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에서 펴내는 월간교양지 미르(345호)의 '시즌인문학' 꼭지에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세계를 소개하는 글을 청탁받아 실었다(편집부에서 붙인 부제는 '인간과 구원에 대한 치열한 탐구'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는 오늘부터 7일까지 도스토옙스키 원작의 '백치'를 무대에 올리고 있기도 하다. 겸사겸사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현재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미르(18년 10월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세계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뜸 그의 작품을 손에 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문학사적 의의와 현재성을 가늠해보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주목해보자.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공병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그의 아버지는 농노들에게 피살당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사건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주며 훗날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집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공직에 재직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내 창작의 길을 선택한다. 학생 시절부터 당대 러시아 작가들은 물론 유럽 문학의 젊은 대가들의 작품을 탐독해온 터였다. 여기서 '젊은 대가'는 1830년대 주요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프랑스 작가 발자크나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등이다. 이 시기는 러시아 문학이 시 중심의 낭만주의 문학에서 산문소설 중심의 사실주의 문학으로 이행해가던 과도기였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토대를 마련한 푸시킨과 고골의 산문소설이 발표된 것도 이맘때다. 도스토옙스키는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사회는 요동치며 급격하게 변화한다. 나폴레옹 제정과 왕정복고기를 목도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선 발자크는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사회가 개편돼가는 과정을 방대한 분량의 소설로 묘사한다. 새로운 문학의 표준을 제시한 셈인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세계는 그 수용과 변용으로도 이해된다. 변용이 불가피한 것은 프랑스 사회와 구별되는 러시아 사회의 특수성 때문이다. 유럽의 변방 국가로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던 러시아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시민(부르주아) 계급의 발달이 미진했다. 러시아의 잡계급이, 시민 계급이 주축을 이룬 서유럽의 제3계급에 해당한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잡계급이란 상인과 의사, 성직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출신으로 분류하면 도스토옙스키 또한 잡계급 출신의 작가다. 이러한 차이는 실제 문학 작품에도 반영된다.
도스토옙스키는 1846년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다. 가난한 중년의 하급 관리 제부시킨과 그의 먼 친척 소녀 바르바라가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된 서간체 소설인데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당대 최고의 비평가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으며 러시아 문학의 기대주가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1840년대에 유행한, 하층민의 삶에 대한 ‘생리학적 스케치’를 계승한 작품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거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심리학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그는 고골과 그의 아류 문학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데뷔작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에 고무된 도스토옙스키는 뒤이어 야심작 <분신>을 발표한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자부했지만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급 관리 골랴드킨이 자신의 분신이 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의 예고편으로도 읽힌다. 실제로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그는 <분신>의 개작본을 발표하도 했다. <분신>을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그 출발은 결과적으로 20년 가까이 지연된 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한 정치 서클에 가담해 활동한 게 문제가 돼 체포, 수감되고 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는다. 이후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떠났고, 긴 유형 생활을 마치고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10년이 흐른 뒤인 1859년 말이었다. 그는 한 살 위의 형 미하일과 잡지를 발간하고 수감과 유형 생활을 소재로 <죽음의 집의 기록>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재기한다.
1864년 자신이 주관하던 잡지에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는 문제적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도스토옙스키는 비로소 위대한 장편의 시대로 진입한다. <죄와 벌>(1866)부터 <백치>(1869), <악령>(1872), <미성년>(1875),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에 이르는 걸작을 차례로 발표한다. 러시아 문학사뿐 아니라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위대한 작가적 여정이다. 그는 2편으로 계획한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1편을 발표하고 속편은 시작하지 못한 채 1881년 눈을 감았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무엇을 탐구한 것인가. 핵심이자 출발점이 되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18세의 청년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에서 반복되는 물음이기에 가히 그의 일생을 관통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함께 주목할 만한 점은 '나'의 정체성이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나’의 존재는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나’는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면서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쟁투가 도스토옙스키 초기 문학의 주제였고, 시베리아 유형 이후 그는 이 문제를 국가적 정체성의 문제로 확장했다. ‘러시아는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러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은 유럽이라는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누구보다도 유럽의 사상과 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였다.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유럽적인 작가’이기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본격적인 첫 장편 <죄와 벌>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페테르부르크라는 근대 도시의 빈민가에서 비범한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입증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고투를 그린다. 발자크의 소설이라면 파리 사교계라는 분명한 투쟁의 상대가 주인공에게 제시되겠지만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에게는 모든 것이 모호하며 환영적이다. 가령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라스티냐크라면 비범한 존재의 의미를 사회적 출세와 비범한 부자 되기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것은 전혀 모호하지 않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는 ‘인간은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뉘며 비범인에게는 범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권리가 허용된다’는 초인사상을 궁리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상대로 도끼 살인을 감행한다. 어떤 출세, 어떤 투쟁이 가능한지 경로가 모호한 사회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과도하고 과격한 존재 증명이 시도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자수한 뒤에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라스콜니코프의 갱생 이야기를 예고한다. 그것은 서유럽의 근대를 체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소설이어야 할 터. <죄와 벌>에 뒤이은 그의 소설들은 정확히 그러한 과제에 상응한다.
