에 불타오르던 김씨는 이듬해 초 췌장암으로 손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형, 먼저 가서 미안해”라는 말만 남기고 숨을 넘기고 말았다. 김 씨를 96년도 가장 주목받은 작가로 선정, 기사도 다루고 본격소설의 위의를 지켜달라고 격려했던 나 역시 그의 죽음이 쓰렸지만 내심 아프고 당혹스러웠을 사람들은 김 씨보다 앞서 전업의 길을 택한 작가들이었을 것이다.

민주화도 눈에 띨 정도로 진척되고 경제도 95년 1만 불 시대로 나아가던 1990대에 접어들자 신예작가들이 ‘이제 글만 써도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판단에 직장도 팽개치고 하나 둘씩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김 씨 또한 그러했다. 본격소설의 위엄을 지키며 한국소설의 대들보로 떠오르던 김 씨는 선배 전업작가의 창작욕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돈 등에 딴눈 팔지 말고 본격소설을 지키게 하는 하나의 항체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 씨의 요절 직후 IMF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가 거덜 나 많은 잡지, 사보 등이 폐간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간지들의 연재소설 지면과 문예지의 페이지도 줄어들고 원고료도 인하돼 고료수입도 거덜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뒤에서 본격문학의 양심으로 무섭게 추동해대던 김 씨마저 죽고 없는 젊은 전업소설계는 상업화의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에 우리는 뭔가 다른 소설들을 읽게 되었던 듯도 하다. 우리문학이 끝까지 가지 않은 길('80년대 문학')의 한 이정표로 그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싶고. '푸르른 계절'로 가는 길목에서... 그가 한동안 몸담았던 한겨레신문에서 작가의 10주기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4. 20) 목마른 한국문학 ‘그리운 김소진’

작가 김소진(1963~1997)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2일로 꼭 10년이 된다. 1963년 음력 12월 3일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태어난 김소진은 1997년 양력 4월 22일 새벽 서울 연희동의 한 한방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4의 풋풋한 나이였다.

1991년에 등단해 1997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불과 6년여의 활동 기간 동안 김소진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글을 썼던 다산의 작가였다. 그 사이 그의 소출은 소설집 네 권, 장편 2편과 미완성 장편 하나, 콩트집 2권, 동화 1권, 산문집 1권에 이른다. 그러나 김소진 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양적인 측면에서만 찾아서는 곤란하다. 그의 활동기는 80년대를 풍미했던 공동체적 윤리감각이 90년대의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준 시기와 겹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청년기이자 습작기였던 80년대의 문학관을 의연히 작품 속에서 견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80년대적 교조까지도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민중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결코 민중을 맹목적으로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 사회가 더욱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소설 속에 담았지만, 그런 당위에 꿰어 맞추느라 현실의 복합성을 호도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김소진은 80년대적 가치를 90년대적 현실에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애쓴 작가였다. 80년대 문학의 ‘전통’을 지양함과 동시에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주류’와도 분명한 거리를 둔 그는 차라리 2000년대 문학의 선구자로 불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없는 세월이 10년의 두께를 쌓아 가는 동안 ‘김소진’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그의 사후에 등장한 젊은 독자들은 물론 그와 동시대를 호흡했던 ‘늙은’ 독자들조차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려는 듯하다. 그가 죽음의 방문을 받고 더는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자 독자들 역시 그의 소설 읽기를 그만두기로 작정이나 한 듯이.

