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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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제국을 갈망하는 쇼비니즘의 에너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처음 정형화되었을 터인데, 이 흐름을 타고 2004년 이라크에 한국군이 파병되었다. (중략) 이라크 파병으로 최초의 제국주의형 군사 진출을 결정한 한국 사회는 2004년부터 문화 진출에 해당하는 '한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문화라는 요소 자체가 원래 복합적인 측면이 있어서 단순하게 볼 수는 없지만, 많은 한국 국민들에게 한류는 '수출'과 '민족주의형 쇼비니즘'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인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략) 제국주의를 향한 이런 사회문화적 전환이 노무현 정권기 중 절정에 달한 때는 2005년이었다. 그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건 다름 아닌 '황우석 사건'이다.-89-91쪽

중남미형 경제에서는 카우디요(caudillo. 카리스마를 지닌 사나이란 뜻으로 중남미 토호의 별칭)가 부동산을 매개로 한 일종의 '부등가 교환'(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이를 가경 상승에 의한 '재산 효과'라고 부른다.)를 통해 거대 권력으로 작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들과 국회의원들은 토호들과 쉽게 결탁하게 되고, 특정 지역의 개발계획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국부가 거의 무상으로 이전되게 만든다. 이 게임에서 국내 거주민의 대부분이 패배하고, 승리자는 이중국적자와 카우디요들, 그리고 미국의 제품을 수입하거나 혹은 미국으로 수출하는 일부 제조업 소유자들이었다. (아래에 계속)-144-145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상류층은 매우 쉬운 방식으로 거대한 부를 얻게 된다. 이들은 자기 2세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고급 지식을 획득한 자기 2세들을(이들은 '시카고 보이'라고 불린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모국의 경제를 미국 경제에 더욱 깊이 편입시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상류층은 더욱 부자가 되지만 대다수 중산층은 도시빈민 혹은 농촌빈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와중에 공무원들은 더욱 부패하게 되고 공기업을 차라리 미국에 파는 것이 오히려 '개혁'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마저 벌어지게 된다.
이는 칠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에서 실제로 1980~90년대에 걸쳐 폭넓게 진행되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1950년대에 세계 5대 강국의 하나였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붕괴했는데, 한국 경제의 현재 전개 과정은 30년 전 중남미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졌던 이런 '미국화'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중남미에서는 국립대학이 무상교육의 틀을 버리지 않고 버텼지만, 한국은 대학이 먼저 붕괴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144-145쪽

지난 50년간 한국에서 석유 소비가 줄어들었던 해는 딱 한 해, 바로 1998년 IMF경제위기 때이다. 그리고 3년 후, 경제가 다시 회복되면서 2001년에 최초의 경차였던 티코가 단종되었고, 2002년에 아토스가 단종되었다. 일본은 국민소득 2만달러를 지나면서 800cc경차가 국민차가 되었고, 4만 달러를 바라보는 유럽 국가들은 최근 600cc도시용 승용차 개발에 국민경제의 승부를 걸려고 하는 중이다. 반면 한국은 2만 달러를 막 넘은 시점에서 십대들의 승용차 구매 90%가 2000cc급 이상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승용차 크기가 두 번째로 큰 나라 한국, 승용차 평균 크기가 2000cc인 위대하고 훌륭하신 나라! 이대로 1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망한다!-203쪽

전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난 그렇게 믿지 않는다. 전쟁을 하면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고, 민족의 강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지갑을 열고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경제적 이득이 되는 구조를 만들기가 쉽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일에 기꺼이 지갑을 열면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259-260쪽

프랑스와 독일이 국민소득 2만 달러이던 시절에 대학의 연간 등록금은 10만 원이 안 되었고, 미국의 최상급 대학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지금의 한국 대학들보다는 훨씬 우수한 시설과 훌륭한 자원들을 가지고 대학이 운용되었다. 정말로 대학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한국 수준에서는 연간 50만 원 정도 받으면 충분하다. 그리고 정부가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이 좋은 나라이지, 정부가 이 모든 것을 방치하고 가정에서 대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 나라인가?-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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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1-1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2 월드컵 열광과 2004년의 이라크 파병을 나 역시도 끔찍하고 지긋지긋해했었지만, 단순히 미학적 감성의 문제라고만 여겼지, 거기서 '제국주의의 욕망'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수출주도형의 한국 경제가 필연적으로 식민지를 욕망하게 되는 체제라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30년 후의 한국에 예정되어 있는 것은 이웃 국가들(특히나 증오해 마지않는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이라는 경고는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무섭기까지 하다. 역시 자식 따위 낳으면 안 돼. 남은 인생 제대로 즐기자고.
 
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품절


국제적 상식에서 정상적으로 보면 김대중은 중도우파, 노무현은 민족주의와 극우파, 그리고 기탸 분류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의 '아말감'과 같은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개인적인 판단이다. -17쪽

돈을 사랑하려면 돈을 벌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마치 동학교도들이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듯이, '돈 버는 법'이나 <마시멜로 이야기>류의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과연 부자가 되는 데에 단 1퍼센트라도 도움을 줄까? 이런 종류의 책은 사는 순간 책값만큼 손해이고, 책을 읽는 시간에 또 그만큼 손해라는 경제적 비용편의 분석이 명확하게 나온다. 이걸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면, 목적과 수단이 조응하지 않는 비합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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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1-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고 경제학 박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덧붙여 돈 버는 데 관심 있다면 차라리 마케팅 이론서를 한 번 보라는 얘기가 <촌놈들의 제국주의> 어딘가에 나온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1830년대에 - 인용자주)자본가는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지위를 획득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재산만으로는 안되고 어던 이데올로기적 후광이 필요했었다. 부자는 교회나 왕실 혹은 예수과 학문의 후원자로서 등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21-22쪽

문학과 일간신문의 결합은 어느 동시대인의 의견에 따르면 공업적 목적을 위한 증기의 사용처럼 혁명적인 효과를 가지며, 문학적 생산의 모든 성격을 바꾸어놓는다. 설령 이런 비유가 과장되었고 문학의 산업화가 다만 일반적인 정신적 발전, 즉 그 시대의 예술창작 자체의 한 경향을 나타낸 데 불과하다 하더라도, 대단찮은 작가지만 창의적 사업가인 에밀 드 지라르댕이 그때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뒤마끄의 아이디어를 따서 1836년 <라 프레스>를 창간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획기적인 혁신은 그가 신문의 연간 구독료를 다른 것들의 반인 4프랑으로 고정시키고 결손분을 선전광고의 수입으로 메우려고 생각한 점에 있다. (중략) 그들은 신문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광고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구미에 당기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26-27쪽

