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개정판 ㅣ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실제로 르네쌍스는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제도로 나아가고 있던 중세적 발전경향을 이때부터 전유럽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합리주의라는 방향으로 심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예술의 규범이 되는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프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은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이다. (중략) 모든 예술의 발전은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던 전반적인 합리화 과정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지고, 비합리적인 것은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관계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 모순이 배제되고, 그리고 공간의 부분들 상호간에도 모순이 배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앎답다'는 미적 감정을 갖게 된다. 투시도법이 공간의 수학화이고 비례의 원리가 하나의 묘사 속에 나타난 형상들의 체계화이듯이, 예술적 질을 말하는 일체의 규준들은 점차 이성적인 근거에 종속되고, 예술의 법칙들은 하나같이 모두 합리화되었다.-27쪽

르네쌍스는 소상인이나 수공업자의 문화도 아니었고 큰 교양이 없는 시민계급의 문화도 아니었다. 르네쌍스는 오히려 다른 계층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문화를 독점하려고 했던 비민중적이고 라띤화된 교양 엘리뜨의 문화였다. 르네쌍스 문화의 주역을 담당한 계층은 당시의 인문주의적, 신플라톤주의적 정신조류와 관련된 계층 즉 대체로 동일한 사고방식과 단일성을 지닌 지식인계층으로서, 이러한 단일성은 전체적으로는 중세의 성직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르네쌍스의 중요한 예술품들은 이러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광범위한 대중들은 당시의 중요한 예술품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아는 경우에도 이러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 부적합한 비예술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며, 자신들의 심미적 감정은 질이 훨씬 떨어지는 작품들로써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때부터 앞으로의 예술발전에서 근간을 이루게 될 교양있는 소수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대중 간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격차는 지금까지의 유럽 예술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73쪽

초기 르네쌍스의 예술가 아뜰리에는 아직도 수공업자조합이나 길드의 작업장이 지녔던 공동체 의식에 의해 운영되었다. 말하자면 예술품은 아직도 독자성과 특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외부적인 요소를 일체 배격하는 어던 한 개인의 표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만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고 제자와 조수들과는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비로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도 미켈란젤로는 최초의 현대적 예술가인 셈이다.-77쪽

아카데미 교육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적 예술관은 레온 바띠스따 알베르띠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수학이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인 근본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는데, 그 이유는 비례의 학설과 원근법 이론이 모두 수학에 속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기술자나 자연연구가가 이제 그들의 수학적인 지식으로 인해 지식인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듯이 많은 경우에 기술자, 자연연구가와 동일인이던 예술가들 또한 이제부터는 단순한 장인과 구별되기를 기대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수단이 "일곱 학예" 내지는 "자유교양"에 한몫 끼이기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87-88쪽

매너리즘은 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식만이 이 시기를 독자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며 특히 이 시기의 초기와 말기에는 바로끄적인 경향과 혼합되어 있었다. 매너리즘과 바로끄적인 경향은 이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뒤섞여 있었다. 바로끄의 격정적인 표현주의적 예술의지와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초현실주의적' 예술관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두 예술양식의 대립은 실제로는 발전사적인 대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인 대립이다. 매너리즘의 정신귀족적이고 본질적으로 전유럽적인 교양계층의 예술양식이었다면, 초기 바로끄는 좀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좀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경향의 표현이었다. 성숙한 바로끄가 한층 더 섬세하고 한층 더 배타적이던 매너리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은 반종교개혁운동에 따라 교회의 프로파간다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카톨릭이 다시 민중적인 종교가 되는 것과 때를 같이한다. -144-145쪽

종교개혁의 사회학에서 결정적인 사실은 이 운동이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에서 출발하였고 이 운동을 전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성직자들의 탐욕, 면죄부와 교회 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장사행위였다는 점이다. 중략) 그러나 성직자들의 봉건적 특권에 대한 투쟁에 열광적으로 참가했던 부르즈와들은 그들의 목적이 일단 달성되자마자 이 운동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을뿐더러, 하층계급의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일체의 진보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처음에는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민중운동으로 시작되었던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제 주로 지방 영주나 시민계급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루터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안목으로 혁명계급이 성공할 전망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으로,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사회계층에 점차 편승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대중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도적과 같은 흉악한 농민들'이라고 선동, 사주하였다.-154쪽

