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구판절판


5월의 어느 날, 중학교 선배인, 마이즈루 해군 사관 학교의 생도 하나가 휴가를 받아서 모교에 놀러 왔다. 그는 햇볕에 잘 탄 피부에, 깊게 눌러쓴 제모의 차양 밑으로 멋진 콧날을 드러낸 모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젊은 영웅이었다. 그는 후배들 앞에서 고된 규율투성이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비참한 생활을 마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이 긍지에 넘쳤고, 젊었음에도 겸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뭐야, 말더듬이야? 자네도 해기(해군기관학교)에 들어오지 않겠나? 말더듬이 따윈, 하루에 두들겨 고쳐 줄 테니."
나는 어쩐 일인지, 얼떨결에 명료한 대답을 했다. 말은 줄줄 흐르듯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나왔다.
"안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중이 될 겁니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젊은 영웅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 옆의 풀을 뜯어 입에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몇 년 후에는 나도 자네의 신세를 지게 되겠군."
그해에는 이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10-11쪽

아버지의 얼굴은 초여름의 꽃들에 묻혀 있었다.꽃들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꽃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왜냐 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우리들을 향하고 있던 탈의 테두리 같은 것만을 남기고,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멀리 존재하며, 그 존재 방법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소원한가 하는 점을,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죽음에 의하여 이토록 물질로 변모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러한 국면에 접하게 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서서히, 5월의 꽃들이라든지, 태양, 책상, 학교 건물, 연필.... 그러한 물질들이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서먹서먹하고, 나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36쪽

그 해 여름의 금각은, 잇달아 비보가 날아드는 전쟁의 어두운 상황을 재물로, 한결 생생히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6월에는 이미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은 노르망디의 벌판을 질주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금각은 이 고독, 이 정적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란과 불안, 수많은 시체와 엄청난 피가, 금각의 미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금각은 불안이 세운 건축, 한 사람의 장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들에 세운 건축이었던 것이다. 미술사가가 양식의 절충밖에 발견하지 못한 3층의 부조화한 설계는, 불안을 결정화할 양식을 추구하여, 자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금각이 하나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이었더라면, 그 불안을 포섭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붕괴되어 버렸으리라.-40쪽

금각에 대한 나의 기묘한 집념을 털어놓은 상대는 오로지 쓰루카와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쓰루카와의 표정에는, 나의 더듬거리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조감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얼굴에 직면한다. 중요한 비밀을 고백핳ㄹ 때에도, 미에 대한 격렬한 감동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경우에도, 내가 직면하는 것은 이러한 얼굴이다. 인간은 평소에 인간을 향하여 이러한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 그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히, 나의 우스꽝스러운 초조감을 그대로 흉내내어, 마치 나의 무시무시한 거울처럼 변하여 있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그럴 때에는, 나와 똑같이 추한 얼굴로 변모한다. 그것을 본 순간, 내가 표현하려고 생각했던 중요한 것들은, 기왓장이나 다를 바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47쪽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중략)
쇼와 19년(1944) 11월, B29의 도쿄 폭격이 있던 당시는, 교토 역시 내일이라도 공습을 당할 듯이 여겨졌다. 교토 시 전체가 불에 휩싸이는 것이, 나의 은근한 꿈이 되었다. (중략)
내일이야말로 금각이 불타리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형태가 사라지리라...... 그 순간 꼭대기의 봉황은 불사조처럼 되살아 날아가리라. 그리고 형태에 속박되어 있던 금각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닻에서 벗어나 도처에 모습을 나타내어, 호수 위에도, 어두운 바다의 조수 위에도, 희미한 빛을 흩뿌리며 자유로이 떠돌아다니겠지......-50-52쪽

종전 선언을 듣고, 도쿄라면 황궁 앞으로 가겠지만, 교토에서는 아무도 없는 어소(御所) 앞에 눈물을 흘리러 간 사람들이 많았다. 교토에는 이러한 때에 눈물을 흘리러 갈 만한 신사나 불당이 많다. 어느 곳이나 그날은 붐볐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금각사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뜨거운 돌맹이 위에는, 그리하여 내 그림자만이 있었다. 금각이 저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날의 금각을 첫눈에 본 순간부터, 나는 '우리들'의 관계가 이미 변하였다고 느꼈다.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68쪽