(17세기에 - 인용자주) <르 그랑 씨뤼스>와 <아스트레>는 궁정귀족의 주요한 읽을거리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말하자면 개인 자격으로 그것들을 읽으며 거기에 탐닉하는 것을 하나의 악덕인 양, 적어도 하등 뽐낼 이유가 없는 하나의 약점인 양 생각했다. 보쉬에는 영국의 헨리에타 왕비에 대한 추도연설에서 유행소설과 그 시시한 주인공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고인을 찬양했는데, 그것은 이 문학장르가 당시에 공적으로 어떻게 평가되었는가를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사적인 오락에 관한 한 귀족은 고전주의적 예술규범에 얽매임 없이 전과 같이 구속받지 않고 모험소설과 엽기취미를 즐겼다. (중략)
소설은 18세기의 주도적 문학장르가 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그 시대의 문화적 문제, 즉 개인주의와 사회 사이의 대립을 가장 포괄적으로 깊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형태에서도 부르즈와 사회의 모순이 그렇게 강력히 적용한 형식이나, 어디에서도 개인의 투쟁과 패배가 그렇게 박력있게 묘사된 곳은 없다. -38-40쪽

낭만주의는 소설에서 개인과 세계, 꿈과 생활, 시와 산문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의 가장 적합한 서술방법을 발견하고, 이 갈등의 유일한 해결처럼 보이는 체념의 가장 깊이있는 표현을 찾아냈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괴테는 낭만주의와 정반대되는 해결책을 찾는데, (중략) 사람은 내면적으로 세계와 결합해 있을 때에만 그 세계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세계 속에 뛰어듦으로써만 세계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을 괴테는 강조한다. (중략) 스땅달과 발자끄는 괴테보다 팽배한 긴장을 훨씬 더 날카롭게 보았고 더욱 현시감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통찰이 기록된 그들의 사회소설은 낭만주의의 환멸소설뿐 아니라 괴테의 교양소설도 한 발 넘어선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낭만파의 현실모멸과 괴테식의 낭만주의 비판을 모두 극복한 것이다. 사회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관해서 일체의 환상을 허락하지 않는 냉철한 현실사회적 분석에서 그들의 비관주의가 생겨난다.-40-41쪽

(스땅달은) 고급 쌀롱과 한가한 향락적 생활을 좋아하며, 교양과 지식이 풍부하고 재치가 넘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또한 그는 공화정과 민주제로 인하여 삶이 빈약해지고 어두워지며, 거칠고 무식한 대중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세련된 방법으로 즐기는 섬세하고 교양있는 사회를 압도해버리지나 않을까 겁낸다. 그는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증오한다. 그러나 항상 그 민중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48쪽

자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운동에서 시작한다. 그 첫 대가는 꾸르베인데, 그는 서민대중 출신이며 부르즈와적 범절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는 예술가다. 왕년의 보헤미안 그룹이 흩어지고 그 멤버들은 낭만주의 기분을 내려는 부르즈와지의 총애물이 되어버린 후 이제 꾸르베의 주위에 새로운 써클, 말하자면 제2의 보헤미안파가 형성된다. <석공들>과 <오르낭에서의 매장>(1850)을 그린 꾸르베가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예술적 특징보다도 주로 인간적 특성들 때문이다. (중략) 꾸르베의 작품을 전통적 비평으로부터 변호하려는 것이 자연주의 이론이 생겨난 직접적 계기이다.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전시되었을 때 샹플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부터 비평가들은 리얼리즘에 찬성이냐 반대냐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 이 유명한 낱말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83쪽

꾸르베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이루어놓은 '깔로까가티아'(kalokagathia 선과 미의 통일적 완성)을 파괴하고, 수많은 혁명과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1850년까지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어던 심미적 이상을 배격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생활질서를 위해 투쟁하고 있음을 보수적 평론가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끄ㅜ르베 그림에 나오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추한 모습과 중산층 부인들의 뚱둥하고 저속한 모습이 기존 사회에 대한 항의이며, 그의 '이상주의에 대한 경멸'과 '진흙탕에서 뒹구는 짓'이 모두 자연주의의 혁명적 전투수단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이다. 밀레는 육체노동에 대한 찬양을 그리며 농부들을 새로운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도미에는 국가의 지주가 되는 부르즈와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부르즈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즈와적 관습과 예절 뒤에 감춰진 그 모든 도깨비놀음 같은 희극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정치적 배려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86쪽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정말 당시의 세계를 대표하였는가? 아니 당시의 세계 전부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대 미술감상자들의 가장 큰 부류를 대표했는가? 그들은 확실히 그림을 주문하고 구입하고 공적으로 비평하는 사람들, 도는 미술학교와 미술전람회를 관장한 사람들의 다수를 대표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현대예술은 실향민 신세가 되고 모든 실제적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자연주의 미술과 당시의 우아한 '벽 장식물'을 갈라놓은 것과 똑같은 간격이 당시의 본격적인 문학과 대중문학, 본격음악과 경음악 사이에 존재했다. 그리고 대중적 오락에 기여하지 않는 모든 문학과 음악은 당시의 진보적 미술과 마찬가지로 제대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중략) 문학이 예술과 오락의 이중역할을 하고 한 작품으로 교양수준이 다른 여러 계층의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일은 이제 끝장나게 된다.-91-92쪽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예술이 생산된 시기인 제2제정기는 동시에 현대를 풍미하고 있는 악취미와 비예술적 통속물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예전에도 엉터리 화가와 재능없는 작가들이 있었으며, 아무렇게 후다닥 만들어진 작품과 서투르고 시시한 예술적 아이디어가 있엇다. 하지만 가치 없는 것은 오인될 여지 없이 가치 없고 저속하고 몰취미한 것이어서, 알아달라고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중요성도 없었다. 잘(중략) 그러나 이제 이러한 가짜가 완전히 행세를 하며, 진짜의 껍데기를 쓰고 진짜를 대신하는 일이 통례가 된다. 예술감상을 가능한 한 편하고 힘 안 들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모든 곤란과 복잡성, 문제를 일으키고 골치 아프게 하는 모든 일을 피하는것, 요컨대 예술적인 것을 기분 좋고 발라맞추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목적인 것이다. 대중이 알면서도 일부러 자기의 수준 밑으로 내려간 '휴식'으로서의 예술,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은 이 시기의 발명인데, 그것은 모든 창작형태를 지배하지만 특히 가장 거침없고 과감한 대중예술인 연극에서 그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다.-113쪽

시민계급의 삶을 이상화하는 작업의 기초로서 결혼과 가족이란 제도만큼 적합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사심 없는, 가장 고상한 감정이 존중되는 사회형태의 하나로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서술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봉건적 속박이 풀어진 이래 사유재산의 안정과 영속을 여전히 보장해주는 유일한 제도였던 것도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어쟀든 가정의 이념은 외부의 위험한 침입자와 내부의 파괴적 요소에 대한 부르즈와 사회의 방파제로서 연극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116쪽

