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 3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용석.이종오 옮김 / 리잼 / 2008년 6월
절판


(1장 수사학3권의 주제 中)
이어서 우리가 다루는 설명은 문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들어내야하는 논거들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논거들을 훌륭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담론이 이러저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기여해야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순서상 자연스럽게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 즉 사물들 자체에 그것들의 설득적 특징을 부여하는 것을 우리 연구의 첫째 목표로 삼았다.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문체가 사물들에게 부여하는 가치이다. 세 번째 부분은 가장 큰 효율성을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으로써 연기술과 관계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비극 상연과 음송서사시에 있어서 연기술은 나중에 도입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비극의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사학에도 시학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특정한 기법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어떤 저자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테오스의 글라우콘을 다루었다.
(아래에 계속)-12-16쪽

(위에서 계속)
연기술은 목소리의 사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 즉 각각의 정념에 대해서 목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말하자면 언제 강한, 약한, 중간의 목소리를 내야하는지, 어떻게 고음, 저음, 중음과 같은 억양들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감정에 대해서 어떤 리듬에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연기자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즉 음량과 억양과 리듬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의 방법으로 연기자들이 연기 경합에서 상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경합에서 연기자들이 시인들보다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국가에 대한 토론과 政體의 불완전함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래에 계속)-12-16쪽

(위에서 계속)
연기술의 기법은 아직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또한 문체에 대한 기법 자체가 발전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따라서 문체의 기법이 연기술의 기법을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것은 너무나 서툰 기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연기술의 연구에서 수사학은 공론에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필요성이 요구되며, 연기술에 필요한 주의들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법정에서 우리는 담론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고통이나 쾌락을 야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투쟁하는데 적합한 유일한 무기들은 바로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술은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청중의 타락의 결과로 인하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체에 대한 근심은 적어도 아주 작은 부분일 지라도 모든 종류의 교육에 필요한 것이다.-12-16쪽

(9장 문장의 구성 中)
사람들은 산문보다 시를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운율을 통해 조화를 잘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73쪽

(12장 여러 장르의 문제들 中)
작문의 문체는 가장 정확하다. (불역자주-가장 '정확한' 혹은 가장 '상세한'이라고 할 수 있다. 작문의 문체는 극적이거나 웅변적인 행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작문의 문체가 독자에게 그 어떤 모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히 갈고 닦아야 한다. 반대로 담론에서의 몸짓, 억양, 태도 등은 단순한 독자에게는 항상 드러나지 않는 어떤 의도를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다.) 한편 토론의 문체는 행위에 더욱 적합한 것이다.-106쪽

(14장 서론에 관해서 中)
따라서 서론의 가장 필수적이고 고유한 기능은 담론이 지향하는 목적을 가리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목적이 뚜렷하고, 사건의 중요성이 극히 미미하다면, 우리는 서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웅변가들이 사용하는 또 다른 표현 형식들은 청중들의 단점을 보완하는 치유책이며, 담론의 모든 부분들에 공통된 것들이다. (중략) 청중과 관련된 논지들은 청중을 호의적으로 만들거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것에서 취해진다. 이것은 때로는 청중의 주의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적합한 것 혹은 그 반대의 것에서도 취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청중으로 하여금 항상 주의 깊은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웅변가들이 청중을 웃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해시키고자 하는 논지의 배열에 있어서 사람들이 원한다면 모든 것을 활용할 것이며, 심지어는 정직해 보이려고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러한 성격을 가진 웅변가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120-122쪽

(위에서 계속) 청중들은 중요한 사안들과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사안들, 자신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사안드롸 바람직한 사안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웅변가들은 자신들의 담론이 이와 같은 주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을 청중들에게 심어주어야만 한다. 만일 웅변가가 청중들의 관심을 떨어뜨리고자 한다면, 언급하는 내용이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들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거북하다는 사실을 말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종류의 모든 고려사항들이 담론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엽적인 문제에만 귀 기울이는 수준이 낮은 청중들만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중이 이러한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면, 원인을 요악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서론도 필요치 않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논지 전체가 서론이 될 것이다.-120-122쪽