종교개혁운동이 오로지 정치에만 관심이 있는 영주와 무엇보다도 경제에만 관심이 있는 시민계급의 종교 신조가 되고 새로운 교회조직으로의 길을 밟게 되자, 이에 가장 큰 실망을 느낀 계층은 지금까지 종교개혁을 단순히 하나의 정신적 운동으로 간주해왔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이었다.
종교 생활의 내면화, 심화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했던 곳은 로마였고 -물론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교황이나 교황 측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독일의 종교개혁 때문에 다가오는 교회분열의 위험성을 유럽의 어느 곳보다 가장 잘 의식하고 있었던 곳 역시 로마였다. 카톨릭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잘못과 근본적인 수술의 필요성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계몽된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주의는 교황의 절대적 권위와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고 하였다.-156쪽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꼰다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카톨릭 개혁운동의 '인문주의적' 제1기는 종말을 고한다. 개명되고 인간적이며 관용적이던 싸돌레또, 꼰따리나, 뽈레 들의 시대도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현실주의의 원리가 승리를 구가했다.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을 정복할 능력이 없음이 입증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이미 관용적인 르네쌍스에서 비관용적인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1542년에는 종교재판제도가 1543년에는 출판검열제도가 실시되었고 1545년에는 뜨렌또 종교회의가 여렸다. 레겐스부르크에서의 실패는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고 권위와 권력에 의해서 카톨릭의 재건을 기도하도록 만들었다. 고위성직자 중에서 인문주의자들인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161쪽

반종교개혁 운동의 근원적이고도 직접적인 예술적 표현이 매너리즘인지 아니면 바로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양분되어 있다. 연대적으로 보면 매너리즘의 반종교개혁운동에 더 가깝고, 뜨렌또 종교회의 기간의 정신주의적 태도 역시 감각적인 바로끄보다는 매너리즘에서 더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운동의 예술적 프로그램, 즉 광범위한 대중에게까지 예술을 통해 카톨릭교를 전파하는 것은 바로끄에 이르러서이다. 뜨렌또 종교회의의 참석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확실히 매너리즘에서처럼 층이 엷은 지식인들을 상대로 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끄에 와서 실현을 보게 되는 민중적 예술이었다. (중략) 매너리즘이 바로끄에 배턴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매너리즘이 반종교개혁운동이 제시한 교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낼 능력이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70쪽

뜨렌또 종교회의 기간을 두고 "요조숙녀인 체하는 얌전빼기의 탄생기"라고 규정한 학자가 있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귀족주의적인 또는 초현세적인 경향을 지닌 문화는 나체의 묘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고대 초기의 귀족주의 사회와 중세의 기독교 사회는 성적인 문제에 관해 '얌전을 빼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체의 묘사를 기피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인간의 육체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화과 잎'으로 국부를 가림으로써 성적인 것을 숨기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강조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로틱한 감정의 애매성은 매너리즘과 더불어 비로소 대두하였고, 이러한 애매성은 가장 솔직한 감정과 가장 역겨운 허식, 가장 엄격한 권위의식과 극단적인 개인주의, 가장 정숙한 표현과 가장 외설적인 형식 등의 극단적인 대립을 그 내부의 지니고 있던 매너리즘 문화의 분열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경우에 '얌전빼기'는 (중략) 외설성에 대한 의식적인 반동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억제된 외설성의 한 형태인 것이다.-167-168쪽

아카데미의 본래 목적과 의도는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미술가들을 길드에서 해방시켜 수공업자보다 더 높은 사회적 위치로 올려놓는 역할을 하였다. (중략) 이들은 단체로서의 길드만이 아니라, 교육기관으로서의 길드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기관으로서의 아카데미는 결국 엄격하고 반진보적이던 구제도를 답습하는 또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게 되었다. 오히려 아카데미의 수업은 길드보다도 한층 더 엄격한 규율에 얽매였다.-174쪽