빅토리아조 회화의 주제는 역사, 시, 일화로 충만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문학적인' 회화인데, 이렇게 문학적 요소를 많이 포함해서라기보다 회화적 가치가 너무나도 빈약해서 유감스러운 하나의 잡종예술이다. 프랑스 회화의 순수하고 화려한 화풍이 영국에 발붙이기 어렵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관능성과 자발성에 대한 철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쫓겨났던 자연은 다시 뒷문으로 숨어들어온다. - 빅토리아 시대의 악취미의 독특한 기념관인 챈트리 컬렉션에는 속세를 더나면서 세속의 옷을 모두 벗어버린 한 수녀의 그림이 있다. 그녀는 완전한 나체로 등불이 희미하게 비치는 교회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뒤에 서 있는 수도사들을 향하여 유혹하는 듯한 자세로 부드러운 몸을 돌리고 있다. 이 그림보다 더 보기 거북한 것을 상상하기는 곤란한데, 그것은 가장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나쁜 유의 춘화에 속하는 것이다. -139-140쪽

디킨즈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성공적인 문필가의 한 사람이며, 아마도 근대의 위대한 작가들 중 가장 인기있는 작가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기 시대에 대한 저항이나 환경과의 긴장된 관계에서 작품이 생겨나지 않은, 독자대주으이 요구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 낭만주의 이래 유일한 참다운 작가이다. 그는 셰익스피어 이후 유례가 없는 인기를, 고대의 무언극이나 음유시인의 대중성에 관한 우리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디킨즈에게 있어서 그의 세계관의 전체성과 완전성은, 대중에게 이야기할 때 그로서는 아무런 양보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즉 그 자신이 독자들과 똑같이 좁은 정신적 시야와 똑같이 분별없는 취미와 그리고 비할 수 없이 더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 소박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작가란 디킨즈와 반대로 언제나 독자에게로 기어내려가야만 한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체스터턴은 옳게 지적했다.-151쪽

지식인은 부르즈와 계급에서 나타났고, 그 선구자는 프랑스 대혁명에의 길을 준비한 시민계급의 저 전위였다. 그들의 문화적 이상은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적 이상은 인습과 전통에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진보적 인간성의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중략) 지식인들의 진리와 미의 절대성을 믿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을 '더욱 높은' 현실의 대표자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사회적 무력을 보상해주기 때문이며, 부르즈와지가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위치에 서려하는 지식인의 이 요구를 눈감아주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보편적 인간의 가치가 존재하고 계급대립의 해소가 가능하다는 증명을 본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학문을 위한 학문 혹은 진리를 위한 진리는 다만 실무로부터의 지식인의 소외의 산물일 뿐이다. 여기에 포함된 이상론은 부르즈와지로 하여금 정신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억누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다른 한편 지식인은 이렇게 하여 권력 있는 시민계급에의 질투에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다. -164-165쪽

서구의 소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파멸하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러시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그리고 같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이탈하도록 하려는 악령과의 투쟁을 묘사한다.-172-173쪽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의 작품에 비할 때 19세기 후반의 모든 서구문학은 지치고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안나 까레니나>와 <까라마조프 형제>는 유럽 자연주의의 정상을 이룬다. 이들은 커다란 초개인적 질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감각을 조금도 잃어버림이 없이 저들의 심리학적 업적을 집대성하고 능가하는 것이다. 사회소설은 발자끄에서, 교양소설은 플로베르에서, 삐까레스끄 소설은 디킨즈에서 각기 그 완성을 보듯이 심리소설은 도스또예쁘스끼와 똘스또이에 이르러 그 완전한 성숙기에 들어간다. 이 두 소설가는 한편으로는 루쏘, 리처드슨 및 괴테의 감상소설에서, 다른 한편으로 마리보, 꽁스땅 및 스땅달의 분석소설에서 시작된 발전단계의 최종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174-175쪽

그의 예술에는 발자끄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치고 모욕당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이 있으며, 비록 그의 소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것이 단순히 문학적 관습이나 낭만주의의 상투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빈곤의 존엄성 같은 것이 있다. 적어도 도스또예프스끼는 정말 빈곤에 관해 쓸 줄 아는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조루즈 쌍드나 외젠느 쒸처럼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쓰거나 디킨즈처럼 과거의 빈곤에 대한 막연한 기억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거의 평생을 궁핍 속에서 보내며 이따금씩 문자 그대로 굶어본 사람으로서 쓰고 있기 때문ㄴ이다. (중략) 그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나 농민들과 아무런 긴밀한 접점이 없다. 그가 정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지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계약 마감에 쫓기면서 일하고 평생동안 선금을 안 받고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으며 흔히는 한 장(章)의 첫머리가 이미 인쇄소에 가 있는데 그 끝을 어떻게 맺을지를 아직 모르고 있는 '문학 프롤레카리아'요 '우편역마'라고 했다.-178-179쪽

똘스또이의 예술과 사상을 불모성과 무기력의 운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신체적, 정신적, 사실들에 대한 그의 날카롭고 냉철한 눈과 그 자신이나 남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에 대한 그의 혐오가 똘스또이의 종교적 태도에서 모든 신비주의와 독단주의를 제거해주며 그의 기독교적 윤리가 영향력이 큰 정치적 요인으로 발전되도록 한다. 러시아정교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열성이나 슬라브파 공통의 친교회적 경향 모두 그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가 신앙에 도달한 것은 합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의 이른바 개종이라는 것은 아무런 직접적인 종교적 체험 없이 일어난 완전히 이성적인 과정이다.-194쪽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잃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는 느낌, 두 번 다시 발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적 방법은 모든 예술적 수단과 기교를 동원하여 무엇보다 이러한 헤라끌레이또스적 세계관을 표현하려고 하며, 현실이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요,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임을 강조하려 한다. -202쪽

심미주의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발전의 절정에 달한다. 그 특징적 성격들, 즉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요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주의적인 감각주의는 이제 예술 일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중략) 이것은 인생이 예술의 형태를 취할 때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화해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최후의 위대한 인상주의자요 심미적 쾌락주의자인 프루스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억과 환상과 심미적 체험 속에서만 인생이 비로소 뜻깊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체험을 가장 강렬하게 실감하는 것은 현실 가운데서 인간이나 사물들과 마주칠 때가 아니라 - 이러한 '시간'과 실감은 늘 '잃어버리고' 마니까 - 우리가 '시간을 되찾을' 때, 이미 우리 삶의 행위자가 아니고 관찰자일 때, 예술작품을 창조하거나 감상할 때, 즉 우리가 기억을 할 때라는 것이다.-219쪽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당대의 심미적 쾌락주의를 '데까당스'라고 즐겨 불렀다. 섬세한 향락자 데제쌩뜨는 동시에 버릇없는 '데까당'의 원형이다. 그러나 데까당스의 개념은 심미주의의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특징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문화의 몰락과 위기라는 느낌, 즉 흥망성쇠라는 한 생명과정의 종말에 서 있으며 한 문명의 해체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224쪽

