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ㅣ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구석기 시대 그림의 작자는 그 자신이 사냥꾼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냥꾼으로서의 예리한 관찰력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희미한 발자국이나 냄새만으로도 어떤 특징을 지닌 무슨 짐승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유사점과 차이점을 간파하는 날카로운 눈과 갖가지 음향을 식별하는 예민한 귀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외계를,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향하고 있게 마련이었다. 이와같은 태도와 능력이야말로 자연주의 예술에 쓸모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신석기시대의 농사꾼에겐 더이상 사냥꾼의 예리한 감각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감각적인 예민성과 관찰력은 퇴화하고 그 대신 다른 능력, 무엇보다도 추상화 및 합리적 사고의 능력이 개발된다.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농경, 목축 경제의 생산방식이나 극도의 추상화, 양식화를 지향하는 당시의 형식주의적 예술에 똑같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7쪽

이집트 예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하나의 단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작품군 사이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작품 하나 하나 속에 있는 것이다. 즉 강하게 인습에 사로잡히고 딱딱할 정도로 의례적이며 기념비적인 엄숙함을 가진 양식의 한구석에는 반드시 더 자유롭고 더 분방하고 더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수법이 눈에 띈다. (중략) 즉 지배층에 속한 사람은 항상 궁정풍의 권위를 재현하는 양식으로 그려진 반면 하층민 사람들은 통속적인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중략) 적용해야 할 양식을 대상에 따라 바꾸는 이러한 수법은 미술사 및 문학사에서는 결코 신기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가 인물을 구별하여 묘사할 때 사용했던 두 가지 방법, 즉 하인과 광대 역 등의 대사에는 평범한 산문을 사용하고 주인공이나 귀족들은 예술적인 운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소재에 따라 양식을 바꾸는 이 '이집트적' 수법과 같은 것이다.-70-71쪽

시는 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함과 동시에 서정적인 성격도 잃어버리고 서사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서사시'야말로 유럽 문학에서 종교적 의례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것으로서는 우리가 알기로 가장 오래된 문학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 르뽀, 즉 전쟁중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의 연대기풍의 서술에서 비롯된 것으로, 애초에는 그 부족이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약탈행각에 관한 '최신의 보고'에 한정되었던 것 같다.-89-90쪽

인간은 생활을 위한 직접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비교적 안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전에 필요에 따라 무기나 도구로서 발명한 정신적 수단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는 일들에 관해서 원인을 캐고 설명을 구하고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실용적인 지식은 특수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연구가 되고,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추상적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리하여 원래는 마술이나 종교의 부속품, 선전과 자기찬미를 위한 도구, 또는 신과 악령과 인간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예술도 순수하고 자율적인, 즉 '이해타산을 떠난' 형식, 예술 그 자체와 아름다움만을 위한 예술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본래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들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목적에서만 생겨난 명령이나 금지, 터부 등이 마침내 '순수' 윤리의 규범이 되고 도덕적 인격의 완성과 실현을 위한 지침으로 변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112-113쪽

(위에서 계속) 실용형식에서 이념형식으로, 구체적인 형식에서 추상적인 형식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학문의 세계에서나 예술, 도덕의 영역에서나 그리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스 이전에는 순수인식, 이론적 탐구, 합리주의적 학문 등이 없었듯이 우리들이 오늘날 말하는 의미로서의 예술, 즉 항시 순수형식으로서도 받아들여지고 즐길 수 있는 예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술을 생존투쟁의 무기로만 보고 그러한 예술에만 의미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예술이란 것은 모든 실용적 목적과 효용, 모든 미학 외적 이해관계에서는 독립되어 있는 단순한 선과 색의 유희, 리듬과 조화, 현실의 단순한 모방과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으로의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아마도 예술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예술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즉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의 순수한 탐구로서의 학문의 이념을 발견하고 있던 바로 그 무렵, 그리스인들은 예술분야에서도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은,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최초의 징조라고 할 수 있는 순수예술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내놓았다.-112-113쪽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개별적으로 자율화된 사실의 이면에는 정신기능의 형식화라는 전제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활동이 이미 실생활에서의 효용만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활동 자체의 독자적인 완벽성이라는 관점에서도 평가되도록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증략) 그리스 이전의 문명에서도 각기 올바른 과학적 관찰이나 추론 또는 계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지식과 능력의 모두가 주술, 신화, 종교적 도그마 등과 혼합돼 있어서 언제나 효용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종교, 신앙, 미신 등의 속박을 받지 않고 합리적으로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실용목적 그 자체를 도외시한 학문은 그리스인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었다.-114-115쪽

