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경향신문의 북리뷰를 읽다가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 눈길이 머물렀다. 출판관계자를 통해서 이 책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는 진작부터 듣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동아시아 사상'은커녕 일본 근대사상에도 눈이 밝지 못하다. 마루야마 등의 이름을 일본의 근대사상가로 주워섬기는 것이니 아직 초급의 초식밖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과문한 것도 아니어서 국내 출간된 다케우치의 책은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 그리고 <루쉰>(문학과지성사, 2003)이 전부인 듯싶다(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다케우치는 루쉰 연구자 다케우치였다). 전자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출간 사실도 이번에 알았고 <루쉰>은 내가 산 책인 듯도 싶지만 기억의 공백 때문인지 감이 없다. 여하튼 '다케우치 유시미라는 물음' 자체가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지는 리뷰나 읽으면서 알게 됐다. 한데, 경향신문의 리뷰는 기본사항들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연이은 의문부호'들을 나열하고 있기에 좀 불친절하다. 지난주 서울시문의 리뷰를 먼저 읽어봐야 문맥이 잡힌다. '동아시아 저항사상의 계보'라는 문맥. 

 

서울신문(07. 02. 10)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지난해 국내에서 ‘근대 논쟁’ ‘해방전후사 논쟁’이 뜨겁게 불어닥치는 등 요즘 동아시아에서는 ‘탈근대’가 화두이다. 침략, 이식의 형태로 유입된 근대는 아시아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사상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진보주의와 동양의 민족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근대’를 사유한 일본의 비평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1910∼1977)의 사상은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유럽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일본의 근대를 강력히 비판한 사상가로 유명하다.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근대화를 이루고, 자신을 유럽과 동일시하면서 근대화의 과정을 겪은 일본의 근대는 기본적으로 ‘저항’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일본은 어떤 저항이나 반성도 없는 패전을 경험했다는 게 다케우치의 생각이다. 일본의 패전 당시 중국에 있었던 다케우치는 일본군의 무저항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일제히 통곡했다. 그리곤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눈을 뜨고 나서 그들은 일제히 귀국준비를 위해 몸단장을 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한 다케우치는 루신(魯迅·1881∼1936)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루쉰 전문가이다. 최초의 저작이 1943년 발간한 ‘루쉰’이었고,65년 평론가 폐업을 선언한 이후 죽을 때까지 루쉰의 글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평생 루쉰을 사상의 ‘참조점’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당대 일본내의 중국 및 중국문학 연구가 한학 중심이었던 것에 비춰볼 때 엄청난 차이점이었다.

이런 그가 루쉰을 통해 길어낸 사상은 ‘쩡자’ 다.‘쩡자’는 ‘저항’이라는 말로 옮길 수 있지만 ‘자기임과 자기이외임을 모두 거부하는’ 이중의 거부로 보인다.“아시아의 사상 자원은 겉으로 보기에 유럽에 대항하는 모습을 취하겠지만 반드시 ‘반유럽적’이지도 않다.”라는 다케우치의 말은 바로 이 ‘쩡자’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쑨거(孫歌·52)는 10년 이상 이런 다케우치의 사상에 매달렸다.‘루쉰-다케우치 요시미-쑨거’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저항’사상의 계보가 엮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재작년 일본어와 중국어로 펴낸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쑨거 지음, 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은 다케우치 사상, 루쉰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듯하다.(박홍환 기자)

경향신문(07. 02. 17) ‘타자’로 자기해체, ‘주체’로 자기재건

다케우치 요시미를 대면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신원 증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속 기관이 발부한 증명서를 가지고 가도, 관공서가 인증한 등본 서류를 제출해도, 다케우치의 반응은 싸늘하다. 쓰라린 비웃음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무언의 눈빛으로 다케우치는 계속 추궁한다.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어찌 너의 주체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 어떤 외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네 자신만으로 너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실질적인 증명 가능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물음을 자신의 물음으로 끌어안을 때 당면하게 되는 일련의 또다른 질문들. 지금껏 자명성과 안정성을 자신에게 부여해 준 근거들을 향하는 연이은 의문 부호.