그러나 보들레르도 체호프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랭보 같은 인간에게 삶이 어떠한 지옥으로 전개될지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중략) 랭보, 그는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 신경쇠약자, 하릴없는 건달패, 갈 데까지 심성이 비뚤어진 위험인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어학선생, 길거리의 장사꾼, 써커스단의 인부, 부두노동자, 농장의 날품팔이, 선원, 네덜란드 군대의 지원병, 기사, 탐험가, 잡상인 따위로 지내다가 아프리카 어디에서 전염병에 걸려 마르쎄유의 어느 구호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17세에 불멸의 시를 쓰고 19세엔 시작을 완전히 걷어치운 다음 죽을 때까지 문학 얘기를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은 천재, 자기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팽개치고 일찍이 그 보물을 가졌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완전히 부정했던, 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범죄자, (중략)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요 극단적인 자기부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점잖고 예의바르고 까다로운 플로베르와 그의 교양있고 예술을 이해하는 세련된 친구들이 뿌린 씨의 열매인 것이다-232쪽

1890년 이후 '데까당스'라는 말은 암시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 '상징주의'가 주도적 예술경향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중략)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때로 매우 어렵다. (중략) 시각적, 음향적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다른 감각재료들을 혼합, 결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러 예술형태들 사이의 상호작용, 특히 말라르메가 시의 본령을 음악에서 탈환하는 겋ㅅ으로 이해한 점에서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적'이다. 그러나 비합리주의적, 정신주의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는 또한 자연주의적, 유물론적 인상주의에 댛한 날카로운 반동을 뜻한다. 인상주의에서는 감각적 경험이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임에 반하여, 상징주의에서는 일체의 경험적 현실은 단지 관념세계의 비유일 뿐인 것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에서, 즉 시의 핵심으로서의 메타포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풍성한 형상들로 인도한 발전과정의 총결산을 대변한다.(중략) 상징주의는 과거의 시 전체에 대한 반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전에는 알려진 적도 없고 강조된 일도 없는 어떤 것, 즉 '순수시'를 발견하는 것이다.-233-234쪽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 본연의 삶에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그렇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시간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베르그쏭 철학을 정당화시켜준 것이 프루스트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 소설에 와서 비로소 베르그쏭의 시간관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의 귀결점으로서의 현재의 국면에서 처음으로 실감있는 삶과 약동하는 움직임과 색채, 관념적 투명성과 정신적 내용을 획득한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진정한 낙원이란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269쪽

현대예술은 인상파의 부드러운 화음과 아름다운 색조를 거부하는, 근본적으로 '보기 싫은' 예술이다. 회화에서는 '회화적' 가치를 부인하고, 시에서는 정서의 조화와 아름답고 일관성있게 구성된 이미지를 배격하며, 음악에서는 멜로디와 음조를 파괴한다. 현대예술은 모든 즐겁고 기분 좋은 것, 모든 순전히 장식적이고 쾌락적인 요소를 한사코 기피하는 것이다. (중략) 때로는 순수한 구조를 강조하고 때로는 어떤 형이상학적 정열의 황홀경을 내세우지만 어떻게든 인상주의 시대의 자기만족적인 심미주의에서 벗어나려 한다. 인상주의도 현대의 심미주의 문화가 처한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 문화의 그로떼쓰끄한 면, 허위에 찬 면을 처음으로 강조한 것은 인상파 이후의 예술이다. 모든 감각적, 쾌락주의적 감정에 대한 투쟁이 여기서 연유하며, 삐까소, 카프카, 조이스 등의 작품에서 암담하고 우울하고 고통에 찬 면도 여기서 온다. 종래 예술의 감각주의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 가상적 세계를 해체하려는 욕망이 절대적이어서 기존 예술의 기호체계를 단호히 거부한다.-290쪽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더 넓은 정신의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시간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발전을 또 한걸음 밀고 나갔다. 전에는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 아직 비어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을 참다운 삶으로 가득 채워줄 예술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309쪽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문화정책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예술의 세계에서도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가장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겨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324-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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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2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권은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가 특히 많았다. 최근 한 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변화가 빠르고 다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 한 세기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읽을 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프루스트에 대한 해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저자의 마지막 결론은 "싸우는 수밖에 없다"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싸움에 기꺼이 동참하려고 한다. 사회적, 경제적 조건 때문에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알 기회를 처음부터 빼앗겨 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이러한 유산을 권력자들이 멋대로 빼앗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은 분하고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실제로 르네쌍스는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제도로 나아가고 있던 중세적 발전경향을 이때부터 전유럽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합리주의라는 방향으로 심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예술의 규범이 되는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프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은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이다. (중략) 모든 예술의 발전은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던 전반적인 합리화 과정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지고, 비합리적인 것은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관계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 모순이 배제되고, 그리고 공간의 부분들 상호간에도 모순이 배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앎답다'는 미적 감정을 갖게 된다. 투시도법이 공간의 수학화이고 비례의 원리가 하나의 묘사 속에 나타난 형상들의 체계화이듯이, 예술적 질을 말하는 일체의 규준들은 점차 이성적인 근거에 종속되고, 예술의 법칙들은 하나같이 모두 합리화되었다.-27쪽

르네쌍스는 소상인이나 수공업자의 문화도 아니었고 큰 교양이 없는 시민계급의 문화도 아니었다. 르네쌍스는 오히려 다른 계층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문화를 독점하려고 했던 비민중적이고 라띤화된 교양 엘리뜨의 문화였다. 르네쌍스 문화의 주역을 담당한 계층은 당시의 인문주의적, 신플라톤주의적 정신조류와 관련된 계층 즉 대체로 동일한 사고방식과 단일성을 지닌 지식인계층으로서, 이러한 단일성은 전체적으로는 중세의 성직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르네쌍스의 중요한 예술품들은 이러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광범위한 대중들은 당시의 중요한 예술품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아는 경우에도 이러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 부적합한 비예술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며, 자신들의 심미적 감정은 질이 훨씬 떨어지는 작품들로써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때부터 앞으로의 예술발전에서 근간을 이루게 될 교양있는 소수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대중 간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격차는 지금까지의 유럽 예술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73쪽

초기 르네쌍스의 예술가 아뜰리에는 아직도 수공업자조합이나 길드의 작업장이 지녔던 공동체 의식에 의해 운영되었다. 말하자면 예술품은 아직도 독자성과 특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외부적인 요소를 일체 배격하는 어던 한 개인의 표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만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고 제자와 조수들과는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비로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도 미켈란젤로는 최초의 현대적 예술가인 셈이다.-77쪽

아카데미 교육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적 예술관은 레온 바띠스따 알베르띠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수학이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인 근본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는데, 그 이유는 비례의 학설과 원근법 이론이 모두 수학에 속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기술자나 자연연구가가 이제 그들의 수학적인 지식으로 인해 지식인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듯이 많은 경우에 기술자, 자연연구가와 동일인이던 예술가들 또한 이제부터는 단순한 장인과 구별되기를 기대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수단이 "일곱 학예" 내지는 "자유교양"에 한몫 끼이기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87-88쪽