나는 산노미야에 있는 선사(禪寺)의 자식으로, 날 때부터 안짱다리였어. (중략) 나는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지. 그 조건과 화해해서, 사이좋게 지내는 건 패배라고 생각했어. 원망하자면 끝이 없지.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교정 수술을 해 주어야 했어. 이제는 이미 늦었지. 하지만 나는 부모님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더구나 원망한다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
나는 절대로 여자들한테서 사랑받지 못하리라고 믿었어. 이건 남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확신이라는 건, 아마 너도 알고 있는 바와 같아. 자신의 존재 조건과 화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 확신과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아. 왜냐 하면, 만약 내가 이대로의 상태에서 여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만큼, 나는 자신의 존재 조건과 화해하는 게 되기 때문이지. 나는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는 용기와, 그 판단과 싸울 수 있는 용기는, 쉽사리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 가만있으면서도 나는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야.
이러한 내가, 친구들처럼 몸파는 여자를 상대로 동정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
(아래 계속)-100-102쪽

(위에서 계속)
(중략) 사지가 멀쩡한 사내와 내가, 같은 자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어. 그건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자기 모독으로 여겨졌거든. 내가 안짱다리라는 조건이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에 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중략)
우리들과 세계를 대립 상태로 만드는 무서운 불안은, 세계이건 우리들이건 어느 쪽인가가 변하면 해소되겠지만, 변화를 꿈꾸는 몽상을 나는 증오해. 하지만, 세계가 변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밝혀낸 확신은 오히려 일종의 화해, 일종의 융화와도 비슷하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불구자가 결국에 빠져드는 함정은, 대립 상태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 상태의 전적인 시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불구는 불치가 되는 거야......-100-102쪽

너는 육체의 자각이라면, 일정한 질량을 지닌 불투명하고 확고한 '물체'에 관한 자각을 상상하겠지. 나는 그렇지 않았어. 내가 일개의 육체, 일개의 욕망으로서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바람이 되는 일이었거든. 하지만 안짱다리가 곧바로 나를 저지하러 오지. 이것만은 절대로 투명해지는 일이 없다구. 그건 다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완고한 정신이었거든. 그건 육체보다도 훨씬 확고한 '물체'로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새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105쪽

가시와기를 깊이 알게 되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그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미를 싫어하였다. 곧바로 사라지는 음악이라든지, 수일 후에 시드는 꽃꽂이라든지, 그의 취향은 그러한 것들에 한정되어 건축이나 문학을 싫어하였다. 그가 금각에 온 것도 달이 비치는 동안의 금각을 찾아서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의 미는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인가! 취주자가 성취하는 그 일순간의 미는 일정한 시간을 순수한 지속으로 바꾸어 확실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와 같은 단명의 생물처럼 생명 그 자체의 완전한 추상이며 창조였다. 음악만큼 생명과 유사한 것은 없었고, 똑같은 미라 하더라도, 금각만큼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는 없었다. (중략)
(아래에 계속)-147-148쪽

(위에서 계속)
가시와기가 미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위로는 아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로 퉁소의 취구에 불어넣은 숨결이 잠시 동안 공중에서 미를 성취시킨 뒤에, 자신의 안짱다리와 어두운 인식이 이전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남게 되는 것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미의 미익함, 미가 자신의 체내를 관통하여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절대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 가시와기가 사랑한 것은 그것이었다. 미가 나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홀가분하였을까?-147-148쪽

노사가 선택한 공안(公案)은 무문관 제14칙의 남천참묘(南泉斬猫)였다.(중략)
당나라 시절, 지주의 남천산에 보원선사라는 명승이 있었다. 산 이름을 따서 남천 스님이라 불렸다.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이 한적한 산 속 절간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이것을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은 서로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천 스님은 당장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 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 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수제자인 조주가 돌아왔다. 남천 스님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는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올린 채 나가 버렸다. 남천 스님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오늘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도 목숨을 건졌을 텐데."-70-71쪽

