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의 제6장을 읽는 것이 이번달 '사회적 독서'의 한 가지 목표량이었다. 어느새 마지작 한 주를 남겨놓고 있어서 부랴부랴 책을 들고 10여쪽을 읽었다. 공부란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읽은 내용에 대해서 말하고 쓰는 노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런 의미의 '정리'를 해가면서 진도를 뺄 생각이다. 더디 갈 수 있고, 가다 못갈 수도 있지만 가는 만큼은 확실하게 다져두는 게 또한 공부법이다. 적어도 '이론서'로 분류될 수 있는 책들의 경우에는(문제는 이렇게 정리해두어야 하는 책들이 책상에 쌓여 있다는 것이지만).

   

 

 

 

지젝의 원서 자체는 지난 1993년에 나왔으니 어느덧 14년이 되었다. 보통 이론서들의 운명이 1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게 통념이고 보면 아직은 '살아있는 이론(live theory)'이라 할 만하다. 원서 자체는 듀크대학의 '탈-동시대적 개입(Post-Contemporary Intervention)' 시리즈의 한권으로 나왔고, 이 시리즈의 편집자가 스탠리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제임슨이야 다 아는 이론가/비평가이지만 밀튼 연구의 대가로서 한때 문학비평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스탠리 피쉬의 국내 수용은 지나가던 바람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문학연구와 정치적 변화>(동인, 2001)란 얇은 책 한권으로 면피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수사학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니까 자칭 '반정초주의자(anti-foundationalist)'인 피쉬도 뒤늦은 바람을 타게 될 지 모를 일이지만.

거기에 비하면 슬라보예 지젝은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여 현재까지도 전세계 지식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지각운동이다. 발칸반도를 그 진앙지로 갖고 있지만 이 지각운동의 여파는 세계 곳곳에 미치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해만 해도 지젝이란 타이틀을 내건 책이 3-4종은 더 나올 듯싶고, 이러한 사정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하니, 지젝의 얘기가 남의 나라 지진 얘기 같지 않다면 부지런히 읽어두어야겠다.

"서유럽은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에 왜 그토록 매료되었는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제6장 서두에서 지젝이 던지는 질문이다. "대답은 분명해 보인다. 서유럽의 응시를 매료한 것은 민주주의의 재창안이었다."(385쪽) 무슨 말인가? 서유럽에서는 갈수록 쇠퇴와 위기의 징후를 보여주는 민주주의가 동유럽에서는 아주 새롭고 진기한 것으로 재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즉, "서유럽은 동유럽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원들을, 자신의 잃어버린 '민주주의적 창안'의 기원적 경험을 찾고 있다." ('민주주의적 창안(democratic invention)'은 '민주주의의 창안'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게 편하겠다.) 그런 점에서 "동유럽은 서유럽에게 자아-이상(Ego-Ideal)으로서 기능한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시점으로서 기능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 동유럽에서 출현하고 있는 현실은 서로 간에 매혹된 그 두 응시에 대한 이와 같은 목가적 그림의 어지러운 왜곡이다. 외국인 혐오에서 반유대주의까지 그 일체의 통상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협조적 민족 포퓰리즘의 성장에 직면한, 자유민주주의적 경향의 점진적 후퇴. 이 예기치 않은 전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동일화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재고해야 한다."(386쪽)

하지만, 서유럽의 기대와는 다르게 동유럽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서로에게 매혹의 시선을 보내는 '목가적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건 "외국인 혐오에서 반유대주의까지 그 일체의 통상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협조적 민족 포퓰리즘의 성장에 직면한, 자유민주주의적 경향의 점진적 후퇴."이다. 원문으로는 "the gradual retreat of the liberal-democratic tendency in the face of the growth of corporate national populism which includes all its usual elements, from xenophobia to anti-semitism."(201쪽)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적 경향의 점진적 후퇴"는 서유럽의 상황이고, 이와 대조되는 것이 동유럽의 "협조적 민족 포퓰리즘"이다. 한데, 여기서 'corporate'은 '협조적'이란 뜻보다는 '조합국가(corporate state)'란 용례에 미루어 '조합적'이라고 옮기는 게 타당하지 않나 싶다. 정치학에서 쓰는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조합국가란 "(이탈리아 파시즘에서처럼) 산업-경제 부문의 전조합이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가"를 뜻한다. 다른 동유럽 국가의 사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최근에 출간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를 참조해볼 수 있겠다),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하에 민영화했던 기간 기업들을 실질적으로 다시 국유화한 러시아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할 듯싶다.

지젝이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원론적인' 정신분석적 설명이다. 미리 압축해서 말하자면, 정신분석적 이해의 대전제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 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386쪽)는 것이다.

여기서 미리 이해되어야 될 중요한 개념은 '사물'인데, 같은 페이지의 각주1)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라캉의 세미나 제7권 <정신분석의 윤리>를 참조하라고 돼 있지만 국역본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다(혹 앞부분에서 역주로 자세히 풀어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Das Ding'의 번역어로서의 'the Thing'의 번역이므로(흔히 'the Freudian Thing'이라 부른다) 우리말로도 그냥 '사물'이라고 옮기는 것은 뭔가 부족해보인다. 사물이라고 강조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사물은 타자(Other) 안에 있는 의미화되지 않고, 의미화될 수도 없는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후기의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라캉의 재탄생>(창비, 2002)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라캉은 프로이트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려 주체에게 완전한 충족을 준다고 간주되는, 하지만 영원히 상실된 이 대상(어머니의 육체)을 사물(Ding, chose)이라고 부른다."(86쪽)

인용에서 '간주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후적인 투사효과에 의해서 구축되는 것임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지젝이  더 자세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하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제로서의 '향유의 도둑질(Theft of Enjoyment)', 향유(향락)를 '그들'에게 도둑맞았다는 의식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본의아니게 말이 길어질 듯하다. 고작 두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을 읽었을 따름이지만 밀린 일들에 치어 '작전상' 후퇴하도록 한다...

07.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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