매너리즘은 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식만이 이 시기를 독자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며 특히 이 시기의 초기와 말기에는 바로끄적인 경향과 혼합되어 있었다. 매너리즘과 바로끄적인 경향은 이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뒤섞여 있었다. 바로끄의 격정적인 표현주의적 예술의지와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초현실주의적' 예술관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두 예술양식의 대립은 실제로는 발전사적인 대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인 대립이다. 매너리즘의 정신귀족적이고 본질적으로 전유럽적인 교양계층의 예술양식이었다면, 초기 바로끄는 좀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좀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경향의 표현이었다. 성숙한 바로끄가 한층 더 섬세하고 한층 더 배타적이던 매너리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은 반종교개혁운동에 따라 교회의 프로파간다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카톨릭이 다시 민중적인 종교가 되는 것과 때를 같이한다. -144-145쪽

종교개혁의 사회학에서 결정적인 사실은 이 운동이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에서 출발하였고 이 운동을 전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성직자들의 탐욕, 면죄부와 교회 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장사행위였다는 점이다. 중략) 그러나 성직자들의 봉건적 특권에 대한 투쟁에 열광적으로 참가했던 부르즈와들은 그들의 목적이 일단 달성되자마자 이 운동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을뿐더러, 하층계급의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일체의 진보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처음에는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민중운동으로 시작되었던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제 주로 지방 영주나 시민계급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루터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안목으로 혁명계급이 성공할 전망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으로,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사회계층에 점차 편승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대중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도적과 같은 흉악한 농민들'이라고 선동, 사주하였다.-154쪽

종교개혁운동이 오로지 정치에만 관심이 있는 영주와 무엇보다도 경제에만 관심이 있는 시민계급의 종교 신조가 되고 새로운 교회조직으로의 길을 밟게 되자, 이에 가장 큰 실망을 느낀 계층은 지금까지 종교개혁을 단순히 하나의 정신적 운동으로 간주해왔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이었다.
종교 생활의 내면화, 심화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했던 곳은 로마였고 -물론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교황이나 교황 측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독일의 종교개혁 때문에 다가오는 교회분열의 위험성을 유럽의 어느 곳보다 가장 잘 의식하고 있었던 곳 역시 로마였다. 카톨릭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잘못과 근본적인 수술의 필요성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계몽된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주의는 교황의 절대적 권위와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고 하였다.-156쪽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꼰다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카톨릭 개혁운동의 '인문주의적' 제1기는 종말을 고한다. 개명되고 인간적이며 관용적이던 싸돌레또, 꼰따리나, 뽈레 들의 시대도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현실주의의 원리가 승리를 구가했다.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을 정복할 능력이 없음이 입증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이미 관용적인 르네쌍스에서 비관용적인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1542년에는 종교재판제도가 1543년에는 출판검열제도가 실시되었고 1545년에는 뜨렌또 종교회의가 여렸다. 레겐스부르크에서의 실패는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고 권위와 권력에 의해서 카톨릭의 재건을 기도하도록 만들었다. 고위성직자 중에서 인문주의자들인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161쪽

반종교개혁 운동의 근원적이고도 직접적인 예술적 표현이 매너리즘인지 아니면 바로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양분되어 있다. 연대적으로 보면 매너리즘의 반종교개혁운동에 더 가깝고, 뜨렌또 종교회의 기간의 정신주의적 태도 역시 감각적인 바로끄보다는 매너리즘에서 더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운동의 예술적 프로그램, 즉 광범위한 대중에게까지 예술을 통해 카톨릭교를 전파하는 것은 바로끄에 이르러서이다. 뜨렌또 종교회의의 참석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확실히 매너리즘에서처럼 층이 엷은 지식인들을 상대로 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끄에 와서 실현을 보게 되는 민중적 예술이었다. (중략) 매너리즘이 바로끄에 배턴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매너리즘이 반종교개혁운동이 제시한 교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낼 능력이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70쪽

뜨렌또 종교회의 기간을 두고 "요조숙녀인 체하는 얌전빼기의 탄생기"라고 규정한 학자가 있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귀족주의적인 또는 초현세적인 경향을 지닌 문화는 나체의 묘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고대 초기의 귀족주의 사회와 중세의 기독교 사회는 성적인 문제에 관해 '얌전을 빼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체의 묘사를 기피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인간의 육체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화과 잎'으로 국부를 가림으로써 성적인 것을 숨기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강조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로틱한 감정의 애매성은 매너리즘과 더불어 비로소 대두하였고, 이러한 애매성은 가장 솔직한 감정과 가장 역겨운 허식, 가장 엄격한 권위의식과 극단적인 개인주의, 가장 정숙한 표현과 가장 외설적인 형식 등의 극단적인 대립을 그 내부의 지니고 있던 매너리즘 문화의 분열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경우에 '얌전빼기'는 (중략) 외설성에 대한 의식적인 반동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억제된 외설성의 한 형태인 것이다.-167-168쪽

아카데미의 본래 목적과 의도는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미술가들을 길드에서 해방시켜 수공업자보다 더 높은 사회적 위치로 올려놓는 역할을 하였다. (중략) 이들은 단체로서의 길드만이 아니라, 교육기관으로서의 길드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기관으로서의 아카데미는 결국 엄격하고 반진보적이던 구제도를 답습하는 또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게 되었다. 오히려 아카데미의 수업은 길드보다도 한층 더 엄격한 규율에 얽매였다.-174쪽

브뢰겔의 그림에서는 상이한 여러 요소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매너리즘에서와 같은 우주적인 감정이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띤또레또에게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우주의 숨결 앞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브뢰겔에서는 우주 전체가 일상적인 경험의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브뢰겔의 회화는 비민중적이라는 점에서도 다른 매너리즘 예술과 공통된다. 이 점 역시, 우리가 그의 양식 전체를 건강하고 소박하며 분열되지 않은 자연주의로 간주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이해되어 왔다. (중략)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려는 계층은 그들이 목적으로 설정한 생활상태의 묘사를 보기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오려 하는 현재 생활 상태의 묘사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중략) 19세기 노동자 연극이 민중극장이 아닌 대도시의 상류층이 애용하던 극장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듯이, 브뢰겔의 예술 역시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계층, 아무튼 농민이 아닌 도시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189-192쪽

새로이 기사도를 숭배하고 예찬하는 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 나라는 에스빠냐이다. 에스빠냐에서는 700년에 걸친 아랍인들과의 오랜 싸움을 치르면서 신앙과 명예의 원칙들, 그리고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명성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고 또 이딸리아 정복전쟁, 프랑스에 대한 승리, 식민지의 확대, 라띤아메리카로부터의 금은보화의 착취 등으로 인해 군인계층은 말하자면 저절로 영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회생한 기사도 정신이 가장 광채를 발한 에스빠냐에서는 기사적 이상이 지배가 한갓 허구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기사도적 정신에 대한 환멸 또한 가장 컸다. 승승장구의 에스빠냐도 잇따른 정복과 거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소상인과 영국 해적들의 경제적 지배권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에스빠냐는 역전의 용사도 부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자존심이 강한 하급귀족들(Hidalgo)은 비록 무뢰한이나 부랑자의 신세까지는 안 가더라도 빈곤과 배고픔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아래에 계속)-194-195쪽