그리스 시대나 그리스의 영향이 아직 강했던 시대의 로마 미술가들은 시간적인 현상을 공간적인 수단으로 표현하려고 할 때, 레씽의 유명한 문구대로 '의미심장한 순간'을 택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움직임'이 없지만 무한한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는 어느 한 순간의 정경 속에다 시간적인 길이를 가진 사건 전체를 압축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중략) 츠 비크호프는 로마시대 후기의 미술 및 중세 그리스도교적 미술의 묘사방법으로서 이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전자의 '분할적' 방법에 대비되는 '연속적'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이 '연속적' 방법이란 서사시적, 설명적, '영화적'인 예술의욕에서 생겨난 서술방법, 즉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어떤 사건의 갖가지 단계를 하나의 무대 또는 풍경의 틀 속에 함께 집어넣고 더욱이 주요 인물들은 각 단계마다 몇번이라도 거듭 그러녛음으로써 개개의 장면은 마치 만화책에서 이야기가 차례차례로 펼쳐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영화의 연속성을 상기시키는 묘사방법인 것이다.-156-157쪽

그리스, 로마 예술에서 대상의 묘사는 정면성에서 출발하여 다시 정면성으로 귀착했다. 즉 일면적이고 직선적인 아케이즘 양식에서 출발하여 자유스러운 고전주의 시대와 극도의 긴장에 찬 헬레니즘기 바로끄를 거쳐 로마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평면적이고 좌우의 균형을 지키며 매우 엄숙한 일종의 정면존중주의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계급적인 예속 상태에서 자율과 유미주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종교적 의존의 시대로, 권위적인 사회질성의 묘사에서 민주제와 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정신적 권위의 표현으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159쪽

중세를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적 시대로 보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딘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어쟀든 이 세 시기 사이에 놓인 단층은 중세 전체를 그 앞뒤의 시대와 갈라놓고 있는 단층보다도 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 시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 가지 변동들 - 즉 공로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의 탄생이라든가 봉건적 자연경제에서 도시적 화폐경제로의 전환, 서정적 감수성의 탄생과 고딕 자연주의의 발달, 시민계급의 해방과 근세 자본주의의 맹아 - 은 근대적 생활감정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르네쌍스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177쪽

안드레아스 호이슬러(Heusler)도 지적하듯이, 영웅 이야기가 반드시 처음에 막연한 형태의 전설로서 작자도 없이 구전되다가 후에야 어떤 한 직업시인의 첨삭을 거쳐 하나의 문학작품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영웅전설은 그 발생 당초부터 하나의 시, 하나의 노래이고 또 그런 형태로서 전승되고 변형되는 것이다. 서사시라는 것은 이것이 나중에 더 장편화한 것으로서 때에 따라서는 원래의 짧은 작품을 토대로 구성되는 일은 있어도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문자로 싀어 있지 않은 완전히 자연발생적인 설화는 고립된 단편적 주제들, 일관된 줄거리가 없는 산만한 역사적 사실의 일화들, 각 고장마다 있는 짤막한 전설들 등을 주워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민중이나 익명의 민중시인이 제공하기도 하는 건추갖재에 속하지만 영웅가요를 영웅가요로 성립시키고 서사시를 서사시로 성립시키는 본절적인 요소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227-228쪽

행정기구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의 부족, 이민족의 침략 위험과 이에 맞서서 광대한 영토를 방위하는 어려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로마시대 말기부터 있었다. 거기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훈련된 관리의 부족, 이민족 침량 위험의 증대와 장기화, 그리고 주로 아랍인에 대항하기 이한 장갑기병대를 도입할 필요성 등으로 인해 새로운 난제가 추가되었다. 특히 이 신식 전력장비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고 게다가 비교적 장기간의 훈련기간이 필요했으므로 국가로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재정적 부담을 의미했다. 봉건제도는 9세기 국가가 이러한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 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새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244쪽

로마네스끄의 그리스도 수난상은 천대받고 고난에 찬 신의 묘사를 거부하던 과거 시대와 구세주의 상처를 일일이 들추는 데서 오히려 쾌감을 맛보던 그 이후 시대 사이의 중간지점에 서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은 초기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구세주가 죄인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생각이 아무래도 좀 거북스러운 것이었다. 칼롤링어 왕조의 미술에 이르면 오리엔트에서 도래한 십자가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천대받고 고통스러운 예수 모습을 그리지 않으려는 경향은 여전했다. 당시 귀족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육체적 고통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네스끄 미술의 수난상에서도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늘어진 경우는 드물고, 대개의 경우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며 보통은 눈을 뜨고 있을뿐더러 왕관을 쓰고 옷을 걸치고 있는 예도 많다. (중략) 승리자의용모를 갖추고 있는 이들 그리스도상에 상응하는 것이 당시의 성모상인데, 그것은 고딕시대 이래 우리들에게 친숙해진 사랑과 고뇌를 나타낸 성모상과는 달리 인간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천상의 여왕으로 그려진 마돈나인 것이다.-260쪽

