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강의차 내려가는 길에 가방에 넣은 책 몇 권 중에는 시집도 들어 있다(시집은 무엇보다 가볍다). 손에 잡힌 시집이 서대경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 2012년에 나왔고 지난해에 5쇄를 찍었다. 황유원 시인과 밥 딜런의 시집(혹은 노래전집),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을 공역했다(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도 겸해서 주목하게 된 두 시인.

대부분의 시가 피리어드(.)만 찍는다면 그냥 묘사다. 카프카의 산문소품 같은(카프카는 얼마나 많은 분량의 시를 쓴 것인가!). 그게 시로서 강점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예 피리어드를 찍고 산문시나 산문세계로 진입해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런데 한편으로 시 형태로 쓰인 시들은 또 서대경스럽지 않다. 아무 시편이나 상관없지만 가령 ‘낮달‘.

당신이 웃을 때
나는 당신의 운명이 바뀌는 소리를 듣지

당신이 한순간 허공으로 존재할 때
수없이 지나가는 인파 속에서
당신의 웃음은 터져나오지

그럴 때 당신의 어깨는 유난히 작고
당신의 가방은 낮달처럼 가볍지

당신이 순간 사유를 잃고
당신이 순간 동작을 잃고
당신이 순간 음악이 될 때
당신이 홀연 가방을
공중으로 던질 때

시리도록 환한 슬픔이
하늘에 가득하지
나도 따라 가방을 던지면
어느새 당신은 없고
가방도 없지
(...)

시인의 첫시집으로 보이는데 ‘시리도록 환한 슬픔‘ 같은 표현은 습작풍이다. 독자가 ‘당신‘과 ‘나‘ 사이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시의 엔딩.

당신의 웃음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당신의 존재가 음악 속에서 지워지는 시간
당신의 환멸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당신의 웃음이
나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시간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은 ‘존재‘니 ‘환멸‘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들은 집어넣어서 시를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 시인의 진화를 엿보게 해주지만 시로서는 미흡하다. 서대경스러운 시로는 역시 아무 시편이나 상관없지만 표제시의 첫 연.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고철 더미가 깔린 비탈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사내는 담배를 물고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다 한쪽 팔이 잘려나갔는지 작업복의 빈 소매가 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사내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허공을 올려다본다 바람의 거친 궤적이 잿빛 구름을 밀어내면서 거대한 하늘 위로 새파란 대기의 띠가 몇 줄기 좁은 외길처럼 파인다 사내는 서리가 앉은 허연 머리를 허공을 향해 한껏 치켜들고서 광인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더듬더듬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단순한 이름들을, 추위로 가득한 대기의 이름들을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이런 묘사가 서대경 시의 원목 같다. 추위로 가득한 대기를 느끼고 있으므로 노르웨이산이나 시베리아산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게 어떻게 시라는 가구가 될는지는 더 두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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