(16장 서술에 관하여 中)
만일 사실이 믿기 힘든 것이라면, 그 사실에 동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포클레스가 했던 바이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이와 관련된 한 예를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은 남편이나 아이들보다도 더 자신의 오빠를 걱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남편이나 아이들은 잃더라도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데스의 곁으로 떠났기 때문에 오빠는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만일 제시할 동기가 없더라도, 적어도 당신들은 당신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음을 말해야지 당신의 성격이 그러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자발적인 행동에는 이익보다는 다른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고는 어렵게 믿기 때문이다.-139-140쪽

(17장 확증, 증거들 中)
제시적 담론에서는 이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일화들을 통해 찬사를 도입해야한다. 그는 항상 자신의 연설에 몇몇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고르기아스가 자신의 담화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자 했던 바이다. 가령 고르기아스가 아킬레우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는 펠레우스와 아이아코스 그리고 신들에 대해 줄줄이 찬사를 보내기 시작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위업을 달성한 용맹한 자나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 관해서 늘어놓을 것이다.-148-149쪽

(19장 질문과 대답 그리고 재담들 中)
재담에 관해서는, 소송에 있어 어떤 유용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고르기아스의 옳은 지적에서처럼 상대방의 진지함을 웃음으로 무너뜨리고, 혹은 그 반대로 웃음은 진지함으로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에, "시학"의 서론에서 얼마나 많은 종류의 재담들이 있는지를 언급한 바 있다. (불역자주-이 문단은 "시학"의 유실된 2권에 대한 흔적으로 종종 인용되었다. 후략) 이러한 재담들 중 어떤 것들은 자유인의 성격에 적합하며, 다른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당신들은 당신의 인격에 부합하는 것만을 재담에서 취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유인에게는 익살스러움보다는 아이러니가 더욱 적합하다. 웃음을 통해 아이러니스트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반면 익살꾼은 타인의 즐거움을 추구한다.-159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9-1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르기아스에 대한 언급에서 희랍 사람들의 이야기 애호가 드러난다. 박람강기한 사람이 입담 좋게 늘어놓는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아테나이가 그립다.
 
수사학 2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종오 옮김 / 리잼 / 2007년 8월
절판


(2장 분노에 관하여 中)
분노는 충동적이고 고통스러운 욕망이다. 그것은 누군가 우리의 인격 혹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인격을 근거 없이 경멸했을 때 가지게 되는 복수의 욕망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분노가 근거하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특정한 한 개인 -예를 들어 크레온과 같은 사람- 에 대해 분노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 사람들 전체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행해진 특정한 한 행위에 대해 반대하거나 맞서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모든 분노의 감정에는 복수하고자 하는 희망이 주는 즐거움이 따르게 된다.-16쪽

(12장 성격들에 관하여-세대:청년기 中)
청년들은 성격상 욕망에 이끌리기 마련이며, 자신들이 욕망하는 것을 실행하고자 한다. 육체적인 욕망들 중에서도 그들은 특히 사랑의 욕망에 포로가 되며, 그 욕망을 제어하는 데에는 무기력하다. 그들은 변덕스럽고, 욕망에 대해 쉽게 싫증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의 욕망이 격렬할수록 실제로 그 욕망이 지속되는 시간은 매우 짧다. 왜냐하면 마치 환자들이 느끼는 갈증과 배고픔처럼 그들의 의지는 불타지만 그 영향력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격렬하고 쉽게 흥분하며 충동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바로 이 격렬함에 지배당한다. 그들의 야망은 그들로 하여금 조금의 경멸도 견뎌내지 못하게 하며,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여길 경우 쉽게 분개한다. 그들은 명예를 좋아하지만, 그보다 승리를 더 좋아한다. 청년들은 대개 우월함을 욕망하는데, 승리란 곧 우월함의 표싱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에 대한 욕망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두 가지 야망을 더욱 많이 가지고 있다. 암피아라우스에게 보내는 피타쿠스의 격언과 같이 그들은 아직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는 그만큼 집착하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96-99쪽

