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길에 전철에서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읽었는데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은 의외로 로빈 베이커의 <정자전쟁>(이학사, 2007)이다. 예전에 <정자전쟁>(까치글방, 1997)으로 처음 소개된 바 있고(이전에 한번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이 책의 재판이 나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이번에 나온 건 개정판 원저의 번역이다. 국역본 분량으론 398쪽에서 405쪽으로 거의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크게 보태진 내용은 없어 보이지만(신간은 2006년 증보판의 번역임에도 알라딘에는 1996년판이 원저로 기재돼 있다. 설마 출판사의 실수일까?). 어쨌든 같은 역자가 수고했고, 대신 출판사는 바뀌었다. 기억엔 재미에 비해서 그다지 팔리는 책이 아니었는데, 증보판 번역은 어떤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표지 이미지만을 놓고 보자면 이제나그제나 유치하긴 마찬가지지만. 제목도 '스펌워즈'가 낫지 않았을까? <정자전쟁>을 전철에서 읽을 수 있나?)...

문화일보(07. 02. 16) 불륜·자위 행위도 ‘정자 전쟁’의 전술

“여자와 그 애인이 바닥에 쓰러져서 삽입을 시작하기 직전이다. 여자의 몸은 이미 정자를 보유하고 있다. 여자의 남편이 앞선 주말에 둘의 주기적 성교 동안 통틀어 6억 마리의 정자를 주입했다. 대부분은 다양한 분출물을 통해 방출됐지만, 그렇다고 해도 얼마간은 아직 그녀의 몸 속에 남아 있다.(중략) 여자의 애인은 삽입 행위를 몇 번 하지도 않고 여자의 질 안에 자신의 정액고를 비축했다. 여자의 자궁경부는 정액고에 잠겨서 그대로 머물러 있고 남자의 전위부대는 자궁경부 점액 경로로 물결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군대는 약 5억 마리의 정자잡이(killer sperm)와 약 100만 마리의 난자잡이(egg getter), 약 1억 마리의 방패막이(blocker)로 이뤄져 있다. (중략) 누구 편이 먼저든, 어느 한쪽의 정자잡이가 상대의 정자와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 바로 전쟁 경보가 내려진다. 한 시간 가량은 적진의 정자를 가급적 많이 찾아내기 위해 쌍방의 정자 모두가 평상시보다 빠른 속도로 헤엄친다. 목표는 머리에 쓴 모자 속의 치명적인 혼합물질로 상대방의 난자잡이와 정자잡이한테 독을 놓는 것이다.… 정자잡이가 적군의 정자를 발견하면 자신의 치명적인 머리 끝으로 상대의 허약한 옆구리를 찔러서 부식성 독을 바른다. 몇 차례 찌르고 난 뒤에는 상대 정자가 죽도록 내버려두고 계속 전진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책의 핵심을 담고 있는 대목이다.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기 위한 과정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특히 경쟁자(다른 남자의 정자)와 싸워야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부대와 무기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전략과 전술을 적절히 운용해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정자잡이와 난자잡이, 방패막이로 이뤄진 부대는 각각의 사명을 띠고 여자의 몸 속에서 대오를 지어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를 촉발시킨 이는 여자 자신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본능적으로 경쟁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책은 남자와 여자의 섹스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들을 철저하게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남녀의 불륜과 자위 행위, 오르가슴과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온갖 성적 행동과 심리상태를 생물학적 동기로 분석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최상의 조건을 지닌 유전자와 결합시켜 되도록 많은 후손에게 이어지게 하려는 종족보존의 본능에 따라 인간의 모든 성적 행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의 부정 행위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이득을 안겨줄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남자의 경우, 배우자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유전자를 더욱 많이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최상의 유전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배우자가 알아차릴 경우 외도로 인한 손실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요는, 외도를 행하는 것이 이득이 될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한 자들이 종족보존에 보다 높은 성공률을 보인다.
 


저자의 이 같은 견해는 결코 불륜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오로지 종족보존의 차원에서 인간의 ‘몸’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진화생물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저자는 심지어 “상황을 오판해서 정숙해야 할 때 부정을 저지르고 부정을 행하는 것이 나을 때 정절을 지키는 것 역시 실수”라며 “대 잇기 게임에서 최선은 정확하게 판단하고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사회에서 수치스러운 짓으로 비난받는 자위 행위는 왜 은밀하게 이뤄지는 것일까. 어떻게 자위 행위가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남자의 자위 행위는 정액을 그냥 방출해버리는 무용한 짓에 불과한 게 아닐까. 저자는 “남자의 몸은 자위 행위와 성교를 구별할 줄 안다. 각각의 사정 물질은 동일하지 않다”며 “남자가 자위 행위를 할 때에는 지난번 사정을 한 이래로 (생산된) 시간당 약 500만 마리의 정자를 내보낸다. 이는 방패막이, 정자잡이, 난자잡이로서의 유효기간을 초과한 정자의 수치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즉, 남자가 성교를 갖는 사이사이에 자위 행위를 한다는 것은 보다 젊고, 역동적이며, 전투력 넘치는 정자를 여자의 몸 안에 주입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남자에게 최상의 정책은 일정 시점을 넘어선 늙은 정자를 자가 사정으로 스스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이 자위 행위의 기능 중 한 가지다.

책은, 일반적인 과학 저술과는 다르게, 생동감 넘치는 사례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남녀의 섹스에 얽힌 37개의 장면들은 마치 소설의 한 대목처럼 구체적이다.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까지 치밀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제시하고, 그 같은 사례에 내포돼 있는 정자(유전자) 전쟁의 이면을 들춰낸다. 부부간 주기적인 성생활뿐만 아니라 자위행위하는 여자의 모습, 외도의 현장, 집단 성교, 성폭행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성과 관련된 대부분의 양상들이 그려진다(*책의 부제가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외설적이지 않다.
 


한 사람의 생명이 탄생하는 최초의 순간을 철두철미하게 파고들고 있는 책은 과학 저술의 한계를 넘어 사회적, 심리적으로도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선 1997년 처음 번역·소개됐으나 원서 개정판이 나온 이후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해 이번에 새롭게 선보였다.(김영번 기자) 
 
0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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