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한 주의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다. 여느 때보다 두 배는 긴 것처럼 느껴지는 한 주였다(피로한 눈은 밀린 잠을 보충하면서 풀어야겠다). 그래도 빽빽한 일정 덕분에 오랜만에 김수영의 시도 다시 읽었다. 3종의 시선집으로 읽었는데, 순서대로 하면 <거대한 뿌리>(민음사), <사랑의 변주곡>(창비), <꽃잎>(민음사)이다.

내게 각별한 건 <거대한 뿌리>인데,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자작시집을 만들어서(50부 한정 등사판) 판매하고 얻은 돈으로 김춘수의 <처용>과 함께 구입했던 시집이어서다. 자작시집과 같은 가격이었고(내가 자작시집의 가격을 같게 매겼고) 아는 서점에 위탁하여 두권을 판매한 돈 3000원을 받아들고서 곧장 다른 서점에 가서 ‘오늘의 시인 총서‘ 1,2권을 손에 들었다. 바로 <거대한 뿌리>와 <처용>이었다.

그런 인연도 보태서 한국현대시사에 대한 나의 이해는 ‘김수영과 김춘수 사이‘가 되었다. 여전히 둘은 전후의 가장 강력한 두 시인으로 생각된다(또 다른 공통점은 둘다 강력한 시론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 김수영의 반시론과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이 그것이다).

<거대한 뿌리>는 시사적 의미도 갖는데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수영의 시선집으로 1974년에 처음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을 존재하게 해준 시집인 셈(전집은 그 이후에 나온다). 그런 의의를 다시 상기하면서 표제시를 읽는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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