(위에서 계속)
청년들은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타락의 상황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뢰할 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속임수로 당해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포도주를 한 잔 걸친 사람처럼 그들은 본성적으로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많은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인생 대부분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기억이 과거에 대한 것인 반면에, 희망은 미래를 감싸 안는 것이다. 청년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길고 과거는 짧다.
인생을 출발하는 청년들에게 있어서는 기억해야 할 것보다는 희망해야 할 것이 훨씬 많다. 때문에 그들은 쉽게 속아넘어가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쉽게 희망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누구보다도 용감하다. 그들은 쉽게 흥분하며, 쉽게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격분이 그들의 두려움을 앗아간다. 희망은 그들에게 확신을 불어넣어 준다. 분노하는 자는 두려움에 떨지 않는 법이다. 또한 무엇인가에 대한 희망은 확신을 고양시킨다.
(아래에 계속)-96-99쪽

(위에서 계속)
그들은 수줍음이 많다. 기껏해야 사회적 규약에 대한 교육밖에는 받지 못했기 때문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대하다. 아직 ㅇㄴ생의 쓴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필연성을 경험하지 못했다. 자신이 위대한 것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곧 관대함이다. 그런데 관대함은 희망에 가득 찬 사람의 성격에 속하기도 한다.
행동에 있어서 그들은 이익보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들의 삶은 계산보다는 기개에 의해 움직여진다. 계산이 이익과 관련된 영역이라면 미덕은 아름다움과 관련된 영역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청년들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사랑한다. 이는 사교계의 삶을 즐기는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무엇인가를 판단하지 않으며, 친구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래에 계속)-96-99쪽

(위에서 계속)
킬론Chilon의 격언(불역자주-"어떤 것에 있어서도 넘치지 말라"는 격언은 여기에서 '일곱 명의 현자'중의 한 명인 스파르타의 실론(6세기 중반))의 말로 간주되고 있다. 전통에 따르면 이 격언은 델포스 신전에 세겨진 여러 격언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과는 반대로 그들은 항상 너무나 과장되고 격렬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넘치도록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넘치게 사랑하고, 넘치게 증오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일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행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이것이 곧 모든 일에 과도하게 행동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어떤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지나침 때문에 잘못을 범하곤 한다.
(아래에 계속)-96-99쪽

(위에서 계속)
그들은 많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보다 사람들이 더 정직하고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순수함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타인이 겪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웃음을 좋아하고, 따라서 농담을 즐긴다. 사실 농담이란 좋은 교육을 통해 절제된 넘침에 다름 아니다.-96-99쪽

(13장 성격들에 관하여-세대:노년기)
이미 중년기를 지난 노인들은 대부분 앞서 언급한 청년기와 거의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 왔고, 속임을 당한 적도 있으며,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실수를 저지른 경험도 가지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세월 동안 그들은 인간적인 것들이 악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확언도 삼가는 경향이 있으며, 실제로 해야 할 말보다 훨씬 적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들은 항상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지 결코 '내가 아는 것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심을 품으면서 이렇게 덧붙이곤 한다. '아마도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한다. 그들은 결코 확언을 하는 법은 없다. (아래에 계속)-100-104쪽

(위에서 계속)
그들은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최악의 상황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의심으로 인해 어디에서나 손해의 가능성을 가늠하곤 한다. 이처럼 그들이 의심을 품는 것은 그들의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결코 격렬하게 무엇인가를 좋아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아스의 격언처럼 그들은 마치 증오해야만 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마치 사랑해야만 하는 것처럼 증오한다.
그들은 비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미 인생의 쓴맛을 보앗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대한 것이나 특별한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다만 삶에 필요한 것들만 욕망할 뿐이다. 그들은 몹시 인색하다. 재산이란 곧 이러한 삶의 필요한 것들 중 한 가지 요소이며, 그들은 경험을 통해 재산을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 -100-104쪽

(위에서 계속)
그들은 쉽게 두려워하고, 미리 걱정을 하곤 한다. 나이가 그들로 하여금 젊은이들과는 반대되는 경향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젊은이들이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는 반면, 그들은 냉랭하다. 따라서 노년기는 비겁함을 향한 길을 닦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통이란 곧 냉랭하게 만드는 요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을 사랑한다. 특히나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욕망은 항상 부족한 것을 대상으로 하며, 가장 부족한 것에 대해 가장 강렬한 욕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이기적이다. 바로 여기에 또 하나의 저속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움이나 합리적인 것보다는 이익을 위해 산다.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절대적인 선인 반면에 이익은 개별적인 선에 속한다. 그들은 정숙하기보다는 파렴치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이익에 대한 것에 비해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100-104쪽

