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작가 순 뢰에스에 관한 기사들을 읽다가 떠올린 작가는 재작년에 러시아의 한 서점에서 사인행사를 가졌던 작가 '에를렌드 루'이다(지금도 사인회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김기덕의 <빈집>을 다룬 모스크바 통신문 서두에 관련내용을 적어둔 바 있는데, 모스크바 통신을 비공개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때의 일기를 다시 불러내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2004년 12월초의 일기 한 대목이며, 뒷부분은 <빈집>에 대한 감상('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으로 이어졌었다. 아래 사진은 사인회 장소였던 '모스크바 서점'.

오후에 서점엘 다녀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집과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소설 등을 사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허탕이었다. 먼저 ‘류뱐카’역(이전에 KGB본부가 있었던 곳이다)에 있는 '비블리오 글로부스' 서점에 가서는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를 펭귄북으로 샀는데, 그 작품이 들어 있는 책으로 보아둔 러시아어본이 없었다. <셰익스피어 희극>이라는 다른 작품집들에는 <자에는 자로>가 빠져 있다(*셰익스피어 작품집은 나중에 구했다). 할 수 없이 발품을 좀 팔아서 '모스크바서점'까지 걸어갔다.

‘루뱐카’에서 이전 역인 ‘아흐트느이랴드’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린다. 그 정도 걸어가면 정면에 크레믈린이 보이고, 오른편에 볼쇼이극장이 나타난다(사진. 생각해 보니까 아직 한번도 볼쇼이 구경을 하지 않았다. 발레를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어쩌면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하도를 건너가서 볼쇼이극장의 오른편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서는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서 계속 걸어갔다. 이전에 한번 가본 길이었다. 그렇게 한 블록을 더 걸어가서 길을 건너면 모스크바예술극장(=므하트)이 있는 거리이다. 거리의 끝무렵에 있는 체홉 동상을 지나면 트베르스카야 대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틀어서 5분쯤 걸어가면 <모스크바 서점>이 있다(아마 이런 루트는 이전에 한번 소개한 듯하다).  

예정에 없이 들른 서점인데 우연찮게도 한 작가의 팬사인회가 진행중이었다. 작가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에를렌드 루(Erlend Loe). 최신작을 포함해서, 1969년생인 이 작가의 작품들 대부분이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고, 그의 두번째 작품(<나이브하게. 슈퍼>. ‘Super’가 작품에서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기에 그냥 그렇게 옮겨둔다) 같은 경우는 13개 국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까 과히 지명도를 알 만하다(*에를렌 루의 <나이브? 슈퍼!>(문학동네, 2009)로 번역됐다!).

러시아의 아즈부카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아예 문고본 클래식으로 출간하고 있는데(나도 오다가다 자주 보던 책이다), 나는 그 문고본들 중 두 권을 들고서(값이 다른 것들보다 싸서였는데, 권당 2,800원) 잠시 줄을 섰다가 ‘미래의 거장’에게서 사인을 받았다(지난번 뤽 베송 사인회만큼 붐비진 않아서 나는 5분 정도밖에 기다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는 책은 내 이름으로(For me), 그리고 그의 데뷔작인 <여자들의 권력 속에서>는 ‘마님’의 이름으로(For my wife). *아래는 당시 사인회의 빌미가 되었던 책 <쿠르트 이야기>의 러시아어판 표지.



현대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들이 국내에 직접 소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루의 소설들이 언제 우리말로 번역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럽 다른 나라에 번역되는 걸로만 봐서는 그는 노르웨이의 가장 확실한 젊은 거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10-20년 후에 노벨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아주 오랜만에 노르웨이 작가에게 주어진다면). 그러면, 내가 받은 사인본들이 꽤나 값나가는 ‘유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런 건 일단 백일몽으로 접어두고, 머리를 빡빡 밀어서 뚝심 있는 신부님이나 선량한 조폭처럼 생긴 이 작가에 대해 약간 소개하면, 그는 노르웨이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이며 이미 여러 차례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에 입문하기 전에 그는 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이건 작가로서 예외적인 건 아니다), 연극무대에 선 적도 있고, 단편영화들과 뮤직비디오 등도 찍었으며 정신병원에서도 일했고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서는 1993년, 그러니까 24살에 <여자들의 권력 속에서>로 ‘혜성같이’ 노르웨이 문단에 등장한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너무나 재미있으며 아주 능수능란하다”, “아주 강력하며 동시에 시대를 앞질러 간다. 이런 데뷔작은 노르웨이 문단에 오랫동안 없었다. 루는 모든 걸 뒤집어엎었다!” 등등으로 평했다. 그리고 낸 두번째 작품이 전유럽적인 베스트셀러가 됨과 동시에 그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는 2001년작이며, 주인공은 저널리스트이고 핀란드에 관한 얘기라고(그러니까 제목이 가리키는 나라는 ‘핀란드’이다. 핀란드는 노키아의 나라이면서,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다지 두꺼운 책들은 아니지만(각각 224, 288쪽) 내가 언제쯤 이 책들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를 읽는 일은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빨리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그게 역설적이지만, ‘책읽기의 괴로움’이다).