(위에서 계속) 요컨대 오랜 복무 끝에 제대한 군인이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해결해야만 했던 온갖 문제들을 위해서 기사소설은 가장 부적합한 준비였던 것이다.(중략)
돈끼호떼가 그의 이상과 세상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현실이 마술에 걸린 탓으로 돌리고 사물의 주관적 질서와 객관적 질서 사이의 간극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세계사적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제 그에게는 꿈의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의 세계이자 반대로 현실은 악마들로 가득 찬 마법의 세계로 보이고 있음을 말해줄 뿐인 것이다. (중략) 세르반떼스에게서 새로운 것은 (중략) 이상적, 낭만적 세계와 현실적, 합리적 세계 중 그 어느 하나도 절대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세계상에 나타난 화해할 수 없는 이원론 곧 이념은 현실세계에서 실현될 수 없고 현실은 이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194-198쪽

발자끄와 셰익스피어는 둘 다 자신의 근본적인 보수저 정치태도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전위용사였던바, 그것은 그들의 동시대인들이 대부분 당대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었던 데 반해서 그들은 그것이 위기의 상황이요 그대로는 지속될 수 없는 상황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군주제나 시민층 또는 하층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든지간에 그 자신이 그 처럼 많은 이익을 보았던 국가적 흥륭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도 비극적인 세계관과 깊은 비관주의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강한 사회적 책임감과 세상일들이 그렇게 다 잘되어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확실히 혁명가나 투사형의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발자끄가 시민계급의 심리를 폭로함으로써 자신이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게 근대 사회주의의 한 선구자가 되었듯이, 셰익스피어 또한 건강한 합리주의를 통하여 봉건귀족의 재등장을 저지한 사람들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203쪽

16세기 말경, 이딸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 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끄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245쪽

왕은 신흥귀족의 출현으로 추락한 귀족계급의 위신을 보상하기 위하여 모든 공적인 예술과 문학 수단을 통해 귀족의 도덕적, 정신적 모범성을 강조하는 신화를 퍼뜨렸다. (중략) 의리와 영웅적 행위라는 것은 노예적인 복종이 국가의 이익 및 전제군주의 뜻에 맞을 때 문학적 선전이 붙여준 이름에 불과하다. 예절이라는 것도 대부분 '싫은 일에 억지로 좋은 얼굴'을 하는 것을 뜻하며, 관용이라는 것 역시 이제 거지가 되었다는 것을 잊게 해주는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절제와 자제력만이 귀족적, 궁정적 생활이 요구하는 유일한 진정한 미덕이었다. 고상하고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그의 감정과 격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중략) 그는 비개인적이고 남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취하며 냉정하고 엄격하다. 그는 일체의 과시벽이나 노출증은 천민적인 것이고 일체의 격한 감정은 병적이고 종잡을 수 없으며 혼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254-255쪽

프랑스 궁정의 예의범절과 유행 및 예술이 이처럼 국제적으로 통하게 된 것은 프랑스 문화의 국민적인 성격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가능했다. 프랑스인들은 왕년의 로마인들같이 세계시민으로 자처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정신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라씬느(J.B.Racine)의 모든 비극 속에서 프랑스인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256쪽

중세적 문화를 다시 재생시키려는 시도가 매너리즘을 마지막으로 해서 좌절되고 난 후에, 이제야말로 중세는 그 종말에 이른 것이다. 봉건적 귀족은 무사계급으로서는 국가 내에서 모든 의의를 상실하였고, 정치적 공동체들은 이제 절대주의적인, 다시 말해 근대적인 민족국가로 변모하였으며, 통일적 기독교 세계는 수많은 교회 및 종파로 분열되었고, 철학은 종교적인 성향의 형이상학에서 독립하여 '제반 학문의 자연적 체계'로 변모하였다. 끝으로 예술은 중세적 객관주의를 극복하여 주관적 체험의 표현으로 변하였다. 근대적 고전주의를 고대 및 르네쌍스의 고전주의와 구분짓는 그 부자연스럽고 강제적이며 때로는 경련적인 특징이 생겨나는 이유는 전형적인 것과 비개인적인 것, 그리고 보편타당한 것의 추구가 이제는 예술가의 주관주의에 맞서서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미학의 모든 법칙과 규칙들은 형법 조문을 연상시키며, 이러한 조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의 경찰력이 필요하였다.-260-261쪽

개신교가 반드시 혁명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카톨릭 역시 결코 반동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카톨릭 신자보다는 깔뱅주의자가 좀더 덧떳한 양심을 갖고 그의 왕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어쨌든 네덜란드의 봉기는 보수주의자들의 혁명이었음이 확실하다. 반란에 성공적이었던 북부의 여러 주는 중세적 자유 개념과 구태의연한 지방자치제를 옹호하고 있었다. 북부의 여러 주가 꽤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절대주의가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유일한 국가형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하겠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성공이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시대에 도시연합적 조직이 유지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79쪽

17세기 홀란드에 와서 새롭다고 할 것은 미술생산이 주로 국내 수요자에 의존하였고 국내 수요자가 생산을 다 소화할 능력이 없게 되자 예술계에 심각한 위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예술가의 과잉과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예술사에서 이 때가 처음인 것이다. (중략) 예술가가 그의 사회적 근거를 상실하고 그의 생존이 문제시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 그가 생산한 것이 과잉상태이기 때문에 그 자신도 잉여의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홀란드의 화가들은 대부분 매우 가난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본업 이외에 다른 부업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반 고예은 튤립 장사를 했고, 호베마는 세금징수원 노릇을 했으며, 반 데 벨데는 옷감가게 주인이었고, 얀 스텐과 아르트 반 데르 벨데는 술집 주인이었다. 중요한 화가일수록 대체로 가난이 심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그래도 좋은 시절이 있었지만, 할스는 한 번도 인기를 얻어본 적이 없었고 반 데르 헬스트 같은 화가의 초상화에 지불된 액수의 돈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렘브란트와 할스뿐만 아니라 홀란드의 세번째 가는 화가인 베르메르 또한 생활고와 싸워야만 했다. -290쪽

궁정적, 보수적 문화에서는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는 결코 유명해지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일단 인정을 받은 후에는 아마 시민적, 자유주의적 홀란드에서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홀란드 사회는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만 허용했고, 그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순간 가차없이 그를 버렸던 것이다. 예술가의 정신적 실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험에 처해 있게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사회질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도 예술가에게는 완전히 편안한 것이 못 된다. 전자가 자유를 속박한다면 후자는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유 속에서만 안전하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안전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쉬는 예술가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아무튼 17세기는 '자유와 안전의 결합'이라는 이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세기였다.-299-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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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2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개혁의 변질과 매너리즘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고 재미있었다. 자유주의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박해를 받는다. 이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는 에피쿠로스 식의 "숨어 살아라!"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 같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구석기 시대 그림의 작자는 그 자신이 사냥꾼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냥꾼으로서의 예리한 관찰력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희미한 발자국이나 냄새만으로도 어떤 특징을 지닌 무슨 짐승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유사점과 차이점을 간파하는 날카로운 눈과 갖가지 음향을 식별하는 예민한 귀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외계를,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향하고 있게 마련이었다. 이와같은 태도와 능력이야말로 자연주의 예술에 쓸모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신석기시대의 농사꾼에겐 더이상 사냥꾼의 예리한 감각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감각적인 예민성과 관찰력은 퇴화하고 그 대신 다른 능력, 무엇보다도 추상화 및 합리적 사고의 능력이 개발된다.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농경, 목축 경제의 생산방식이나 극도의 추상화, 양식화를 지향하는 당시의 형식주의적 예술에 똑같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7쪽