"'남천참묘'라."하고 가시와기는, 속새풀의 길이를 재어, 수반에 대어 보며 대답하였다. "그 공안은 말이야, 그건 사람의 일생에, 갖가지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몇 번이고 나타나는 거지. 그건 기분 나쁜 공안이야. 인생의 전환점에서 마주칠 때마다, 똑같은 공안이 모습도 의미도 바뀌어 있거든. 남천 스님이 베어 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그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이야. 알아?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지. 눈은 금빛에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그 작고 부드러운 몸에 이 세상의 모든 향락과 미가 용수철처럼 구부려진 채 간직되어 있었지. 고양이가 미의 결정체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간과하고 있지. 바로 나를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고양이는 느닷없이 숲 속에서 뛰쳐나와 마치 고의적인 듯이 상냥하고 교활한 눈빛을 반짝이다가 붙잡혔지. 왜냐 하면 미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미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 의사에게 뽑아 달라고 하지. (아래에 계속)-152-153쪽

(위에서 계속)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 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 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을까? 아니면 그 자체에 있었을까? 하여튼 나에게서 뽑혀 나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이놈은, 이건 분명 별개의 것이지. 결코 그것이 아니야.' (아래에 계속)-152-153쪽

(위에서 계속)
알겠나? 미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고양이를 벤 것은 마치 아픈 충치를 빼내서 미를 척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최후의 해결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미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았고, 설령 고양이는 죽었어도 고양이의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 놓았지. 그는 말하자면 충치의 아픔을 참는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이것은 그야말로 가시와기 특유의 해석이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나에게 빗대어, 나의 내심을 꿰뚫어보고는 해결책이 없음을 풍자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나는 처음으로 가시와기에게서 진정한 두려움을 느꼈다. 잠자코 있기가 두려웠기에 다시 되물었다.
"너는 그러면 어느 쪽이냐? 남천 스님이냐, 아니면 조주냐?"
"글쎄, 어느 쪽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남천이고 네가 조주지만, 언젠가는 네가 남천이 되고 내가 조주가 될지도 몰라. 이 공안은 그야말로 '고양이 눈처럼' 변하니까."-152-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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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2-2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대문 방화 사건을 계기로 96에서 9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읽은 금각사를 다시 읽기 시작. 미시마 대단하구나~ 천재구나~ 감탄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우익을 자처하려면 미시마 정도는 돼야지. 2MB와 조중동과 기타 사이비들은 반성할지어다.
 
백귀야행 16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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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에 카이 삼촌이 처음 등장한 것이 9권이었나?

가끔 투덜거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얌전한 성격에, 엄마하고도 할머니하고도 사촌 누나들하고도 심지어는 저쪽 세상의 존재들하고도 별로 부딪히는 일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평화주의자 리쓰와는 달리, 이 아저씨한테는 처음부터 트러블 메이커의 아우라가 보였다. 리쓰 안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할아버지와 격돌했던 전력도 있고, 리쓰한테 미칠 악영향을 막기 위해서 카이는 내보내는 게 좋다는 말도 누가 했었지. 그게 사토루 삼촌이던가 고우 삼촌이던가... 어쨌든, 시리즈 10권이 넘어가고 슬슬 신선함보다는 익숙함이 주된 감상이 되어가는 이 만화에서 카이 삼촌은 활력을 주는 존재다.

16권에서 부동산 중개사무소의 트러블 해결 담당으로 취직한 카이 삼촌은 타고난 재능을 직업으로 연결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20년이나 저쪽 세계에 붙들려 있던 학력도 재산도 없는 중년 남자에게 적당한 직업을 찾아주기 위해 작가가 꽤나 고심했을 듯하지만, 일단은 본인도 고용주도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느낌. 업무 처리 방식이 살짝 과격하긴 해도 본인 말로는 죽을 정도로 위험한 일은 없다고 하고, 좀 수상하지만 차도 샀고, 더 수상하지만 여자친구(?)도 생겼고....