하여간에, 그래서 루의 책을 두 권 샀다. 그런데, 정작 지난번에 봐둔 <셰익스피어 희극>은 여기서도 다 나가고 없었고(또 들어올 거라고는 하지만), 오스트롭스키의 책도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분명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예상대로) 직원은 19세기 극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작품집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번 ‘니콜라이’라고 말하니까 그때서야 그의 책으론 나와 있는 것이 없으며 ‘고서 코너’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혹시나 싶어 아래층 고서 코너에 내려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이 역시 절반은 예상한 바이지만(지난번 고리키의 사례를 통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가 오스트롭스키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를 말하며, 그의 작품은 아직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책이다(두 종의 번역서가 있었던가?). 하지만, 러시아에는 없다! 오스트롭스키만이 아니라 과거 수십 만부씩 찍어대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은 종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파제예프니 푸르마노프니 하는 작가들 말이다. 그나마 숄로호프 정도는 노벨상 수상 작가여서인지 간간이 눈에 띈다.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그마저도 중고등학교의 필독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고요한 돈강>이 빠진다면, 러시아 학생들이 가장 지겨워할 문학작품은 <전쟁과 평화>가 될 것이다(이건 가정이다). 그런 식으로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서점에서도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다.

사실 나는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읽지 않았다(그는 보통 대학의 ‘20세기 러시아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몇 년 전 1920-30년대 러시아 문학장이란 걸 재구성하고자 기획하면서 그에게 한 꼭지를 할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기획이 엎어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에 작가의 몇 주년인가를 기념하는 기사들이 <문학신문>에 게재되면서 그를 다시금 기억하게 됐는데, 다음주 수업시간에 그 작품에서 발췌한 몇 페이지를 읽게 돼서 이 참에 책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러시아문학, 혹은 더 나아가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소설들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고리키의 <어머니>, 그리고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인조이다. 이들은 각각 당대에 가장 많이 읽혔던 작품들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섯 번이나 읽었고, 그의 정치 팜플렛에다 아예 <무엇을 할 것인가>란 제목을 붙였다(참고로 체르니셰프스키는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와 <강철>의 주인공 이름은 둘 다 ‘파벨’이다(물론 오스트롭스키가 우연히 갖다 붙인 이름은 아닐 것이다).

지난 80년대에 한국에서는 이들 작품들이 ‘과대’평가됐었다. 물론 거기엔 시대적 필연성이란 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요즘엔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건 작가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시대적 필연성인가? 과거에 나는 이 작품들의 과대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과소평가에 동의하는 것도 않는다. 역사 속에서 작가/작품엔 제 몫의 역할과 운명이 주어진다. 아니, 작가/작품은 그런 걸 짊어진다. 문제는 그런 역할/운명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지 열광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조금 다른 예로서,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대한 열광을 들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을 냉대했던 관객들이 갑작스레 ‘마니아’들로 둔갑한 것을 나는 신뢰할 수 없다. (러시아)미래파 선언문에서 인용하자면,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걷어붙이고 싶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에의 편승이 아니라 ‘반시대적 성찰’이다.

나는 사려던 책들 대신에 작년에 나온 니콜라이 1세(1825-1855)의 전기와 러시아시 각운사전을 사들고는 예의 피자전문점 스바로에 가서 이태리 피자와 맥주, 그리고 스파게티를 먹었다. 헛걸음한 걸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끼니를 때우고 되돌아가던 길에 플라톤의 <대화>나 사들고 갈까 하고 다시 서점에 들렀지만, 책은 없었다. 가장 두껍고 가장 저렴했던 플라톤 선집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나중에 구했다). 이래저래 되는 일이 없는 날이다. 루의 사인본마저 받지 못했더라면(15분 정도만 늦게 갔어도 사인회는 끝났을 터였다), 오늘은 말 그대로 공친 날이 될 뻔했다.  

서점을 나서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계산대에 홍보용으로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제목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해변의 카프카>였다(*아래는 러시아어판 표지).



아마도 하루키의 모든 책이 러시아어로 번역되는 듯한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하루키는 (스시를 제외한다면) 일본 최고의 문화상품이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한국 최고의 문화상품은 김기덕이다. 나는 들어가보지 않았지만, 어제 <빈집>을 같이 본 후배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러시아 인터넷의 김기덕 사이트는 열광적인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있다고(그들은 전문가 수준의 비평들을 계속 올린다고 한다). 아래는 <빈집>의 러시아판 DVD 타이틀.

사실 후배가 엊저녁 8시에 상영하는 <빈집>을 보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열렬한 반응에 고무되어서였는데(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나는 이미 지난주에 <올드보이>보다 <빈집>을 보려고 했으므로 기꺼이 한번 더 동행하게 되었다(영화관에서 보는 김기덕은 <파란대문>에 이어서 두번째였다). 

영화관은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예술극장'이었고, 이번엔 <올드보이> 때와는 달리 대극장이 아닌 소극장이었다. 50석 규모였는데, 새로 만들어놓은 듯싶었다. 모든 시설이 새것이었기 때문에. 화면의 크기가 (당연히) 작다는 것 말고는 만족스러웠는데, 김기덕의 영화는 대형화면을 요구하는 스펙터클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굳이 흠이 될 것도 없었다. 8시가 되자 프랑스와 오종의 신작 예고편이 나오고 나서는 바로 “Happinet Pictures”란 로고가 떴다. 그리고 시작된 영화의 첫 장면은 골프 스윙 소리와 망이 출렁이는 모습. 영화는 더빙이 아니라 자막 처리돼 있는데, 사실 알다시피 <빈집>은 대사란 것 자체가 많지 않은 영화이다. 두 주인공에 국한하자면, 거의 ‘무성영화’이니까...

04. 12. 05./ 0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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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2006-12-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아주 특이한 청춘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로쟈 2006-12-2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이한' 관점이시네요.^^

Sati 2009-08-0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트로프스키를 찾을 수가 없으셨다는 말씀 들으니, 91년도에 '우데엔' 1층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가쪽 한 구석으로 몇차 공산당 전당대회 연설집 이런 류의 브로셔들이 산처럼 쌓여서 회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많이 이상했던 기억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