브뢰겔의 그림에서는 상이한 여러 요소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매너리즘에서와 같은 우주적인 감정이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띤또레또에게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우주의 숨결 앞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브뢰겔에서는 우주 전체가 일상적인 경험의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브뢰겔의 회화는 비민중적이라는 점에서도 다른 매너리즘 예술과 공통된다. 이 점 역시, 우리가 그의 양식 전체를 건강하고 소박하며 분열되지 않은 자연주의로 간주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이해되어 왔다. (중략)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려는 계층은 그들이 목적으로 설정한 생활상태의 묘사를 보기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오려 하는 현재 생활 상태의 묘사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중략) 19세기 노동자 연극이 민중극장이 아닌 대도시의 상류층이 애용하던 극장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듯이, 브뢰겔의 예술 역시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계층, 아무튼 농민이 아닌 도시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189-192쪽

새로이 기사도를 숭배하고 예찬하는 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 나라는 에스빠냐이다. 에스빠냐에서는 700년에 걸친 아랍인들과의 오랜 싸움을 치르면서 신앙과 명예의 원칙들, 그리고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명성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고 또 이딸리아 정복전쟁, 프랑스에 대한 승리, 식민지의 확대, 라띤아메리카로부터의 금은보화의 착취 등으로 인해 군인계층은 말하자면 저절로 영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회생한 기사도 정신이 가장 광채를 발한 에스빠냐에서는 기사적 이상이 지배가 한갓 허구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기사도적 정신에 대한 환멸 또한 가장 컸다. 승승장구의 에스빠냐도 잇따른 정복과 거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소상인과 영국 해적들의 경제적 지배권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에스빠냐는 역전의 용사도 부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자존심이 강한 하급귀족들(Hidalgo)은 비록 무뢰한이나 부랑자의 신세까지는 안 가더라도 빈곤과 배고픔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아래에 계속)-194-195쪽

(위에서 계속) 요컨대 오랜 복무 끝에 제대한 군인이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해결해야만 했던 온갖 문제들을 위해서 기사소설은 가장 부적합한 준비였던 것이다.(중략)
돈끼호떼가 그의 이상과 세상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현실이 마술에 걸린 탓으로 돌리고 사물의 주관적 질서와 객관적 질서 사이의 간극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세계사적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제 그에게는 꿈의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의 세계이자 반대로 현실은 악마들로 가득 찬 마법의 세계로 보이고 있음을 말해줄 뿐인 것이다. (중략) 세르반떼스에게서 새로운 것은 (중략) 이상적, 낭만적 세계와 현실적, 합리적 세계 중 그 어느 하나도 절대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세계상에 나타난 화해할 수 없는 이원론 곧 이념은 현실세계에서 실현될 수 없고 현실은 이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194-198쪽

발자끄와 셰익스피어는 둘 다 자신의 근본적인 보수저 정치태도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전위용사였던바, 그것은 그들의 동시대인들이 대부분 당대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었던 데 반해서 그들은 그것이 위기의 상황이요 그대로는 지속될 수 없는 상황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군주제나 시민층 또는 하층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든지간에 그 자신이 그 처럼 많은 이익을 보았던 국가적 흥륭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도 비극적인 세계관과 깊은 비관주의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강한 사회적 책임감과 세상일들이 그렇게 다 잘되어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확실히 혁명가나 투사형의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발자끄가 시민계급의 심리를 폭로함으로써 자신이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게 근대 사회주의의 한 선구자가 되었듯이, 셰익스피어 또한 건강한 합리주의를 통하여 봉건귀족의 재등장을 저지한 사람들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203쪽

16세기 말경, 이딸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 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끄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245쪽

왕은 신흥귀족의 출현으로 추락한 귀족계급의 위신을 보상하기 위하여 모든 공적인 예술과 문학 수단을 통해 귀족의 도덕적, 정신적 모범성을 강조하는 신화를 퍼뜨렸다. (중략) 의리와 영웅적 행위라는 것은 노예적인 복종이 국가의 이익 및 전제군주의 뜻에 맞을 때 문학적 선전이 붙여준 이름에 불과하다. 예절이라는 것도 대부분 '싫은 일에 억지로 좋은 얼굴'을 하는 것을 뜻하며, 관용이라는 것 역시 이제 거지가 되었다는 것을 잊게 해주는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절제와 자제력만이 귀족적, 궁정적 생활이 요구하는 유일한 진정한 미덕이었다. 고상하고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그의 감정과 격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중략) 그는 비개인적이고 남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취하며 냉정하고 엄격하다. 그는 일체의 과시벽이나 노출증은 천민적인 것이고 일체의 격한 감정은 병적이고 종잡을 수 없으며 혼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254-255쪽