(위에서 계속)
그들은 경험으로 인해 거의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의 겨험상 대부분의 사건들은 유감스러운 결과로 이어지며, 종종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그들의 비겁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희망보다는 추억으로 산다. 희망이 미래를 감싸안고, 추억은 과거와 관련된다고 할 때, 그들에게는 살아온 시간에 비해 살아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짧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지내온 과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낙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100-104쪽

(위에서 계속)
그들은 격렬하게 흥분하지만 미약한 수준에 머루 뿐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욕망으로 인해 실패를 맛보았으며, 다른 이들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욕망에 이끌리지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지오 낳는다. 단지 ㅇ익에 대한 취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노인들은 절제하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그들의 욕망은 이미 느슨해졌으며, 오직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개보다는 계산에 의해 살아간다. 기개가 미덕에 관련된 것이라면, 계산은 이익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 그것은 넘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악의에 의한 것일 경우가 많다.
노인들 역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그러하다. 젊은이들이 인류애에 의해 동정심을 가진다면, 노인들은 연약함으로 인해 그러하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모든 시련들이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곧 연민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비통함에 빠지곤 한다. 그들은 농담이나 웃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통함에 빠지는 것은 웃기를 즐겨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100-104쪽

(위에서 계속)
지금까지 청년들과 노인들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신들의 고유한 성격에 알맞은 담론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자신과 닮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말에 외양을 부여하기 위해 어떠한 담론들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00-104쪽

(14장 성격들에 관하여-세대:중년기)
중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은 청년기와 노년기의 중간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결코 어떤 일을 대함에 있어서 넘치지 않는다. 또한 지나치게 확신하지도 않으며(이것은 경솔함에 해당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러한 두 가지 극단으로부터 균등한 거리를 두고 중용을 지킨다.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나 의심을 품지 않으며, 현실에 따라 상황을 파악할 뿐이다. 아름다움이나 이익 중 어느 한 가지에 따라서만 살지 않으며, 이 두 가지를 다 고려하여 살아간다. 결코 낭비하는 일이 없으며, 항상 적당한 선을 유지한다. 열정이나 욕망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용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절제할 줄 알며, 또는 절제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아래에 계속)-105-106쪽

(위에서 계속)
젊은이들과 노인들에게 있어서는 극단적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젊은이들은 용기가 있으나 절제하지 못하며, 노인들은 절제력은 있지만 비겁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중년기의 사람들은 청년기와 노년기의 성격 중에서 유용한 장점들을 고루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성격들을 넘치거나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항상 적당하고 중간적인 선을 지킨다.
육체적으로는 30세에서 25세까지가 중년에 속하는 반면, 정신적으로는 49세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각각의 시기가 보여주는 성격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도록 하자.-105-10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9-1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찰과 일반화가 취미이셨으며 일세의 미문장이기도 하셨던 아 선생의 영감 넘치는 인간관찰기. 쓰다 보니 점점 재미있어져서 13, 14장은 전부 옮겨왔다. 중용을 사랑하셨던 아 선생은 스스로가 중년이라는 이유도 있어서 중년의 특성들을 미화하고 있는 듯 하지만, 내 생각에 한 개인의 퍼스낼리티 안에는 아직 청년인 부분 -즉, 철이 덜 든 부분- 과 벌써 노년인 부분 -이미 늙아버린 부분- 이 공존한다.
 
수사학 1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종오 옮김 / 리잼 / 2007년 3월
절판


(2장 수사학의 정의 中)
수사학이 설득에 고유할 수 있는 것들을 사변적으로 발견해나가는 능력이라는 점을 가정한다면, 다른 어떠한 기술도 이러한 기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반면 모든 다른 기술들은 각각의 대상에 있어서 교육과 설득에 고유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의학은 건강과 병의 상태, 기하학은 규모의 변이, 산술은 수와 또 다른 기술들과 과학에 관계한다. 그런데 수사학은 모든 주어진 것에서 설득적인 것을 사변적으로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에게 기술이 고유하고 변별적인 한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58쪽