문제는 카이 삼촌의 일에 리쓰가 동행할 경우인데, 사촌 누나들이랑 함께 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던 '이이지마 시너지'는 상대가 카이 삼촌이 되니 자못 폭발적이다. 그걸 잘 됐다며 이용해 먹는 것이 카이 삼촌이고,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리쓰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 이 대조적이면서도 서로 닮은 숙질 콤비의 활약이 궤도에 오르며, 전회와는 다른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는 16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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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TV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 나온 '초난강'을 보고 아이돌 그룹 SMAP(스마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에도 "기무라 타쿠야" 정도는 들어 봤었지만, 인터넷 동영상 검색으로 버라이어티쇼 <SMAP×SMAP(스마스마)>를 보고는 좀 충격을 받았다. 이건 단순히 웃기다 재미있다 하는 수준이 아니다. 내년이면 그룹 결성 20년. 중학생 때(막내인 싱고는 소학교 5학년 때) 만나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에 10대, 20대를 다 바쳤다. 노래, 댄스, 드라마, 토크, 개그 뭐든지 다 한다. 당구도 하고 요리도 하고 25km 크로스컨트리에 해발 3800m 후지산 등산에 풀마라톤까지 한다. 피로로 축 늘어져 있다가도 카메라가 향하는 순간 전등에 불이 켜지듯 '팟'하고 최상의 미소가 만들어진다. '프로'라는 표현을 넘어 '달인'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다.


왼쪽부터 기무라,싱고,츠요시,나카이,고로

거기에 멤버들 각자의 개성이 다 다른 것이 또 즐겁다. 우선 완벽한 남자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있다. 역대 일본 드라마 시청률 1위부터 5위까지의 주연으로 NG를 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 배우. <스마스마>에는 무슨 게임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의욕적으로 덤벼들어 이겨놓고 보는 그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머리도 운동 신경도 손재주도 좋은 데다 성실하고 겸손한 이미지. 유치원 다니는 애가 있는 아저씨임에도 불구하고 14년째 일본 남자 연예인 인기 순위 1위를 지키고 있다. 다음으로 데뷔 때부터 한결같이 팀을 위해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열정적인 노력가로, 위기에서 더욱 빛나는 리더십의 소유자 나카이 마사히로(中居正廣)가 있다. 두 사람보다 5살 연하로 팀의 막내인 카토리 싱고(香取愼吾)는 커다란 덩치에 귀여운 얼굴, 발랄한 장난끼를 가진 분위기 메이커지만 때때로 보이는 진지한 표정이 또 상당히 임팩트가 있다. 도회풍의 말끔한 외모와 엉뚱한 몽상벽의 갭이 포인트인 네번째 멤버는 상냥한 남자 이나가키 고로(稻垣吾郞).  마지막으로 한국 마니아 쿠사나기 츠요시(草彅剛)는 튀는 데 없이 조용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화려함에 기죽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에 자신만의 성실함을 더해 팀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뒷 줄 왼쪽부터 츠요시,기무라,싱고,나카이. 앞 줄 모리(96년 탈퇴해 바이크 레이서가 됨),고로

재능 있는 어린 소년들을 찾아 이렇게 완벽한 스타로 만들어낸 것은 <쟈니즈 예능사무소>라는 이름을 가진 시스템이다. 이 회사는 일본 전국에서 10대 초반의 미소년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하여 노래, 춤, 연기의 레슨을 시킨다. 이렇게 훈련받고 있는 수십 명의  <쟈니즈 주니어>들은 사무소 소속 선배의 백댄스와 선배 주연 드라마의 단역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설령 유명해진다 해도 주니어로 대우받을 뿐. 매니저는 없고 촬영장에는 전철로 혼자 가야 한다. 이 <쟈니즈 주니어> 중에 톱에 속해 그룹이 결성되면 비로소 데뷔의 희망이 보인다. 그룹 결성 후 드라마도 하고 버라이어티 쇼도 하고 콘서트도 하면서 2~3년간 지명도를 높여 드디어 대망의 CD 데뷔에 이르면 비로소 한 사람의 연예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출연료와 광고 수입은 주니어 시절부터 먹여주고 길러주고 레슨시켜 준 사무소로 들어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쟈니즈 사무소에 엄청난 돈을 벌어 주고 있는 "아이돌"로는 91년 데뷔한 SMAP 외에도 TOKIO (94), V6 (95), KinKi Kids (97), ARASHI (99), 타키 앤 츠바사(02), NewS (04), 칸쟈니8 (04), KAT-TUN (06) 등이 있다. 얘들 단합대회는 매년 도쿄돔을 빌려서 한다.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걸 또 5만명이 넘는 팬들이 들어가서 보고....