이집트 예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하나의 단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작품군 사이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작품 하나 하나 속에 있는 것이다. 즉 강하게 인습에 사로잡히고 딱딱할 정도로 의례적이며 기념비적인 엄숙함을 가진 양식의 한구석에는 반드시 더 자유롭고 더 분방하고 더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수법이 눈에 띈다. (중략) 즉 지배층에 속한 사람은 항상 궁정풍의 권위를 재현하는 양식으로 그려진 반면 하층민 사람들은 통속적인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중략) 적용해야 할 양식을 대상에 따라 바꾸는 이러한 수법은 미술사 및 문학사에서는 결코 신기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가 인물을 구별하여 묘사할 때 사용했던 두 가지 방법, 즉 하인과 광대 역 등의 대사에는 평범한 산문을 사용하고 주인공이나 귀족들은 예술적인 운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소재에 따라 양식을 바꾸는 이 '이집트적' 수법과 같은 것이다.-70-71쪽

시는 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함과 동시에 서정적인 성격도 잃어버리고 서사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서사시'야말로 유럽 문학에서 종교적 의례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것으로서는 우리가 알기로 가장 오래된 문학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 르뽀, 즉 전쟁중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의 연대기풍의 서술에서 비롯된 것으로, 애초에는 그 부족이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약탈행각에 관한 '최신의 보고'에 한정되었던 것 같다.-89-90쪽

인간은 생활을 위한 직접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비교적 안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전에 필요에 따라 무기나 도구로서 발명한 정신적 수단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는 일들에 관해서 원인을 캐고 설명을 구하고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실용적인 지식은 특수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연구가 되고,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추상적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리하여 원래는 마술이나 종교의 부속품, 선전과 자기찬미를 위한 도구, 또는 신과 악령과 인간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예술도 순수하고 자율적인, 즉 '이해타산을 떠난' 형식, 예술 그 자체와 아름다움만을 위한 예술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본래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들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목적에서만 생겨난 명령이나 금지, 터부 등이 마침내 '순수' 윤리의 규범이 되고 도덕적 인격의 완성과 실현을 위한 지침으로 변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112-113쪽

(위에서 계속) 실용형식에서 이념형식으로, 구체적인 형식에서 추상적인 형식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학문의 세계에서나 예술, 도덕의 영역에서나 그리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스 이전에는 순수인식, 이론적 탐구, 합리주의적 학문 등이 없었듯이 우리들이 오늘날 말하는 의미로서의 예술, 즉 항시 순수형식으로서도 받아들여지고 즐길 수 있는 예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술을 생존투쟁의 무기로만 보고 그러한 예술에만 의미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예술이란 것은 모든 실용적 목적과 효용, 모든 미학 외적 이해관계에서는 독립되어 있는 단순한 선과 색의 유희, 리듬과 조화, 현실의 단순한 모방과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으로의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아마도 예술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예술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즉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의 순수한 탐구로서의 학문의 이념을 발견하고 있던 바로 그 무렵, 그리스인들은 예술분야에서도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은,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최초의 징조라고 할 수 있는 순수예술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내놓았다.-112-113쪽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개별적으로 자율화된 사실의 이면에는 정신기능의 형식화라는 전제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활동이 이미 실생활에서의 효용만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활동 자체의 독자적인 완벽성이라는 관점에서도 평가되도록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증략) 그리스 이전의 문명에서도 각기 올바른 과학적 관찰이나 추론 또는 계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지식과 능력의 모두가 주술, 신화, 종교적 도그마 등과 혼합돼 있어서 언제나 효용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종교, 신앙, 미신 등의 속박을 받지 않고 합리적으로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실용목적 그 자체를 도외시한 학문은 그리스인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었다.-114-115쪽

그리스 시대나 그리스의 영향이 아직 강했던 시대의 로마 미술가들은 시간적인 현상을 공간적인 수단으로 표현하려고 할 때, 레씽의 유명한 문구대로 '의미심장한 순간'을 택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움직임'이 없지만 무한한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는 어느 한 순간의 정경 속에다 시간적인 길이를 가진 사건 전체를 압축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중략) 츠 비크호프는 로마시대 후기의 미술 및 중세 그리스도교적 미술의 묘사방법으로서 이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전자의 '분할적' 방법에 대비되는 '연속적'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이 '연속적' 방법이란 서사시적, 설명적, '영화적'인 예술의욕에서 생겨난 서술방법, 즉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어떤 사건의 갖가지 단계를 하나의 무대 또는 풍경의 틀 속에 함께 집어넣고 더욱이 주요 인물들은 각 단계마다 몇번이라도 거듭 그러녛음으로써 개개의 장면은 마치 만화책에서 이야기가 차례차례로 펼쳐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영화의 연속성을 상기시키는 묘사방법인 것이다.-156-157쪽

그리스, 로마 예술에서 대상의 묘사는 정면성에서 출발하여 다시 정면성으로 귀착했다. 즉 일면적이고 직선적인 아케이즘 양식에서 출발하여 자유스러운 고전주의 시대와 극도의 긴장에 찬 헬레니즘기 바로끄를 거쳐 로마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평면적이고 좌우의 균형을 지키며 매우 엄숙한 일종의 정면존중주의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계급적인 예속 상태에서 자율과 유미주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종교적 의존의 시대로, 권위적인 사회질성의 묘사에서 민주제와 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정신적 권위의 표현으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159쪽

중세를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적 시대로 보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딘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어쟀든 이 세 시기 사이에 놓인 단층은 중세 전체를 그 앞뒤의 시대와 갈라놓고 있는 단층보다도 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 시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 가지 변동들 - 즉 공로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의 탄생이라든가 봉건적 자연경제에서 도시적 화폐경제로의 전환, 서정적 감수성의 탄생과 고딕 자연주의의 발달, 시민계급의 해방과 근세 자본주의의 맹아 - 은 근대적 생활감정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르네쌍스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177쪽

안드레아스 호이슬러(Heusler)도 지적하듯이, 영웅 이야기가 반드시 처음에 막연한 형태의 전설로서 작자도 없이 구전되다가 후에야 어떤 한 직업시인의 첨삭을 거쳐 하나의 문학작품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영웅전설은 그 발생 당초부터 하나의 시, 하나의 노래이고 또 그런 형태로서 전승되고 변형되는 것이다. 서사시라는 것은 이것이 나중에 더 장편화한 것으로서 때에 따라서는 원래의 짧은 작품을 토대로 구성되는 일은 있어도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문자로 싀어 있지 않은 완전히 자연발생적인 설화는 고립된 단편적 주제들, 일관된 줄거리가 없는 산만한 역사적 사실의 일화들, 각 고장마다 있는 짤막한 전설들 등을 주워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민중이나 익명의 민중시인이 제공하기도 하는 건추갖재에 속하지만 영웅가요를 영웅가요로 성립시키고 서사시를 서사시로 성립시키는 본절적인 요소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227-228쪽