(3장 웅변술의 장르들 中)
'각각의 장르(인용자주-사법적 장르, 토론적 장르, 제시적 장르)는 분명히 우리가 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라는 지표는 종종 다른 것에 대해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소송인은 사실상 항상 완료된 행위나 그 원인인 손해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소송인은 자신의 유죄를 고백할 수 없는데, 만일 그가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면 소송자체가 제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종 조언을 하는 자들은 불필요한 논거들을 버린다. 그러나 조언자들은 자신들의 조언이 불리하다거나, 또는 자신들의 만류가 유용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접국의 국민들을 노예로 전란시키는 것이 조금도 불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던 사람조차도 종종 그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아래에 계속)-78-79쪽

(위에서 계속) 또한 마찬가지로 찬사를 보내는 자와 비난을 퍼붓는 자들은 자신들이 논하는 인물들의 행위가 유익한지 혹은 해로운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의무를 따르기 위해 사사로운 이익에 개의치 않는 사람에게는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가령 그들은 아킬레우스 스스로가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살 수 있으며, 한편 복수할 경우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한을 갚은 일에 찬사를 보낸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에게 있ㅇ서 이러한 죽음은 의미있는 것이었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78-79쪽

(5장 목표들:행복에 관하여 中)
아름다움은 나이에 따라 다르다. 젊은 남자의 아름다움은 고단한 일, 그리고 경마나 육상경기에 알맞은 신체를 갖게 하며, 우리에게 즐거운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5종 경기 선수들은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부적으로 힘과 속도를 동시에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성숙한 남자의 아름다움은 전쟁의 과업을 수행하하는 데 적합하며,불안감을 연상시키면서도 바람직해 보인다. 노인의 아름다움은 삶에 필수적인 일들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하지만, 부담이 되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화의 불편함 중에 그 어떠한 것도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95-9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9-1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즐거운 구경거리를 제공..." 따위를 보면서 실실 웃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뭔가 나 책을 읽는 자세가 좀 어긋나 있는 것 같은....;;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 현대 해석학의 경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석학 입문
리차드 E.팔머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0년 8월
장바구니담기


그리스어 '헤르메이오스(hermeios)'는 델피 신탁의 사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단어와, 또 이보다 더욱 자주 사용되는 동사 '헤르메네웨인'과 명사 '헤르메네이아'는 날개 달린 使者神 헤르메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앞의 세 단어는 헤르메스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헤르메스가 인간의 이해능력을 초월해 있는 것을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 주는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단어의 여러 다양한 형태들은 어떠한 사물이나 상황이 이해불가능한 것에서 이해가능한 것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이해능력이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가 헤르메스의 덕택이라고 믿었다. 철학 자체를 '해석'이라고 보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해석학으로서의 철학을 명시적으로 헤르메스와 연관지었다. (중략)
이처럼 헤르메스와 관련된 '이해에 이르는' 과정의 매개적 성격과 메시지-전달적 성격은 고대적인 용법의 '헤르메네웨인'과 '헤르메네이아'가 지닌 의미의 세 가지 기본적인 방향들 모두에 함축되어 있다.(계속)-34-36쪽

(위에서 계속)이들 세 가지 방향이란, 예를 들기 위하여 동사형만 사용해 말해보면, (1) 마로 크게 '표현하다', 즉 '말하다(to say)', (2) 하나의 상황을 설명할 때와 같이 '설명하다(to explain)', 그리고 (3)외국어를 번역할 경우에서처럼 '번역하다(to translate)'이다. 이 세 가지 의미는 영어의 동사 '해석하다(to interpret)'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이들 세 가지 의미 각각은 나름대로 해석의 독립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은 세 가지 서로 다른 문제들과 관련될 수 있다. 하나는 입으로 소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며, 나머ㅣ 하나는 다른 언어로부터 번역해 내는 것이다. -34-36쪽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분석'보다는 '번역'의 전문가가 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과제는 의미상으로 어색하고 이상하며 불분명한 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바꾸어서 '우리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9쪽

해석학의 분야는 (대략 연대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나뉠 수 있다. 1)성서 주석의 이론, 2)일반적인 문헌학적 방법론, 3)모든 언어 이해에 관한 학문, 4)'정신과학'의 방법론적 기초, 5)실존과 실존론적 이해의 현상학, 6)신화나 상징의 배후에 있는 의미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회상적이고 우상파괴적인 해석의 체계들-63쪽