뒷줄 왼쪽부터 츠요시,고로,기무라,나카이,모리,싱고. 앞줄은 SMAP의 백댄서였던 KinKi Kids의 도모토 츠요시(堂本剛)와 도모토 코이치(堂本光一)

이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교토에 남아 있는 전통 연예인 "게이샤(藝者)"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게이샤는 몸을 파는 여성인 유나 (湯女)와는 다르다. 물론 일본 전통 사회에서는 매춘업도 무척 번성해서 도쿄의 요시와라(吉原)나 교토의 시마바라(島原)에는 불야성의 홍등가가 있었고, 오이란(花魁)으로 불리던 최고 등급의 유나가 시대의 스타가 되기도 했지만, 게이샤의 거리는 유곽 거리 시마바라가 아닌 기온(祗園)이었다. 게이샤가 되려는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오키야(置屋)에 소속되어 의식주를 제공받으며 노래, 악기 연주, 춤 등의 수업을 받는다. 그 후 16세 전후에 시험을 거쳐 마이코(舞子)로 데뷔, 선배 게이코(藝子)를 따라 연회석에 다니며 실무를 배운다. 연회인 오자시키( お座敷 )는 기온 지역에 퍼져 있는 특수한 작은 가게인 오차야(お茶屋)에서 열린다. 단골 손님의 요청을 받아 장소를 제공하고, 요리를 주문하고, 가무를 담당할 게이샤를 섭외하는 것이 오차야의 역할 . 밤마다 오차야에 다니며 3년 정도 견습 생활을 한 마이코는 붉은 옷깃을 흰 색으로 바꾸어 다는 '에리카에'라는 의식을 마치면 비로소 정식 게이샤가 된다. 이제 그녀에게도 상당한 수입이 생기지만, 그것은 생활비와 의상비, 그 동안 쌓인 레슨비 명목으로 소속 오키야로 들어간다.


저 의상과 장식은 18kg정도의 무게가 나간다.

1960년대 기온 최고의 게이샤로 불린 이와사키 미네코가 구술한 <게이샤 A Life>를 읽으며, '예능 사무소=오키야', '그룹 결성=마이코 데뷔', 'CD데뷔=에리카에'라는 공식을 떠올리고 웃었다. 게이샤의 손님들이 하룻밤 수백만원의 술자리에 흔쾌히 돈을 쓰며 그녀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안겼던 것처럼, 그들만큼 부자는 아니지만 사랑의 크기에서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 아이돌 팬 여자들은 CD를 사고 콘서트 티켓을 사고 잡지와 사진과 팬시 상품을 사기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연다. 21세기 연예계의 명멸하는 조명 뒤에 숨은 이 어마어마한 고루함이라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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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10-1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어떤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꽤 재미있네요. 그리고 꽤 적확한 비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mizuaki 2007-10-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 님, 동의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
저 냐오 님이 쓰시는 BL리뷰의 오래된 독자랍니다. 아이돌계가 그쪽으로도 마굴이더군요. 관심 생긴 김에 킨키의 드라마 <인간실격>을 찾아 봤는데, '지금이라 다행이지 10년 전에 봤더라면 나 상당히 위험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품절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재국민화를 불러내는 주술적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제국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의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지만, 식민주의 혹은 패권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국사가 그들의 국사보다 정당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을 잇는 국사의 연쇄 구도에서 이들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공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국사를 해체한다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국사를 향한 방아쇠는 그것이 어디에서 당겨지든,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국사의 연쇄 고리를 끊음으로써 어떤 동아시아 국가든 역사의 기억을 전유하려는 시도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일 수 있다. 한국의 국사 해체가 후쇼사판 교과서나 고구려의 역사적 주권을 강변하는 중국의 국사에 대한 가장 고도화된 비판이라고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사, 민족 국가의 마지막 변명> 中-324-325쪽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범들 개개인에게 추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기억을 재구성하여 보존하는 일이다. 법정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적합한 도구라는 생각에는 아무래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한 다양한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사회적 기억을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행위는 곧 사법적 실증주의에 기억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은 문서로 입증할 수 없는 개개인의 기억을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취하함으로써 역사적 기억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 中-46쪽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해방 직후 식민주의의 청산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친일과 반일을 가르는 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 각각의 내부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탈식민'의 전제는 그들 친일파의 청산이 아니라, 식민지의 보통 사람들에게 제국 '일본'으로 표상되고 내재화된 가치 체계를 전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청산의 목소리가 높을수록 '우리'안에 내면화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더 멀어지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축으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은 강력한 민족 국가에 대한 갈망을 낳고, 결국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주는 기제였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저항조차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국가주의 헤게모니의 비밀도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근거한 한반도의 전후 역사학은 국가 권력의 공범자였다. 최선의 경우에도 수동적 공범자에 불과했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 中-56-57쪽