고딕(Gotik, Gothic)의 발생은 근세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고딕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감수성이나 표현방식에 비하면 중세 초기의 미술은 단순히 유연성이 없고 딱딱할 뿐 아니라 - 고딕 자체도 르네쌍스에 비할 때 그런 인상을 주지만 - 고칠고 매력이 없다는 인상마저 준다. 미술은 고딕에 이르러서야 또다시 정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이란 말의 본래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하 수 있는 인물을 담은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263쪽

왕년의 영웅가요는 노래부르기 위한 것이었고, 샹송 드 제스뜨는 낭송용이었으며, 초기의 궁정서사시도 아마 낭송되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새 시대(중세 후기, 11세기 경 고딕 시대 - 인용자주)의 연애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는 이제 주로 부인들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졌다. 문학작품의 감상자 중에서 여성이 다수를 점하게 된 사실이 서양문학사에서 최대의 변화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이 감상하는 방법의 새로운 형식이 된 것도 장래를 위해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감사잉 열렬한 취미가 되고 매일의 요구가 되고 습관이 된 것은 문학이 '독서'가 된 시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장엄한 행사 때나 특별한 계기만이 아니라 마음내킬 때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문학'(Literatur, literature)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문학은 그 종교적 성격의 마지막 나머지까지도 잃어버리고, 내용의 진위에 개의함이 없이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단순한 '픽션'이 되었다.-301쪽

기사계급의 몰락을 중세 말기에 일어난 전쟁기술의 변화와 결부시키고,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쓴 기병은 신식 용병이나 농민으로 편성된 보병부대 앞에서는 도처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학자도 있다. (중략) 그러나 새로운 전쟁기술은 기사계급이 맛본 패배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 자체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며, 여기서도 그들이 전혀 적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부르즈와적 사회의 합리주의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화기라든가 보병대의 익명성이라든가 대부대의 엄격한 기율 - 이 모든 것이 전쟁기술의 기계화와 합리화를 의미하며 전쟁에 대한 기사계급의 개인 본위의 영웅적인 태도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략) 기사계급이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된 것은 그들의 무기가 낙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와 비합리주의가 낡아버렸기 때문이다.(중략) 시민계급은 기사와의 관계에서도 훨씬 물정에 밝았다. 그들은 기사계급의 무술시합이나 기사도적 연애라는 놀이에 기꺼이 끼여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고 사업에서는 냉정하고 빈틈없고 현실적이었다. 한마디로 비기사적이었던 것이다-337-338쪽

문학이 민중적이었다는 것은 그 대부분의 장르에서 기사계급의 도덕적, 미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비교적 자유로운 정신이 나타나 있다는 뜻일 뿐이고, 이들 장르의 어느 하나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문학 혹은 민속문학은 아니다. 즉 어느 장르에서도 상류계급의 문학적 전통과는 관계없는 민중 자신의 자연발생적인 예술관이 표현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중세의 동물우화는 문학사가와 민속학자들에 의해 옛날부터 민중혼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져왔다. (중략) 그러나 실제 발전과정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여우 이야기(Roman de Renard)>보다 오래된 민중의 동물우화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현존하는 프랑스, 핀란드, 우끄라이나 등지의 우화는 모두가 그 이전의 문자화된 동물우화에서 나온 것이고, 중세의 운문우화들도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중세 말기 민요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341쪽

감상자는 이제 다른 세계의 거주자로서 생소하게 작품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예술이 묘사하는 세계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묘사된 장면 내의 환경과 감상자가 서 있는 매개공간이 이렇게 동일시됨으로써 처음으로 완전한 공간의 환각이 생겨난다. 액자는 그 앞에 광대한 세계가 열려져 있는 창틀처럼 느껴지고 그 '창'앞뒤의 공간은 연속된 단일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제 와서야 비로소 회화적인 공간은 깊이와 본질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고대나 중세 초기의 미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중세 말기의 미술이 이루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간, 즉 현대의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간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시대의 역동적인 생활감정에서 생긴 '영화적' 시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후기 고딕의 그림이 이와같은 공간파악으로부터 얻은 최대의 수확은 그 자연주의적 성격이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각적인 공간은 원근법이라는 르네쌍스 개념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부정확하고 불철저한 것이었지만, 이 새로운 공간구성에는 이미 시민계급의 새로운 현실감각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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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1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은 길었다. 희랍 예술에는 평소 관심도 많고 친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낯설고 모르는 얘기가 많았다. 다음에 머리가 좀 덜 복잡해졌을 때 다시 보고 싶다. 중세 로마네스크와 고딕 부분은 2002년 여름에 들었던 <예술과 과학> 수업들을 조금씩 떠올리며 읽었다. 학교 때 교양 수업 중에는 정말이지 주옥 같은 강의가 많았다. 요즘에 인문학 강좌들을 개설하는 곳이 많지만 역시 대학의 이름이 그냥 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레포트 쓰고 시험 보는 것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