지금까지 논의한 해석학에 대한 상호관련적이고 종종 중복되기까지 하는 6개의 정의는 시대적으로 1654년부터 현재에까지 걸친 것이다. 이 여섯 가지의 해석학은 지금까지도 현대의 해석학적 사고의 스펙트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도 뚜렷한 양극화 현상은 존재한다. 하나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를 따르는 전통으로서 이 전통에 따르면 해석학이란 해석의 근저에 놓여 있는 방법론적 원리를 일반적으로 모아놓은 결집체이다. 또 하나는 하이데거적인 전통인데 그는 해석학을 모든 이해의 성격과 필수적인 조건들에 대한 철학적인 해명이라고 간주한다.
오늘날 이 두 개의 기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한 인물은 해석의 이론을 저술한 에밀리오 베티와 앞으로 이 책에서 간략히 언급될 <진리와 방법>의 저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이다. 딜타이의 전통에 서 있는 베티는 인간 경험의 '대상화'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일반이론을 정립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해석 대상의 자율성 및 타당한 해석을 함에 있어서 역사적 '객관성'의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한다.(아래에 계속) -80-81쪽

(위에서 계속) 이와 달리 하이데거를 따르는 가다머는 이해 자체가 무엇인가라는 보다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그는 이해는 하나의 역사적 행위이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현재와 관련을 맺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석' 운운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역사 밖의 어떤 입장으로부터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탈신화화에 몰두하는 신학자들 -루돌프 불트만 및 신해석학의 두 지도자인 게르하르트 에벨링과 에른스트 푹스- 은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적이며 현상학적인 접근방법을 취하는 가다머와 같은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80-81쪽

이해가 해석으로서 즉 언어로서 명료화되면 초주관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언어는 이미 자기 내부에 형성된 개념성, 다시 말해서 이미 형성된 주시방식(way of seeing)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와 유의미성은 둘 다 언어와 해석을 위한 기초이다. 후기의 저작들에서 존재와 언어의 관련성은 더욱 강조되어 존재가 곧 언어적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말과 언어는 쓰고 말하는 사람들의 교섭을 위해 사물들을 포장하는 포장지가 아니다. 오히려 사물들을 존재케 하고 또 그 사물들이 사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과 언어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한 유명한 구절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199쪽

해석학 이론에 기여한 하이데거의 공적은 실로 다양하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이해(Verstehen) 자체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맥락에서 재정립하였으며 그 이후의 해석이론의 기본적인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해석학'을 현상학과 통일시하고 또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근본적인 기능과도 동리시함으로써 해석학이란 말 자체를 새로이 정의내렸다. 후기의 저작들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자신의 전형적인 철학하는 방법으로 체택함으로써, 자신은 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해석학적인' 철학자란 점을 시사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이란 단어의 보다 깊은 의미는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어 현존케 되는 탈은폐의 신비적 과정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해석학적인 절차에 의해 언어, 예술작품, 철학, 그리고 실존론적 이해 자체에 접근하였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광범위해 보이는 딜타이의 해석학 개념 -즉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토대로서의 해석학- 을 결정적으로 넘어섰다. (아래에 계속)-236-237쪽

(위에서 계속) 왜냐하면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해석학은 자연과학적 방법과 대비되어 우위를 지니는 (딜타이적인) 역사적 해석의 제방법이 아니라 이해의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생애에 걸쳐 딜타이가 헌신했던 정신과학-자연과학의 이분법은 이제 배후로 물러서게 되고, 모든 이해는 실존론적 이해의 역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전면에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성립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36-247쪽

가다머의 해석학과 여가의식에 대한 그의 비판이 함축하는 바는 과거란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실들이 집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활동하고 참여하는 모든 이해작용의 흐름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전통이란 우리와 독립되어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바로 그런 것이다. 대체적으로 전통은 너무나 투명한 매개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258-259쪽

이성의 요구와 전통의 요구간에는 어떤 본질적 대립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성은 항상 전통의 내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통은 이성이 작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현실과 역사의 측면을 제공해 준다. 궁극적으로 가다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전제적인 이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게 되고 또한 권위와 전통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누리지 못했던 지위를 되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268쪽