"솔직히 제 자신도 그런 상황(홀로코스트-인용자주)에 처했을 때, 인간적 존엄성이나 도덕성을 생존의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될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은 자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살아남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아니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은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자기 성찰과 자기 비판의 기회를 박탈합니다. 자, 나는 이렇게 도덕성을 확보했고 이렇게 정의로운 이야기를 했으니 내 영혼을 지켰다는 식의 작은 정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中 Zygmund Bauman의 말
-101쪽

그 결과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민중사의 요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사의 주인인 고구려인이 설 땅은 사라진다. 역사적 고구려인은 이제 한민족의 역사로 통합된 예맥 계통과 현대 중국의 영토로 흡수 통합된 거란, 말갈, 여진 계통으로 해체되고, 한국사냐 중국사냐에 따라 어느 일방의 계통만이 강조되고 다른 하나는 배제될 따름이다. 과학성과 실증성을 자랑하는 이 근대 역사학의 성과들은, 고구려가 서 있던 그 대륙의 일부를 '간도間島'라 불렀던 평범한 전근대인들의 소박한 역사 인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유치하고 무지몽매하기만 하다. (아래에 계속)-338-339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국사 패러다임에 포박된 근대 역사학이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국민화된 한국과 중국의 현대인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자리잡았던 그 땅을 청과 조선 사이에 끼인 섬이라는 의미에서의 간도라 부를 수 있었던 인식은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변경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된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국사라는 폭력에서 구출해,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고구려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구려사 구하기> 中-338-339쪽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완강한 국민적 상식은 닫힌 민족주의 대 열린 민족주의, 또는 나쁜 민족주의 대 좋은 민족주의라는 규범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중략)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가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이런 역사적 구도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손쉬운 이분법'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유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한의 분단 정권이 국가주의=나쁜 민족주의라면,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저항 민족주의와 분단을 거부하는 민중 민족주의는 좋은 민족주의라는 식이었다.
(아래에 계속)-259-261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런 규범적 이해는 민족주의 또는 국민국가가 갖는 '모듈module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의 형성에서 한 발 앞섰기 때문에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던 중심부이 국민 국가적 지배 장치들이 주변부 민족주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개개 국민 국가가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국가간 체제의 위계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집권한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국가의 구조적 집중화 이외의 대안을 찾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내 식대로 표현한다면, 민족이 민중을 전유하고 다시 국가가 민족을 전유하는 연쇄 고리가 민족주의와 국자주의를 연계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의 강성 대국론에서 잘 나타나듯이 중심의 힘을 선망하는 주변부 민족 해방 운동의 저항은 이미 '지배가 내장된 저항'인 것이다.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中-259-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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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 원칙을 줄이기


정치/메타-비평 : 2002/01/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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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던 이의 고민이 드러나는 글이다. 김영민이 로티를 좋아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흉내내는 행동패턴은 사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개념과 비슷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이가엘로 올렸던 글. 스무살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볼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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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그렇게 잘났니?