그의 10주기를 맞아 남은 이들이 펴낸 추모문집의 제목이 <소진의 기억>(문학동네 펴냄)이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적절해 보인다. ‘소진(金昭晋)의 기억’은 지금 ‘소진(消盡)의 기억’이 되어 버렸으므로. 그러나 <소진의 기억>의 편자들(안찬수 정홍수 진정석)이 썼다시피 김소진 문학은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중심에서 배제된 주변부적인 것들에 대한 이 작가의 생리적인 애착과 공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김소진 소설 역시 문단의 주류나 문학적 평가의 중심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중심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밀고 나간 김소진의 소설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어떤 편향과 맹목을 되비쳐주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2007년 현재 시점에서 김소진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의례적인 추모 행위를 넘어 한국소설의 좌표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당대적 실천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편자들이 고인의 대학 친구들이자 절친한 문우들이라서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소진의 기억>에 실린 문인 30명의 글들에서 김소진 문학에 대한 그런 평가는 두루 확인된다. 유희석 전남대 영문과 교수는 ‘김소진과 1990년대’라는 제목의 평문에서 △김소진 소설 속의 민중은 1970년대 미아리 산동네 사람만이 아니라 21세기 오늘의 민중이 겪는 희노애락의 표정까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김소진의 ‘후일담’은 이념과 탈이념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반후일담적 후일담’이고 △단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등에서는 변혁운동의 관료화 징후와 기층 민중의 주변화를 감지했으며 △중편 <목마른 뿌리>에서 보다시피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예측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김소진 문학의 21세기적 의미가 있다고 진단했다. 평론가 김형중씨 역시 ‘비루한 것들의 리얼리즘’이라는 글에서 비루한 존재들의 위계 없는 등장과 발언으로 특징지어지는 김소진 소설의 리얼리즘이야말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 운위되는 이즈음의 문학 상황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형태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래 및 후배 소설가들이 산문과 소설의 형태로 표한 애정 또한 지극하다. 후배 작가 천운영씨는 ‘쥐덫과 쥐잡기’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김소진과의 기묘한 인연을 털어놓는다. 대학을 마치고 다시 입학한 예술대학 문창과에서 그가 생애 처음으로 쓴 소설의 제목이 ‘쥐덫’이었다. “집 안에 득실거리는 쥐를 잡기 위해 곳곳에 쥐덫을 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실직한 가장”과 운동권 아들의 이야기. 스스로 만족해하며 친구에게 보였더니, 그가 읽어 보라며 권한 소설이 김소진의 등단작인 <쥐잡기>였다. 아직 등단하기 전인 후배 작가는 <쥐잡기>를 미처 읽어 보지 못한 상태였거니와, 두 소설은 제목과 설정, 그리고 몇몇 구절까지가 흡사했던 것. “선점이라는 게 이거구나, 더 많이 읽어야 이런 일이 없겠구나, 습작소설과 작가가 쓴 소설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복잡다단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씁쓸한 생각과 아울러, 언젠가 등단하게 되면 만나서 할 얘깃거리 하나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배는 후배 작가의 등단(2000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절친한 문우였던 시인 안찬수씨는 “동트기 전/새 울음소리를/듣고 있는 게/나 혼자는 아니다”(<블랙마운틴에서>)라는 말로 친구를 그리워했고, 후배 시인 장철문씨는 “동구 밖으로 가듯이 지평선으로 가듯이/멀어져갈 때,/그냥 내버려두었다/잔을 놓는 벗의 겉옷을 집어주듯이/그때 내 상반신이 튀어나와 꺼이꺼이 울며/달아나는/그림자를 따라가 붙잡으려 했다/나는 뒤에서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2005년 4월, 마르세유>)며 애써 슬픔을 다독였다.

후배 작가들이 쓴 헌정 소설들도 흥미롭다. 김중혁씨는 <무방향 버스­리믹스 ‘고아떤 뺑덕어멈’>이라는 단편에서 김소진의 소설 <고아떤 뺑덕어멈>의 첫 두 문장과 마지막 두 문장을 자신의 소설 속 첫 두 문장과 마지막 두 문장으로 써먹는 식으로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주’를 시도했다. 윤성희씨는 김소진 소설들에 구멍을 통해 훔쳐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 착안해 <구멍>이라는 단편을 썼다. 김중혁 소설에서 어머니가 ‘무방향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데 비해 윤성희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어느 날 문득 생의 블랙홀(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는 점은 가외의 재미를 준다.