작가적 여정의 두번째 기착지에 해당하는 <백치>는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극심한 창작의 고통으로 몰아넣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초고와 최종판이 완연히 다른 것은 그러한 고통의 결과다. ‘백치’의 주인공은 원래 가냐 이볼긴이었다. 몰락한 장군 집안의 차남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주변으로부터 멸시당하는 자존심 깅한 청년이었고 간질병 환자였다. 야심을 지닌 가난한 청년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가냐는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초고를 대폭 수정하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을 교체한다. 소설의 첫 장면. 치유차 수년간 스위스에서 머물다가 먼 친척뻘의 부인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미쉬킨이 바로 교체된 주인공이다.
가냐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 라스티냐크와 마찬가지로 속물적인 부르주아의 세계에서 출세를 위해 속악한 방법으로 고투하는 인물로 그려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발자크적인 이야기를 비틀고는 다른 이야기로 감싼다. 그는 투쟁을 통해 출세에 이르는 청년을 그리는 대신 정체가 불분명한 간질병 환자를 등장시켜 부르주아의 타락하고 비속한 세계를 구제하고자 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스탕달의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의 모방이자 그 극복의 형상이었다면,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은 지참금 때문에 정략결혼을 감행하려는 가냐를 물리치고 나스타샤를 구원함으로써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를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백치’의 결말은 이러한 기대와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와 돈키호테를 모델로 한 미쉬킨은 정욕의 화신인 로고진에 의해 살해된 나스타샤의 시신 앞에서 망연자실해하며 결국 더 나빠진 상태로 스위스로 돌아간다. 작가적 구상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실패다. 미쉬킨은 나스타샤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동시에 타락한 러시아를 구하는 데도 실패한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 실패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인정했다. 다만 이 실패로 말미암아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도정에 들어서는 것이기에 위대한 실패라고 불러도 좋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속이라는 유럽 가족사소설의 전형을 파괴한다. 부친 살해 테마를 정면으로 다루는 이 소설의 과제는 신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형제애(박애)로 이행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신의 죽음이라는 주제는 <백치>에서 로고진의 집에 걸려 있는 홀바인의 그림 '무덤 속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표현된 바 있다. 이 그림에서 홀바인은 성화의 관례와는 다르게 그리스도를 신성한 존재가 아닌 시신으로 그렸다. 실제로 도스토옙스키는 유럽 여행 중 스위스의 바젤미술관에서 그림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홀바인의 그림은 허무주의(무신론)의 웅변이자 허무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죽음(혹은 무능력)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거꾸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작품의 길잡이로 삼은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트리는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의 실패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 미쉬킨의 간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가장 부정적인 인물인 스메르쟈코프에게 할당된다. 미쉬킨에게는 조화와 황홀경의 체험 계기였던 간질이 이 소설에서는 범행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대신에 등장하는 것은 드미트리의 광활한 마음이다. 광활한 마음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 마음을 좀 좁히고 싶다고 말하는 드미트리는 고결한 행위와 비열한 행위가 동시에 가능한 인물이다. 이는 모든 것이 그의 선택임과 동시에 책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도스토옙스키의 구원은 그러한 자유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 자유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형제애의 조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현재성을 우리는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인류사적 이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이야말로 그러한 이념 전개에 정확히 대응하는 문학이다. 인류의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아직 동시대 작가다.
18. 1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