안티조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듣기 쉬운 소리는 "너희는 다른 사람을 바보로 아느냐?"라는 말일 것이다. 스스로를 변호하고 운동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논변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권정도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모두 사이트 탄생후 거의 2년 동안 이른바 "독자선택론"에 근거하여 수천 개의 비슷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이 독자선택론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문시장은 신문의 정치적인 논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반영한다. 따라서 자본의 반영물인 독자수를 가지고 "독자들의 지지를 받는 논조"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너희들만 잘났어?"라는 정서적인 요인으로 독자선택론에 공감을 느끼고, 안티조선에 반감을 가진다. 일전에 나는 "계몽주의가 촌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말은 계몽주의보다 더 촌스러운 시대의 것이다."라고 빈정거린 적이 있으나, 그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칙을 말하지 않기


김영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장미와 주판] 독서여행에서 바람직한 신앙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참석자가 교인으로써 비교인과 바람직하게 의사소통하는 방법으로 "신을 말하지 않기"라는 언어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하느님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언어는 너무나도 빈곤하다. 그리고 빈곤한 언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교인이 정말로 자신의 정서와 감동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다면, 그러한 언어게임은 오히려 확신에 찬 전도보다 훨씬 효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종교의 문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한 동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서 집단 바깥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균일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종교집단과 같은 획일성과 배타성을 느끼고 멀리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안티조선과 같은 언론운동 진영에도 정서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차원에서는 언어 사용에 대한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스포츠 이야기, 가벼운 음담패설, 사는 이야기 정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투쟁, 운동, 상징조작, 반미, 언론개혁, 수구기득권 등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살벌해 보일 것이다. 이 나라의 상황에서 보자면 거의 종교집단 처럼 보일 듯 하기도 하다. 필자 역시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바탕색은 자신은 색깔이 없다는 듯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나름대로 거기에 대비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내 말은 "바보들과의 타협"을 이루어 내라는 뜻이 아니다. 꼴통은 꼴통이고, 바보는 바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은 반쯤 인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무시를 해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바보로 규정하는 작업이 우리 내부의 언어가 아닌, 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쓰이는 공통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안티조선 측의 패널들이 매번 TV 토론에 나가서 [수구기득권]이니 [독재세력]이니 [극우]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물론 저들을 재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글을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우리는 좀 더 꼼꼼히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기


개인적으로 고백하면 나는 아무런 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칙이 있으면 "이게 왜 생겨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의 절대성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나는 자신을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것은 매사에 의미를 못 찾는 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모든 전제를 다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내가 믿지도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면서 설득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결국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원칙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사는 동물이며,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최소한의 공통지반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언어게임에 있어서 상대방과 동의할 수 있는 룰을 이미 깔아놓고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최소한의 원칙 위에서 그를 옭아매는 것일 것이다. "나를 바보로 아느냐!"라는 질문은 무시하자. 거기에 대답하려 들다가는 피로해진다. 필요한 것은, 공통지반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의사소통이 힘들다면,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과잉된 원칙으로 남을 재단하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 자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논리와 진실성을 따지는 사람이 조소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 사회는 뼛속까지 마키아벨리즘에 물들어 있긴 해도 [확신범]들의 나라는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배워온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데 인색할 뿐, 자신이 배워온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화는 이런 양상으로 전개되야 한다.

"당신은 A에 동의하는 가."
"그렇다."
"당신은 B에 동의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A와 B의 기준에 의해, 결론은 C가 된다."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아니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합의한 기준이고, 그 기준위에 결론이 서 있다."

여기서 상대방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수도 많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본인 스스로 뭔가를 느끼기는 할 것이다. ( 못 느끼면 꼴통이다. ) 물론 대한민국은 원칙이 남용되는 만큼이나 원칙이 없는 사회라 이 시점에서,

"사고가 논리정연해야 한다는 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나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

고 나오는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나도 논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데, 우리 인간의 대화는 논리와 합리성, 진실성이라는 지반 위에 서 있다. (좀 현학적으로 보이려면, 진중권이 하듯 "소크라테스 이후로"라는 말을 붙여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지극히 공통적인 지반이므로 그대로 밀어붙여도 된다. 사태는 이렇게 종료시켜야 한다.


