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 마시면서 뉴스기사들을 둘러보다가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의 한국문단 현실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어른들의 잔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문학의 현실을 보는 한 가지 시각으로 스크랩해놓는다. 돌이켜보니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한길사, 1986), <한국현대문학사상사>(한길사, 1988) 등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40대 후반의 '중견' 평론가였지만 어느덧 '백미'의 원로 비평가가 되었다. 세월무상. 한데, 그간에 한국문학은 과연 전진해온 것일까? 원로 비평가와 공유하게 되는 물음이고 문제의식이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자료삼아 옮겨오는 김에 민족문학연구소에 떼놓을 수 없는, 임종국 선생과 그 평전에 관한 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 세로읽기 <친일문학론>은 오래전에 구입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꽂혀 있는지 행방을 알지 못하겠다(아무래도 지방에 있는 듯하다).

오마이뉴스(07. 02. 24) 임헌영 "공지영은 한국 장편소설의 마지노선"
"우리나라에 장편 없다고 상 만들고 하는데, 상금 아무리 올려도 좋은 장편 안 나온다. 우리나라는 이미 장편의 시대는 갔다. 작가들이 장편 쓸 능력이 없다. 공지영이 최후 마지노선이다. 그 연배나 후배들 장편을 보면 수필집이다. 서사구조가 없다. 역사가 서사구조의 기본골격인데, 역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지방이든 세계든 역사가 없다."
지난 22일 기초예술연대(위원장 김지숙ㆍ방현석)가 마련한 '한국사회와 문화예술의 미래' 심포지엄 현장. 이날 두번째 발표자로 나선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씨는 주최 측에서 미리 배포한 자료집의 발표문과는 달리 한국문단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그에게 예정된 주제는 '변화하는 세계, 문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료집에는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고, 그에 대한 정책 지원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현장의 발표 내용은 사뭇 달랐다.
그는 먼저 "발표문에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적었지만 난 '문화의 세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세기"이고 그 뒤를 이은 "21세기는 문화에 의한 정복의 세기로 이는 세계화와 똑같은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다운 문화를 만들어 오히려 그 같은 문화 정복에 대해 역공할 때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미학의 가치기준이 없어졌다"면서 "윤동주 서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친일파를 옹호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렇기에 "예술적 안목이 굉장히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초등학교 교사들부터 어떤 게 진짜 아름다운 것인지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여정부 실패의 상당 부분은 문화예술이 책임져야 한다고 본다"고도 말했다. "조중동의 논리가 국민들에게 먹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문화예술인)가 국민에게 올바른 미의식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민예총 예총 문화연대 회원들 모두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최근 '민족문학' 명칭 논란과 관련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작가회의는 '민족'자 떼고 안 떼고 논의할 필요도 없다. 이미 비민족적인 집단이다. 민족문학이란 흔적도 없어지고 형해만 남았다." 그는 심지어 "변화된 시대에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여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전혀 없이 예산 따내서 행사나 하는 단체로 전락했다"면서 "내가 문화부장관이라면 그런 단체에 돈 안 주겠다"고까지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희망"이라는 단서를 달아 "문학이 모든 문화예술의 기본이며, 그 중핵은 문학적 상상력이다"면서 문학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은 "작가들이 창의력과 문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그에 따라 "문학의 헤게모니를 다른 장르에 빼앗겼다"고 평가했다. 그는 "80년대 중반부터는 문학이 드라마에도 뒤지기 시작했다"면서 "<모래시계> 드라마만큼 문학에서 광주항쟁을 대중적으로 감동적으로 쓴 작품을 못 봤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광주항쟁 다룬 작품이) 몇 편 있지만 읽어보면 재미가 없어서 몸살이 난다. 그런데도 평론가들은 좋다고 줄을 섰다. 그러면서 '장사 안 된다, 독자 없다'고 하소연한다. 누가 독자 없게 만들었나. 소설가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특히 문학에서 서사구조가 없어지면서 좋은 장편소설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지영을 '장편의 최후 마지노선'으로 평가했다. "공지영은 인문학적 지식도 있고, 역사를 보는 눈도 있고, 격랑을 겪기도" 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또 "공지영의 소설은 십대부터 팔십대까지 다 읽을 수" 있는데, 지금 나오는 소설들 가운데는 평론가들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운 소설이 많다고 비판했다.
"보편성을 잃어버린 것은 문학이 아니다. 비문학인도 읽는 문학이 진짜 문학이다. 조정래 소설이 왜 많이 팔리는가? 비문학인도 읽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다. 문학인 중에서는 아예 30대 넘으면 내 소설 못 읽는다 이렇게 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는 그 같은 경계를 허물고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또한 다시 문학적 상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작가들이 "만날 술집에 앉아서 술이나 먹고" 그럴 것이 아니라, "현장을 뛰든지 취재를 하든지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 대학로 중앙대 공연영상예술원에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이밖에 김지하 시인이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그리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인문사회과학부)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 그리고 예수의 역할',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시각예술의 가치와 미래'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천호영 기자)