다케우치가 평생 씨름하며 고투한 ‘주체’의 문제는 ‘주체와 세계’ 혹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객관성-관찰 가능성 등의 이름으로 주체와 대상 혹은 타자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면, 주체에게는 안정적 근거가 마련된다. 이 안정성이 주체의 주체성과 활동성을 보장해 주지만, 그 대가로 주체는 세계-대상에서 이탈하고 분리된다. 세계-속에 존재하는 주체가 세계의 전체상을 가질 수는 없다. 지구를 보려면 지구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은 이미 세계의 전체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주체가 인지 가능한 방식으로 추상화하고 조작한 결과일 터이다. 통계 수치나 계량적 측정이 대표적인 수단이겠다. 주가 지수가 경제 상황의 전체상을 대신하고, 통계 수치가 현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주체의 자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단적으로 이른바 국가의 정책이 시행되는 자리는 늘 여기이다. 국민의 대상화가 불가피하므로, 어떤 국가-정부도 국민의 의지와 수렴될 수는 없다.

다케우치 식으로 추궁하자면,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뼈아픈 자각을 전제로 할 때, 국가의 정책은 어떤 의의가 있고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지식은 그것을 부정하는 계기 없이는 지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인문학이 정말 위기라면, 정말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에 자기 부정의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세계를 관찰하지 않고 대상-타자와 더불어 세계 속에 내재해 있다면, 세계가 움직이는 한 주체는 늘 유동상태에 놓인다. 여기서 안정적인 실체성은 존립하기 어렵다. 제도화된 개념이나 객관적인 지식도 분명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그렇지만 주체-세계의 유동 속에서 이러한 실체성은 늘 부정될 운명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배반당하지 않는다.

주체의 부단한 자기 갱신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 해체를 진행하면서도 타자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재건하는 길. 이 길은 바로 “타자를 타자로서의 자족성에서 해방하는 동시에, 자기를 자족적 배타성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부단한 과정이다.” 다케우치를 대면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잠 들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달콤한 유혹과 자기 변명은 이미 수없이 유포되어 있지 않은가.

지난 20년 간 개혁 개방 시기 중국의 내적 혼란과 지식계의 변동을 몸으로 겪으면서, 바로 이 문제를 자신의 신체감각으로 예민하게 파악한 지식인이 이 책의 저자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케우치는 평가를 기다리는 역사상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당대 중국 및 아시아 지식인으로서 저자가 직면한 문제들을 대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질문법’에 가깝다.

다케우치의 명성은 무척 오래지만, 아무도 그 일을 선뜻 맡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당연히 다케우치 자신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장 중문학자인 서광덕, 백지운 두 분에 이어, 젊은 패기의 윤여일씨가 고된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기억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제목처럼, “다케우치 요시미” 자체를 “물음”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너무도 절실하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루쉰이 그러했고, 저자 쑨거에게 다케우치 요시미가 그러했듯이.(류준필|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07. 02. 18.

P.S. 국역본에는 중국어판과 일본어판, 그리고 한국어판 저자 서문이 모두 붙어 있다. 그건 한국어판이 맨마지막에 나왔다는 뜻도 된다. 이미지는 일본어판(2005)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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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7-02-18 15:26   좋아요 0 | URL
좋은 글 퍼갑니다. 늘 신세를 지고 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7-02-18 17:31   좋아요 0 | URL
제 편의를 위해서 정리해놓는 것인데 도움이 되신다면 다행입니다. 앨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베토벤 2007-02-19 12:04   좋아요 0 | URL
앞으로도 로쟈님이 '편의'를 계속 추구하셨으면 합니다. 저도 맘속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듯 하여서요. ^^;

로쟈 2007-02-19 18:58   좋아요 0 | URL
그러다가 '편의주의자'가 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