적은 수의 원칙으로 말하기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효용성 뿐만이 아니라, 많은 원칙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언어생활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칙의 남용은

첫째로, 배척할 것을 많이 만든다. 원칙에 벗어나면 걍 배척하면 되므로.

둘째로, 고민을 줄인다. 원칙에 맞추면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셋째로, 정답을 만든다. 원칙은 보통 정답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민없이 쉽게 배척할 수 있다면 정답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을 때에야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칼로 무자르듯이 하는 원칙의 적용은 정답과 거리가 멀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본다. 립싱크 가수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퇴출되어야 한국 가요계가 정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정적이다. 사실 나는 아이돌 가수와 립싱크 가수는 다 사라져야 한다는 류의 말이 너무나도 귀에 거슬린다. 보통 인디 가수만을 인정하는 듯 보이는 평론가들의 말도. 이러한 언어게임은 립싱크를 배척하고, 고민을 줄이고, "립싱크를 없애자"라는 정답을 만든다. 그러나 생각의 여지를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양성을 옹호하는 말하기 방식이 아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문제는, 아이돌 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 왜곡된 방법으로 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한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수만은 "립싱크도 하나의 장르다.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립싱크를 그렇게 욕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반론이 될 수 있겠다. 둘이 붙었을 때, 일반 사람들에게 누가 더 편협적으로 보일까? "안된다"는 말과, "하나의 장르다"는 말 중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된다.

첫째, 립싱크가 우선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마치 진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진실성의 문제다.

둘째, 최소한 라이브를 시도했을 때 음반에 담겨 있는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와야 우리는 그사람을 "가수"라고 인정해 줄 수 있다. 이것 역시 진실성의 문제다.

셋째, 만일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다른 현상이다. 시각문화의 추세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을 인정하되 대중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그들을 "립싱커" 혹은 "댄서" 혹은 "행위예술가"라고 불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언어 사용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넷째, 만일 라이브 불가능한 립싱크를 이수만처럼 "장르"로 만들어달라고 주장한다면, "블랙커피"나 "허리케인 블루" 등을 포함시킨 립싱크 차트를 따로 만들어서 일반 가요와 구분해야 한다. 이것 역시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다섯째, 라이브할 수 있는 가수의 립싱크라도 그것보다는 라이브가 바람직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자유경쟁을 통해 라이브 비율을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립싱크를 하고 있는 지를 명확히 표시하여 대중에게 평가를 받게 해야 한다. 이것 역시 가수의 정의에 대한 진실성의 문제다.


말장난 같고, 귀찮은가? 하지만 나는 이게 진짜라고 생각한다. 논증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칙에 적용해서 사태를 일단락 시킨다면, 그것이 상대편의 편협함과 다를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말을 풍성하게


사람에게 신을 말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 대안이다! 그밖에 없다! 나는 진실로 그렇게 느낀다! 감정적으로 행복하다! 그를 믿어라!!"라는 말 이외에 할 말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일단 접고, 사회성원 공통의 원칙에서 출발해 주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지 않을 까 싶다. 그것이 "우리모두"라는 이름을 가진, 안티조선 사이트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아닐까?

우리는 이미 공통적인 지반을 가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진실성과 합리성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단지 위에 서술한 최소한의 원칙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지극히 강하고 일반국민들이 보통 거기에 동의를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가치를 공통요소로 어느 정도 활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내가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이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그 원칙을 적용시켜 사태를 판단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를 공통요소로 활용하지 않고도 예를 들어 친일문제나 대북문제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반민족, 반통일, 민족반역자, 수구기득권, 민주화 등의 귀중한 단어를 최대한 아껴쓰는 안티조선을 보고 싶다. (이 중 일부는 아예 쓰지 말았으면 싶다. ㅡㅡ;;;)

이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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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아이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든 秀作.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읽으려고 퍼왔다.

출처는 한윤형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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