북데일리(06. 11. 21) 임종국, 친일연구 앞장선 `거리의 약장수`
거머리가 무서워 모심기도 못하는 겁쟁이, 프로연주자 못지 않은 기타와 첼로 연주실력, 여동생들과 아내에 대한 못된 손찌검, 첫 아내와 두번의 이혼과 재혼, 거리의 약장수에 화장품 외판원까지...
얼핏보면 나약하고 생활력 없는데다 모난 성격에 소심남의 전형이며, 재력만 충분했다면 한량기질 넘치는 난봉꾼이라 짐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평생 살아가면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친일연구가 故 임종국(林鍾國. 1929.10.26~1989.11.12). 해방 60돌을 맞은 오늘, 일제 잔재와 친일파 청산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 치고 있는 무관심과 외면의 현실 속에서 그의 그림자는 깊고 진하다.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이 선생의 타계 16주기를 맞아 최근 펴낸 인물평론 <임종국 평전>(시대의창)은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가진 학자적 면모 외에도 생전에 고인이 `저질렀고` `후회했던` 인간적인 삶에 대해 진솔하게 공개한다.
저자는 "무거운 `위인전`이기 보다는 읽기 편하고 재밌는 내용을 추구하기로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백점짜리 남편, 만점짜리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임종국의 일생은 그의 친일연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없이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젊은 시절 해사했던 외모의 임종국이 얼굴에 `무서운` 흉터를 갖게 된 사연은 불완전하고 배고프지만 열정과 신심(信心)을 가진 재야학자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시인 신경림에 따르면 60년대초 어느날, 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단골다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한 임종국이 대뜸 `글 안쓰고 술만 마시는 문인놈들은 모조리 숙청시켜야 한다`며 머리로 유리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고.

불세출의 낭만시인 이상(李箱)과 닮은 자신을 발견하고 시인을 꿈꾸며 <이상전집>까지 출간했던 임종국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문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친일파 실상에 충격을 받고 문학도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친일연구에 혼신을 바친 그가 1966년 첫 출간한 <친일문학론>은 일본 천황과 일제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았던 친일파의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기록한 최초의 친일연구서로서 국내외 친일 연구의 반석이 된 역작이 됐다.
식민지시대 매국매족 인물들과 그 후손들이 정관재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 철저히 외면받던 임종국의 연구는 그가 지병인 폐기종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구르는 바윗돌처럼 쉼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임종국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고 나자, 그의 유지와 업적을 받든 후대에 의해 일제 청산을 위한 법이 마련되고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을 통해 외롭고 고독했던 친일연구는 국가적인 과업이 됐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오늘날 문제삼아야 할 쟁점은 친일파 청산 그 자체에 못지 않게 오히려 친일파 청산 반대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라며 "친일행위 옹호론의 차세대로의 전이는 독재와 분단고착화, 침략전쟁, 쿠데타 등 반역사적인 행태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으로 논리적 귀착점이 닿는다"는 추천사를 통해 임종국의 삶과 업적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노수진 기자)
07. 0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