"시간적 거리는 주제의 본성에 속해 있는 일정한 선입견들이 사라지도록 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이해로 이끌 수 있는 선입견들이 두드러지도록 해 준다."
(가다머, <진리와 방법> 중 - 인용자주)-270쪽

부정성과 환멸은 경험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적 실존의 본성에는 부정성의 계기가 들어 있는데 이 계기는 경험의 본성 속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은 만일 그것이 경험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豫期와 맞부딪혀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가다머가 그리스 비극과 아이스퀼로스의 공식인 'pathei mathos'에 대해 '고통스러운 배움'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공식은 우리가 과학적인 지식을 획득한다는 뜻도 아니고 심지어는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보다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줄 지식을 획득한다는 뜻은 더 더욱 아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인간적 실존 자체의 한계들을 배운다. 우리는 인간의 유한성을 이해하게 된다. 경험이란 유한성에 대한 경험이다. 진정한 내적 의미에서의 경험은 우리에게 인간이 시간을 넘어서 있지 않음을 가르쳐 준다. '경험을 많이 한' 사람만이 모든 기대의 한계와 인간이 세우는 모든 계획의 불확실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폐쇄적이고 독단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새로운 경험에 대해 개방적이게 해준다.-286쪽

(14장에서 필자가 제시한 "해석에 관한 서른 개의 명제"를 인용자가 요약함)

1. 해석학적 경험은 역사적이다.
2. 해석학적 경험은 언어적이다.
3. 해석학적 경험은 변증법적이다.
4. 해석학적 경험은 존재론적이다.
5. 해석학적 경험은 하나의 사건-즉 '언어사건'-이다.
6. 해석학적 경험은 객관적(과학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객관적)이다.
7. 해석학적 경험은 텍스트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8. 해석학적 경험은 말해진 바를 현재의 빛에 비추어 이해한다.
9. 해석학적 경험은 진리의 탈은폐이다.
10. 미학은 해석학에 포함되어야 한다.
11. 현재 미국 문학은 주관-객관 도식을 극복해야 한다.
12. 예술작품의 자율성에 관한 한 '신비평'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옳다.
13. 방법이란 해석자의 측면에서 측정하고 제어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방법은 현상의 반대편에 놓여있고, 경험의 개방성에 대립된다.
14. 문학에 있어서 주관을 중시하는 태도는 텍스트를 대상으로 간주하게 한다. 텍스트에 대한 경화된 분석은 문학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15. 형식은 절대 문학 해석의 출발점이어서는 안된다.
(아래에 계속)-348-363쪽

(위에서 계속)
16. 문학 해석의 출발점은 작품 자체를 경험할 때 일어나는 언어적 사건 -즉 작품이 '말하고' 있는 바- 이어야 한다.
17.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문학의 말하는 힘에 대한 응답이다.
18. 해석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가 해석자를 사로잡는다.
19. 훌륭한 예술작품과의 만남의 핵심은 기술이나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경험이다.
20. 작품을 읽는 것은 자신의 낡은 지각 방식을 파괴해 가는 '경험'이다.
21. 문학작품의 이해는 물음과 대답을 통해 주제 자체로 접근해 나가는 소크라테스식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22. 예술을 보는 방법은 예술 작품의 존재방식 -세계를 탈은폐하는 사건- 에 근거해야 한다.
23.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텍스트에게 일방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제기하는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24. 현재 미국의 문학 해석이 지닌 커다란 결점은 역사의식의 부족이다.
25. 문학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26. 해석의 과제는 역사적 거리를 메우는 일이다.
(아래에 계속)-348-363쪽

(위에서 계속)
27.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적 이해와 역사의식은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현상학적 비판의 형태로 나타난다.
28. 문학작품의 이해는 동태적이고, 시간적이며, 인격적이다.
29. 과학과 개념적 인식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경험과 역사도 마찬가지의 연관을 갖는다. 문학 해석은 경험과 역사에 속함으로써만 본래적 기능을 다하게 된다.
30. 따라서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 해석의 커다란 과제는 과학적 객관성의 이상과 과학자의 지각방식을 파괴하고 실존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348-363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9-1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안 읽으면 안 되나 보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구판절판