‘그에게 바치는 ‘쐬주’ 한잔’이라는 산문을 기고한 선배 작가 이혜경씨는 생전의 김소진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그런 그가 추모문집에 글을 보탠 것은 “이 인연으로라도 그의 묘지에 ‘쐬주’ 한잔 올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혜경씨는 21일 낮 경기도 용인에 있는 고인의 무덤(김소진의 사후 거처는 용인공원묘원 63번지 5-310이다)에서 바랐던 대로 소주 한잔을 바치게 될 것이다. 이혜경씨말고도 은희경 성석제 김연수 김중혁 윤성희씨 등 50여 명의 문우들이 이날 묘소 참배에 동행할 예정이다. 시인 김정환씨가 추모시 <김소진, 죽은 지 십 년>을 낭송하고, 천운영씨는 문제의 <쥐잡기>의 일부를, 전성태씨와 윤성희씨는 각각 <고아떤 뺑덕어멈>과 <눈사람 속의 항아리>의 일부를 낭독한다.

“혹 지금의 우리는 집단적으로 김소진이라는 이름의 폴더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추모문집에 실린 평론가 이경재씨의 글 ‘아버지의 진실’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추모문집과 추모모임이 이어지면서, “자기 목숨을 앞당겨 글을 씀으로써 소진”(이혜경)한 김소진의 10주기가 아주 쓸쓸하지는 않게 될 모양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레(07. 04. 23) 소설가 김소진 10주기 추모식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의 10주기 추모식이 21일 낮 경기도 용인공원묘원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김정환 신현림 박상순 안찬수 장철문(이상 시인) 이혜경 은희경 성석제 김인숙 권여선 박현욱 전성태 김중혁 천운영 윤성희 편혜영(이상 소설가) 류보선 서영채 정홍수 진정석 신수정 김영찬 손정수(이상 평론가)씨를 비롯한 문우들과 학교 후배인 오철우(<한겨레> 기자)씨 등 5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삶과 문학을 되새겼다. 진정석씨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행사에서는 후배 소설가 전성태 천운영 윤성희씨가 김소진 소설의 일부를 낭독했으며, 김정환씨가 추모시를 읽은 데 이어 추모문집 <소진의 기억>을 무덤 옆에 묻는 의식이 진행됐다.

먼저 낭독에 나선 전성태씨는 “김소진 선배님이 암 투병 중이라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갔지만, 병실엔 들어가지 못하고 열린 문 틈으로 무릎과 종아리 언저리만 살짝 보고 나온 뒤 몇 시간 만에 부음을 들었다”면서 “살아 계셨다면 글 쓰는 동료로서 서로 외롭지 않았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전성태씨가 <고아떤 뼁덕어멈> 중 주인공이 아버지의 화대를 대신 지불하는 대목을 낭독하고 나자 진정석씨는 “김소진과 전성태씨는 여러 모로 상통하는 소설 세계를 지니고 있는 작가라서 소진이 살아 있었다면 두 사람이 잘 어울렸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낭독자인 천운영씨는 자신이 습작기에 처음 썼던 작품 ‘쥐덫’과 김소진의 등단작 <쥐잡기>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소진의 기억>에도 실린 이 이야기를 소개한 데 이어 그는 “<쥐잡기>를 읽고서 거기 쓰인 순우리말과 토속어 어휘에 자극 받아 당장 헌책방으로 달려가 두툼한 국어대사전을 사 왔던 기억이 난다”며 “그때 읽었던 김소진의 책을 다시 펼쳐 보니 당시 내가 몰랐던 단어들에 밑줄이 쳐져 있고, 내가 특히 좋아했던 부분에는 네모 표시가 되어 있다”면서 <쥐잡기> 중 자신이 네모 표시를 했던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윤성희씨가 낭독에 나섰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의 마지막 부분을 읽운 그는 “주인공이 재개발을 앞둔 산동네 빈집에 들어가 똥을 누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나도 소설을 쓸 때면 꼭 똥을 누는 장면을 포함시키곤 했다”고 소개했다.

추모문집 <소진의 기억>을 무덤 곁에 묻는 것으로 공식 추모 행사를 마무리한 일행은 무덤 주변에 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고인을 추억했다. 추모 문집과 추모식 행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친구 정홍수씨는 “소풍 치고는 너무도 좋은 소풍”이라며 “매번 올 때마다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게 아무래도 무덤 속 소진이가 힘을 써 주는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4. 22.