행정기구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의 부족, 이민족의 침략 위험과 이에 맞서서 광대한 영토를 방위하는 어려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로마시대 말기부터 있었다. 거기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훈련된 관리의 부족, 이민족 침량 위험의 증대와 장기화, 그리고 주로 아랍인에 대항하기 이한 장갑기병대를 도입할 필요성 등으로 인해 새로운 난제가 추가되었다. 특히 이 신식 전력장비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고 게다가 비교적 장기간의 훈련기간이 필요했으므로 국가로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재정적 부담을 의미했다. 봉건제도는 9세기 국가가 이러한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 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새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244쪽

로마네스끄의 그리스도 수난상은 천대받고 고난에 찬 신의 묘사를 거부하던 과거 시대와 구세주의 상처를 일일이 들추는 데서 오히려 쾌감을 맛보던 그 이후 시대 사이의 중간지점에 서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은 초기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구세주가 죄인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생각이 아무래도 좀 거북스러운 것이었다. 칼롤링어 왕조의 미술에 이르면 오리엔트에서 도래한 십자가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천대받고 고통스러운 예수 모습을 그리지 않으려는 경향은 여전했다. 당시 귀족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육체적 고통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네스끄 미술의 수난상에서도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늘어진 경우는 드물고, 대개의 경우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며 보통은 눈을 뜨고 있을뿐더러 왕관을 쓰고 옷을 걸치고 있는 예도 많다. (중략) 승리자의용모를 갖추고 있는 이들 그리스도상에 상응하는 것이 당시의 성모상인데, 그것은 고딕시대 이래 우리들에게 친숙해진 사랑과 고뇌를 나타낸 성모상과는 달리 인간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천상의 여왕으로 그려진 마돈나인 것이다.-260쪽

고딕(Gotik, Gothic)의 발생은 근세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고딕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감수성이나 표현방식에 비하면 중세 초기의 미술은 단순히 유연성이 없고 딱딱할 뿐 아니라 - 고딕 자체도 르네쌍스에 비할 때 그런 인상을 주지만 - 고칠고 매력이 없다는 인상마저 준다. 미술은 고딕에 이르러서야 또다시 정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이란 말의 본래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하 수 있는 인물을 담은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263쪽

왕년의 영웅가요는 노래부르기 위한 것이었고, 샹송 드 제스뜨는 낭송용이었으며, 초기의 궁정서사시도 아마 낭송되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새 시대(중세 후기, 11세기 경 고딕 시대 - 인용자주)의 연애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는 이제 주로 부인들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졌다. 문학작품의 감상자 중에서 여성이 다수를 점하게 된 사실이 서양문학사에서 최대의 변화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이 감상하는 방법의 새로운 형식이 된 것도 장래를 위해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감사잉 열렬한 취미가 되고 매일의 요구가 되고 습관이 된 것은 문학이 '독서'가 된 시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장엄한 행사 때나 특별한 계기만이 아니라 마음내킬 때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문학'(Literatur, literature)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문학은 그 종교적 성격의 마지막 나머지까지도 잃어버리고, 내용의 진위에 개의함이 없이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단순한 '픽션'이 되었다.-301쪽

기사계급의 몰락을 중세 말기에 일어난 전쟁기술의 변화와 결부시키고,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쓴 기병은 신식 용병이나 농민으로 편성된 보병부대 앞에서는 도처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학자도 있다. (중략) 그러나 새로운 전쟁기술은 기사계급이 맛본 패배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 자체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며, 여기서도 그들이 전혀 적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부르즈와적 사회의 합리주의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화기라든가 보병대의 익명성이라든가 대부대의 엄격한 기율 - 이 모든 것이 전쟁기술의 기계화와 합리화를 의미하며 전쟁에 대한 기사계급의 개인 본위의 영웅적인 태도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략) 기사계급이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된 것은 그들의 무기가 낙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와 비합리주의가 낡아버렸기 때문이다.(중략) 시민계급은 기사와의 관계에서도 훨씬 물정에 밝았다. 그들은 기사계급의 무술시합이나 기사도적 연애라는 놀이에 기꺼이 끼여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고 사업에서는 냉정하고 빈틈없고 현실적이었다. 한마디로 비기사적이었던 것이다-337-338쪽

문학이 민중적이었다는 것은 그 대부분의 장르에서 기사계급의 도덕적, 미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비교적 자유로운 정신이 나타나 있다는 뜻일 뿐이고, 이들 장르의 어느 하나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문학 혹은 민속문학은 아니다. 즉 어느 장르에서도 상류계급의 문학적 전통과는 관계없는 민중 자신의 자연발생적인 예술관이 표현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중세의 동물우화는 문학사가와 민속학자들에 의해 옛날부터 민중혼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져왔다. (중략) 그러나 실제 발전과정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여우 이야기(Roman de Renard)>보다 오래된 민중의 동물우화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현존하는 프랑스, 핀란드, 우끄라이나 등지의 우화는 모두가 그 이전의 문자화된 동물우화에서 나온 것이고, 중세의 운문우화들도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중세 말기 민요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341쪽

감상자는 이제 다른 세계의 거주자로서 생소하게 작품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예술이 묘사하는 세계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묘사된 장면 내의 환경과 감상자가 서 있는 매개공간이 이렇게 동일시됨으로써 처음으로 완전한 공간의 환각이 생겨난다. 액자는 그 앞에 광대한 세계가 열려져 있는 창틀처럼 느껴지고 그 '창'앞뒤의 공간은 연속된 단일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제 와서야 비로소 회화적인 공간은 깊이와 본질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고대나 중세 초기의 미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중세 말기의 미술이 이루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간, 즉 현대의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간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시대의 역동적인 생활감정에서 생긴 '영화적' 시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후기 고딕의 그림이 이와같은 공간파악으로부터 얻은 최대의 수확은 그 자연주의적 성격이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각적인 공간은 원근법이라는 르네쌍스 개념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부정확하고 불철저한 것이었지만, 이 새로운 공간구성에는 이미 시민계급의 새로운 현실감각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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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1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은 길었다. 희랍 예술에는 평소 관심도 많고 친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낯설고 모르는 얘기가 많았다. 다음에 머리가 좀 덜 복잡해졌을 때 다시 보고 싶다. 중세 로마네스크와 고딕 부분은 2002년 여름에 들었던 <예술과 과학> 수업들을 조금씩 떠올리며 읽었다. 학교 때 교양 수업 중에는 정말이지 주옥 같은 강의가 많았다. 요즘에 인문학 강좌들을 개설하는 곳이 많지만 역시 대학의 이름이 그냥 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레포트 쓰고 시험 보는 것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