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품절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재국민화를 불러내는 주술적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제국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의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지만, 식민주의 혹은 패권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국사가 그들의 국사보다 정당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을 잇는 국사의 연쇄 구도에서 이들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공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국사를 해체한다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국사를 향한 방아쇠는 그것이 어디에서 당겨지든,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국사의 연쇄 고리를 끊음으로써 어떤 동아시아 국가든 역사의 기억을 전유하려는 시도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일 수 있다. 한국의 국사 해체가 후쇼사판 교과서나 고구려의 역사적 주권을 강변하는 중국의 국사에 대한 가장 고도화된 비판이라고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사, 민족 국가의 마지막 변명> 中-324-325쪽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범들 개개인에게 추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기억을 재구성하여 보존하는 일이다. 법정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적합한 도구라는 생각에는 아무래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한 다양한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사회적 기억을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행위는 곧 사법적 실증주의에 기억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은 문서로 입증할 수 없는 개개인의 기억을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취하함으로써 역사적 기억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 中-46쪽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해방 직후 식민주의의 청산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친일과 반일을 가르는 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 각각의 내부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탈식민'의 전제는 그들 친일파의 청산이 아니라, 식민지의 보통 사람들에게 제국 '일본'으로 표상되고 내재화된 가치 체계를 전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청산의 목소리가 높을수록 '우리'안에 내면화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더 멀어지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축으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은 강력한 민족 국가에 대한 갈망을 낳고, 결국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주는 기제였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저항조차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국가주의 헤게모니의 비밀도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근거한 한반도의 전후 역사학은 국가 권력의 공범자였다. 최선의 경우에도 수동적 공범자에 불과했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 中-56-57쪽

"솔직히 제 자신도 그런 상황(홀로코스트-인용자주)에 처했을 때, 인간적 존엄성이나 도덕성을 생존의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될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은 자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살아남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아니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은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자기 성찰과 자기 비판의 기회를 박탈합니다. 자, 나는 이렇게 도덕성을 확보했고 이렇게 정의로운 이야기를 했으니 내 영혼을 지켰다는 식의 작은 정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中 Zygmund Bauman의 말
-101쪽

그 결과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민중사의 요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사의 주인인 고구려인이 설 땅은 사라진다. 역사적 고구려인은 이제 한민족의 역사로 통합된 예맥 계통과 현대 중국의 영토로 흡수 통합된 거란, 말갈, 여진 계통으로 해체되고, 한국사냐 중국사냐에 따라 어느 일방의 계통만이 강조되고 다른 하나는 배제될 따름이다. 과학성과 실증성을 자랑하는 이 근대 역사학의 성과들은, 고구려가 서 있던 그 대륙의 일부를 '간도間島'라 불렀던 평범한 전근대인들의 소박한 역사 인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유치하고 무지몽매하기만 하다. (아래에 계속)-338-339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국사 패러다임에 포박된 근대 역사학이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국민화된 한국과 중국의 현대인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자리잡았던 그 땅을 청과 조선 사이에 끼인 섬이라는 의미에서의 간도라 부를 수 있었던 인식은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변경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된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국사라는 폭력에서 구출해,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고구려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구려사 구하기> 中-338-339쪽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완강한 국민적 상식은 닫힌 민족주의 대 열린 민족주의, 또는 나쁜 민족주의 대 좋은 민족주의라는 규범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중략)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가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이런 역사적 구도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손쉬운 이분법'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유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한의 분단 정권이 국가주의=나쁜 민족주의라면,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저항 민족주의와 분단을 거부하는 민중 민족주의는 좋은 민족주의라는 식이었다.
(아래에 계속)-259-261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런 규범적 이해는 민족주의 또는 국민국가가 갖는 '모듈module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의 형성에서 한 발 앞섰기 때문에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던 중심부이 국민 국가적 지배 장치들이 주변부 민족주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개개 국민 국가가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국가간 체제의 위계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집권한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국가의 구조적 집중화 이외의 대안을 찾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내 식대로 표현한다면, 민족이 민중을 전유하고 다시 국가가 민족을 전유하는 연쇄 고리가 민족주의와 국자주의를 연계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의 강성 대국론에서 잘 나타나듯이 중심의 힘을 선망하는 주변부 민족 해방 운동의 저항은 이미 '지배가 내장된 저항'인 것이다.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中-259-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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