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 원칙을 줄이기


정치/메타-비평 : 2002/01/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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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던 이의 고민이 드러나는 글이다. 김영민이 로티를 좋아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흉내내는 행동패턴은 사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개념과 비슷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이가엘로 올렸던 글. 스무살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볼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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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그렇게 잘났니?


안티조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듣기 쉬운 소리는 "너희는 다른 사람을 바보로 아느냐?"라는 말일 것이다. 스스로를 변호하고 운동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논변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권정도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모두 사이트 탄생후 거의 2년 동안 이른바 "독자선택론"에 근거하여 수천 개의 비슷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이 독자선택론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문시장은 신문의 정치적인 논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반영한다. 따라서 자본의 반영물인 독자수를 가지고 "독자들의 지지를 받는 논조"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너희들만 잘났어?"라는 정서적인 요인으로 독자선택론에 공감을 느끼고, 안티조선에 반감을 가진다. 일전에 나는 "계몽주의가 촌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말은 계몽주의보다 더 촌스러운 시대의 것이다."라고 빈정거린 적이 있으나, 그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칙을 말하지 않기


김영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장미와 주판] 독서여행에서 바람직한 신앙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참석자가 교인으로써 비교인과 바람직하게 의사소통하는 방법으로 "신을 말하지 않기"라는 언어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하느님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언어는 너무나도 빈곤하다. 그리고 빈곤한 언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교인이 정말로 자신의 정서와 감동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다면, 그러한 언어게임은 오히려 확신에 찬 전도보다 훨씬 효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종교의 문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한 동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서 집단 바깥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균일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종교집단과 같은 획일성과 배타성을 느끼고 멀리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안티조선과 같은 언론운동 진영에도 정서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차원에서는 언어 사용에 대한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스포츠 이야기, 가벼운 음담패설, 사는 이야기 정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투쟁, 운동, 상징조작, 반미, 언론개혁, 수구기득권 등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살벌해 보일 것이다. 이 나라의 상황에서 보자면 거의 종교집단 처럼 보일 듯 하기도 하다. 필자 역시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바탕색은 자신은 색깔이 없다는 듯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나름대로 거기에 대비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내 말은 "바보들과의 타협"을 이루어 내라는 뜻이 아니다. 꼴통은 꼴통이고, 바보는 바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은 반쯤 인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무시를 해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바보로 규정하는 작업이 우리 내부의 언어가 아닌, 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쓰이는 공통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안티조선 측의 패널들이 매번 TV 토론에 나가서 [수구기득권]이니 [독재세력]이니 [극우]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물론 저들을 재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글을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우리는 좀 더 꼼꼼히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기


개인적으로 고백하면 나는 아무런 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칙이 있으면 "이게 왜 생겨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의 절대성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나는 자신을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것은 매사에 의미를 못 찾는 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모든 전제를 다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내가 믿지도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면서 설득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결국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원칙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사는 동물이며,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최소한의 공통지반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언어게임에 있어서 상대방과 동의할 수 있는 룰을 이미 깔아놓고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최소한의 원칙 위에서 그를 옭아매는 것일 것이다. "나를 바보로 아느냐!"라는 질문은 무시하자. 거기에 대답하려 들다가는 피로해진다. 필요한 것은, 공통지반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의사소통이 힘들다면,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과잉된 원칙으로 남을 재단하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 자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논리와 진실성을 따지는 사람이 조소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 사회는 뼛속까지 마키아벨리즘에 물들어 있긴 해도 [확신범]들의 나라는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배워온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데 인색할 뿐, 자신이 배워온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화는 이런 양상으로 전개되야 한다.

"당신은 A에 동의하는 가."
"그렇다."
"당신은 B에 동의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A와 B의 기준에 의해, 결론은 C가 된다."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아니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합의한 기준이고, 그 기준위에 결론이 서 있다."

여기서 상대방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수도 많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본인 스스로 뭔가를 느끼기는 할 것이다. ( 못 느끼면 꼴통이다. ) 물론 대한민국은 원칙이 남용되는 만큼이나 원칙이 없는 사회라 이 시점에서,

"사고가 논리정연해야 한다는 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나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

고 나오는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나도 논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데, 우리 인간의 대화는 논리와 합리성, 진실성이라는 지반 위에 서 있다. (좀 현학적으로 보이려면, 진중권이 하듯 "소크라테스 이후로"라는 말을 붙여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지극히 공통적인 지반이므로 그대로 밀어붙여도 된다. 사태는 이렇게 종료시켜야 한다.