P.S. 개인적으로 나도 먼저 보낸 친구가 있어서 해마다 5월이면 그를 추모하는 조촐한 학술발표회의 발표를 맡곤 한다. 올해는 그가 좋아했던 작가 안톤 체홉과 레이몬드 카버의 마지막 단편들에 대해 몇 마디 늘어놓을 참이다. 그렇다고 그런 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다. 아래에서 한 친구의 시한부 삶을 되새김질하는 칼럼의 제목처럼 '오늘에 살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할 밖에. 충실? 우리가 실천하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의 이름... 

씨네21(07. 03. 1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오늘에 살라

내가 그를 처음 안 건 대학 시절 교련 수업 때였다. 학과가 달라 평소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았지만, 교련 수업은 단과대학별로 수강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그를 봤다. 자주 얼굴을 부딪치다 보니 졸업할 때쯤에는 인사말 건네는 정도의 사이가 됐다. 졸업을 하고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을 하고 출입처에 나갔는데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된 그를 또 만났다. 그렇게 5년 정도를 같은 출입처를 나갔다. 입사 10년이 지나 내가 사표를 내고 모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만나자고 해서 다시 만났다. 당시 그는 경찰출입기자들의 우두머리인 시경캡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대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 그는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한 학기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기자직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건 딱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대단한 사회적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현재의 자리보다 조금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글쓰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를 위해 그는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십수년간 열심히 쌓아온 기자 경력을 버렸고, 물려받은 유산없이 월급으로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썼으며, 공부하는 내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웠다. 덕분에 5년 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얼마 뒤 한 명문대학에 교수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은 재임용을 위해 논문 집필과 강의준비에 매진했다. 지난해 가을 그는 재임용을 통과했다. 그 무렵 오랜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했다. 좀더 안정적인 자리를 위해 불안과 싸우며 7, 8년을 보낸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 나와 공동연구를 하던 그는 잦은 두통과 언어장애를 호소했다. 병원진단 결과는 뇌종양 말기였다. 치료를 위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동안 자신을 돌볼 틈이 없어 보험도 들어놓은 게 없었다. 늦게 낳은 아들은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꿈꿨던 안정을 누리는가 싶은 순간에 그는 생애 가장 불안한 상황 속으로 미끄러졌다.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불과 두어달 사이에 그가 겪은 지옥 같은 마음의 풍경을 내가 다 헤아릴 순 없다.

종종 그는 억울했해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했다. 더러는 안정을 위해 매진한 자신의 삶을 회한어린 눈길로 쳐다보기도 했다. 병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투병의지를 불태우는가 하면 이내 더불어 가야 할 친구로 생각하고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 있던 시선을 거두어 자기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가 한창 진행될 때쯤이었다. 그는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공기 좋은 조용한 시골에 들어가 마음을 다스리며 지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노후를 위해 저축과 연금을 들고, 투병을 위해 암보험을 들고, 더 안정적 직장을 위해 대학원에 등록하고, 자녀의 안락한 삶을 위해 교육에 조기 투자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위해 자신의 노동생산성을 쥐어짜야 하고,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음주와 흡연을 하고, 피로를 씻기 위해 헬스클럽에 등록해야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주변의 인간관계가 도구적으로 되고, 소통없는 내면은 황폐해지고, 정서적 충족을 위해 불륜까지 몽상하고… 그리하여 다시 회귀하는 불안을 잊기 위해 지속적으로 안정의 고지를 향해 전진하는 이 단성생식의 삶. 2007년 한국사회의 중년, 누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불안을 잊기 위해 안정의 고지를 구축하는 데 매진하는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안정의 고지는 다가가면 멀어지는 신기루이며, 부재의 대상은 욕망할수록 불안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을 극복하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아직은 잘 모른다. 아마도 나눔이 아닐까 하는 심증은 간다. 불안이 내가 가진 것 혹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상실의 공포에서 비롯된다니, 본인이 먼저 나눠주면 상실의 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릴 테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형식논리를 우리는 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남재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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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4-2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책만 사두고 언제쯤 읽을는지...

작은앵초꽃 2007-04-2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10년이 되었군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7-04-2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이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