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뜬금없는 제목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한 출판동향 기사의 제목이다. '국내 출판계 슬라보예 지젝에 반하다'. 부제대로 '슬로베니아 출신 세계적인 정신분석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이 국내에 잇따라 번역/소개되고 있고 있다는(아마 올해도 서너 권이 더 출간될 듯하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기사이지만 '자료'로 보관해놓는다.

세계일보(07. 03. 10) 국내 출판계 슬라보예 지젝에 반하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58·사진). 철학이나 사상사 혹은 정신분석학 등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분명 낯선 이름인 지젝이 한국 지성계를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동유럽 조그마한 나라 출신으로 세기를 넘기며 전 세계 철학·사상사 판도를 뒤흔드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결코 쉽지 않은 그의 저작들이 잇따라 번역되고 출판되고 읽히고 연구되는가. 1995년 ‘삐딱하게 보기’(김소연·유재희 옮김, 시각과언어)와 97년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주은우 옮김, 한나래)가 선보인 이후 한국 출판계에 불어닥친 ‘지젝 현상’의 베일을 벗겨본다.

49년 슬로베니아(옛 유고연방)에서 태어난 지젝은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현재 모교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뉴욕, 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다)를 오가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유럽 학자들로부터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그의 이론·사상적 토대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 철학,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유 전통이다.

 

영화 등 대중문화론은 물론 미학, 정치 이론 등을 자유자재로 결합하면서 성과물을 양산하는 그는 80년대 류블랴나에서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취임한 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했다(*학회라고는 하지만 처음 회원은 믈라덴 돌라르와 지젝 두 사람이었고, 연장자인 지젝이 회장을 맡았다).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90년엔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하고 몰락을 목도한 것도 지젝에겐 소중한 지적 체험이었다.

2003년엔 한국철학회 초청으로 방한해 6회나 강연하며 국내 철학도들을 흥분시켰고, 올해엔 청소년잡지 ‘인디고잉’에 무료 기고문을 보내 화제가 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지젝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21세기형 사상가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소소한 대중문화와 정치 현상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방식의 사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삐딱하기 보기’의 번역자 김소연씨는 “그가 종횡무진 접어드는 길목에는 현실, 욕망, 무의식, 환상, 쾌락, 이데올로기, 포스트모더니티, 형식적 민주주의와 관료적 사회주의 등이 망라돼 있다”며 “지젝을 따라 그 길목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발상의 전환’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때론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논리의 비약’으로 직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젝 소개에 앞장선 출판사는 인간사랑(대표 여국동)과 도서출판 b(대표 조기조). 인간사랑은 2001년 ‘향락의 전이’(이만우 옮김)를 필두로 2002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의 대상’(이수련 옮김), ‘환상의 돌림병’(김종주 옮김), 2003년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김종주 옮김), 2004년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김재영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박정수 옮김)를 펴냈다(*반타작이다. 읽을 만한 번역과 그렇지 못한 번역이).

2004년부터 슬로베니아학파 총서 번역 작업에 뛰어든 b는 그해 ‘이라크―빌려온 항아리’(박대진 외 옮김), 2005 ‘성 관계는 없다’(공저, 이성민·조창호 옮김), ‘까다로운 주체’(이성민 옮김), 2006년 ‘신체 없는 기관’(김지훈 외 옮김), 그리고 최근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성민 옮김)을 잇달라(*잇따라) 소개했다(*b에서는 아직도 몇 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책을 읽는 속도보다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르군!). 

 

유럽 철학·사상서를 주로 소개하는 새물결(대표 홍미옥)과 길(대표 박우정)도 지젝 저서 번역 대열에 가세했다. 새물결은 2001년 지젝이 엮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김소연 옮김)을 펴낸 데 이어 이달 말 출간을 목표로 ‘전체주의가 어쨌다고?’(한보희 옮김)를 제작 중이다. 지난해 ‘혁명이 다가온다―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를 출간한 길도 올 여름께 ‘꼭두각시와 난쟁이―기독교의 전도된 핵심’(김정아 옮김)을 번역 출간한다.

이 밖에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잉여 쾌락의 시대―지젝이 본 후기산업사회’(권택영 옮김, 문예출판사, 2003), ‘진짜 눈물의 공포’(곽현자 외 옮김, 울력, 2004)도 이미 서가를 채우고 있고, 연구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토미 마이어스 지음, 이성민 옮김, 앨피, 2005)와 ‘슬라보예 지젝’(정현숙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6)도 선보였다.

너무도 많은 분야에서 너무도 박학다식한 지식을 동원해 삐딱하게 기존 지식을 마구 파헤치는 지젝은 그만큼 적도 많다. 특히 해체주의자, 푸코주의자, 페미니스트들,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은 대부분 지젝을 싫어한다. 이유는 물론 그가 스스로 라캉주의자로 선언한 데도 있지만, 지적 호기심이 부지런한 지젝이 이들 학계보다 항상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조정진 기자)

07.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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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9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지젝 책 중 반절 정도는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반절 정도나 이해했나 모르겠네요. 사실 저도 지젝을 '이해'하는데 큰 노력을 쏟아보지 못해서.. 그렇게 매력적인지 아직은 의문부호입니다. 물론 '지젝'만으로 하는 수업을 한학기 들은 적이 있었기는 했는데... 그것도 벌써 2년 전이네요. ^^;

로쟈 2007-03-10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철학자도 많습니다. 사유는 어떤 자력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끌리는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죠...

jouissance 2007-03-10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로쟈는 왜 지젝에 매혹되었는가" 라는 페이퍼가 뜰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쟈 2007-03-10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경우도 그렇지만, 지젝의 모든 글이 저에겐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거면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요?^^

sommer 2007-03-1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샌 지젝과 초기(60년대의)의 하버마스와의 근친성-과감한 논리적 도약/비약-이 흥미롭게 보이던데요.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보다 지젝이 오히려 데리다적이고 하버마스적일 수 있다는 묘한 생각까지 듭니다.

로쟈 2007-03-1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류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파고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주의자'들은 좀 게으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