프랑스 궁정의 예의범절과 유행 및 예술이 이처럼 국제적으로 통하게 된 것은 프랑스 문화의 국민적인 성격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가능했다. 프랑스인들은 왕년의 로마인들같이 세계시민으로 자처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정신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라씬느(J.B.Racine)의 모든 비극 속에서 프랑스인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256쪽

중세적 문화를 다시 재생시키려는 시도가 매너리즘을 마지막으로 해서 좌절되고 난 후에, 이제야말로 중세는 그 종말에 이른 것이다. 봉건적 귀족은 무사계급으로서는 국가 내에서 모든 의의를 상실하였고, 정치적 공동체들은 이제 절대주의적인, 다시 말해 근대적인 민족국가로 변모하였으며, 통일적 기독교 세계는 수많은 교회 및 종파로 분열되었고, 철학은 종교적인 성향의 형이상학에서 독립하여 '제반 학문의 자연적 체계'로 변모하였다. 끝으로 예술은 중세적 객관주의를 극복하여 주관적 체험의 표현으로 변하였다. 근대적 고전주의를 고대 및 르네쌍스의 고전주의와 구분짓는 그 부자연스럽고 강제적이며 때로는 경련적인 특징이 생겨나는 이유는 전형적인 것과 비개인적인 것, 그리고 보편타당한 것의 추구가 이제는 예술가의 주관주의에 맞서서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미학의 모든 법칙과 규칙들은 형법 조문을 연상시키며, 이러한 조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의 경찰력이 필요하였다.-260-261쪽

개신교가 반드시 혁명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카톨릭 역시 결코 반동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카톨릭 신자보다는 깔뱅주의자가 좀더 덧떳한 양심을 갖고 그의 왕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어쨌든 네덜란드의 봉기는 보수주의자들의 혁명이었음이 확실하다. 반란에 성공적이었던 북부의 여러 주는 중세적 자유 개념과 구태의연한 지방자치제를 옹호하고 있었다. 북부의 여러 주가 꽤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절대주의가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유일한 국가형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하겠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성공이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시대에 도시연합적 조직이 유지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79쪽

17세기 홀란드에 와서 새롭다고 할 것은 미술생산이 주로 국내 수요자에 의존하였고 국내 수요자가 생산을 다 소화할 능력이 없게 되자 예술계에 심각한 위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예술가의 과잉과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예술사에서 이 때가 처음인 것이다. (중략) 예술가가 그의 사회적 근거를 상실하고 그의 생존이 문제시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 그가 생산한 것이 과잉상태이기 때문에 그 자신도 잉여의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홀란드의 화가들은 대부분 매우 가난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본업 이외에 다른 부업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반 고예은 튤립 장사를 했고, 호베마는 세금징수원 노릇을 했으며, 반 데 벨데는 옷감가게 주인이었고, 얀 스텐과 아르트 반 데르 벨데는 술집 주인이었다. 중요한 화가일수록 대체로 가난이 심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그래도 좋은 시절이 있었지만, 할스는 한 번도 인기를 얻어본 적이 없었고 반 데르 헬스트 같은 화가의 초상화에 지불된 액수의 돈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렘브란트와 할스뿐만 아니라 홀란드의 세번째 가는 화가인 베르메르 또한 생활고와 싸워야만 했다. -290쪽

궁정적, 보수적 문화에서는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는 결코 유명해지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일단 인정을 받은 후에는 아마 시민적, 자유주의적 홀란드에서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홀란드 사회는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만 허용했고, 그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순간 가차없이 그를 버렸던 것이다. 예술가의 정신적 실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험에 처해 있게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사회질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도 예술가에게는 완전히 편안한 것이 못 된다. 전자가 자유를 속박한다면 후자는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유 속에서만 안전하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안전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쉬는 예술가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아무튼 17세기는 '자유와 안전의 결합'이라는 이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세기였다.-299-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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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2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개혁의 변질과 매너리즘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고 재미있었다. 자유주의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박해를 받는다. 이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는 에피쿠로스 식의 "숨어 살아라!"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