적은 수의 원칙으로 말하기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효용성 뿐만이 아니라, 많은 원칙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언어생활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칙의 남용은

첫째로, 배척할 것을 많이 만든다. 원칙에 벗어나면 걍 배척하면 되므로.

둘째로, 고민을 줄인다. 원칙에 맞추면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셋째로, 정답을 만든다. 원칙은 보통 정답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민없이 쉽게 배척할 수 있다면 정답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을 때에야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칼로 무자르듯이 하는 원칙의 적용은 정답과 거리가 멀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본다. 립싱크 가수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퇴출되어야 한국 가요계가 정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정적이다. 사실 나는 아이돌 가수와 립싱크 가수는 다 사라져야 한다는 류의 말이 너무나도 귀에 거슬린다. 보통 인디 가수만을 인정하는 듯 보이는 평론가들의 말도. 이러한 언어게임은 립싱크를 배척하고, 고민을 줄이고, "립싱크를 없애자"라는 정답을 만든다. 그러나 생각의 여지를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양성을 옹호하는 말하기 방식이 아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문제는, 아이돌 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 왜곡된 방법으로 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한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수만은 "립싱크도 하나의 장르다.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립싱크를 그렇게 욕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반론이 될 수 있겠다. 둘이 붙었을 때, 일반 사람들에게 누가 더 편협적으로 보일까? "안된다"는 말과, "하나의 장르다"는 말 중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된다.

첫째, 립싱크가 우선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마치 진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진실성의 문제다.

둘째, 최소한 라이브를 시도했을 때 음반에 담겨 있는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와야 우리는 그사람을 "가수"라고 인정해 줄 수 있다. 이것 역시 진실성의 문제다.

셋째, 만일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다른 현상이다. 시각문화의 추세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을 인정하되 대중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그들을 "립싱커" 혹은 "댄서" 혹은 "행위예술가"라고 불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언어 사용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넷째, 만일 라이브 불가능한 립싱크를 이수만처럼 "장르"로 만들어달라고 주장한다면, "블랙커피"나 "허리케인 블루" 등을 포함시킨 립싱크 차트를 따로 만들어서 일반 가요와 구분해야 한다. 이것 역시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다섯째, 라이브할 수 있는 가수의 립싱크라도 그것보다는 라이브가 바람직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자유경쟁을 통해 라이브 비율을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립싱크를 하고 있는 지를 명확히 표시하여 대중에게 평가를 받게 해야 한다. 이것 역시 가수의 정의에 대한 진실성의 문제다.


말장난 같고, 귀찮은가? 하지만 나는 이게 진짜라고 생각한다. 논증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칙에 적용해서 사태를 일단락 시킨다면, 그것이 상대편의 편협함과 다를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말을 풍성하게


사람에게 신을 말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 대안이다! 그밖에 없다! 나는 진실로 그렇게 느낀다! 감정적으로 행복하다! 그를 믿어라!!"라는 말 이외에 할 말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일단 접고, 사회성원 공통의 원칙에서 출발해 주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지 않을 까 싶다. 그것이 "우리모두"라는 이름을 가진, 안티조선 사이트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아닐까?

우리는 이미 공통적인 지반을 가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진실성과 합리성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단지 위에 서술한 최소한의 원칙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지극히 강하고 일반국민들이 보통 거기에 동의를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가치를 공통요소로 어느 정도 활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내가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이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그 원칙을 적용시켜 사태를 판단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를 공통요소로 활용하지 않고도 예를 들어 친일문제나 대북문제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반민족, 반통일, 민족반역자, 수구기득권, 민주화 등의 귀중한 단어를 최대한 아껴쓰는 안티조선을 보고 싶다. (이 중 일부는 아예 쓰지 말았으면 싶다. ㅡㅡ;;;)

이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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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아이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든 秀作.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읽으려고 퍼왔다.

출처는 한윤형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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