<이온> 621-637, 이온
그리고 왕권에 대한 찬양은 근거 없는 거예요. 왕권은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지요. 암살당할까봐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무슨 만족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겠어요? 저는 왕이 되느니 차라리 평범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의 삶을 살고 싶어요. 왕이란 악당들을 친구로 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자기를 죽일까봐 착한 사람들을 미워하징. 아버지께서는 황금이 그런 것을 보상해주고 부는 즐거운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욕을 먹어가며 힘들게 축재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바라는 것은 적당한 재산에 근심 없는 삶이에요. 아버지, 이곳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들어보세요. 무엇보다도 저는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여가를 즐겼고 성가신 일도 별로 없었으며 저를 길에서 떠밀어내는 무뢰한도 없었어요. 사실 자기보다 못한 자들에게 양보하고 길을 비켜준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지요. -180쪽

<포이니케 여인들>, 198-201, 가정교사
여자들이란 원래 흉보기를 좋아하죠. 조금만 꼬투리를 잡혀도 그들은 침소봉대하지요. 서로 헐뜯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樂이니까요.-233쪽

<포이니케 여인들> 390-395, 이오카스테와 폴뤼네이케스
이오카스테:
왜 불행하지? 추방된 자들에게 괴로운 점이 뭐지?
폴뤼네이케스:
가장 나쁜 점은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오카스테:
그것은 노예의 운명이로구나. 제 생각을 말할 수 없다니 말이야.
폴뤼네이케스: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참고 견뎌야 하니까요.
이오카스테:
바보들과 함께 바보짓을 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
폴뤼네이케스:
이익을 위해서는 성미에 맞지 않더라도 종노릇을 해야죠.-240-241쪽

<포이니케 여인들>, 531-540행, 이오카스테
내 아들아, 어째서 너는 신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야심'을 쫓는 게냐? 그러지 마라. 그 여신은 불의해. 그 여신은 번성하던 수많은 가정과 도시에 들어갔다 나오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망쳐놓는단다. 너는 그 여신에 미쳐 있어. 내 아들아, 친구를 친구와 도시를 도시와 동맹군을 동맹군과 묶어주는 '평등'을 존중하는 편이 더 나을 게야. 평등한 것만이 인간들에게 합법성의 원천인 반면 '더 많은 것'에게는 '더 적은 것'이 언제나 적으로 다가가게 되어, 불화의 날이 시작되기 때문이지.-246쪽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446-453, 아가멤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유리한 점도 있어. 그런 사람은 마음대로 울 수 있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으니까.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행해도 탈출구가 없어. 우리는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대중을 섬기는 종들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부끄럽지만 반대로 더없이 큰 곤경에 빠진 딱한 처지에 눈물을 흘리지 않기도 부끄러워.-396-397쪽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919-937, 아킬레우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나는 마음속에 분기가 치밀어오르오. 하지만 나는 불행할 때는 슬픔을 성공할 때는 기쁨을 절제하는 법을 배웠소이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일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다는 이성에 근거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오. 너무 지혜롭지 않은 것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건전한 판단력을 갖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지요.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한 케이론의 집에서 자란 덕분에 솔직한 생활 태도를 배우게 되었소. 그래서 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이 잘 인도하면 복종할 것이나 잘못 인도하면 복종하지 않을 것이오. 이곳에서나 트로이아에서나 나는 내가 자유인임을 보여주며 있는 힘을 다해 창으로 분전할 것이오.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한 만큼 나는 젊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대에게 아낌없이 동정을 베풀 것이오. 그대의 따님은 내 신부라고 불렸던 만큼 결코 아버지에게 살해되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부군이 나를 이용하여 음모를 꾸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오.-415-416쪽

<박코스의 여신도들> 267-271, 테이레시아스
지혜로운 사람이 올바른 주장을 펼치려 한다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못되오. 그대도 슬기로운 사람처럼 혀는 잘 굴리지만 그대의 말에는 슬기가 들어 있지 않소. 그 능력이 대담성에 달려 있는 달변가는 결국 자신이 나쁜 시민임을 보여주기 마련이오. 그에게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오.-461-462쪽

<박코스의 여신도들> 1150-1152, 사자
절제와 신들에 대한 경외심이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재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내 생각에는 또 가장 지혜로운 것이오.-497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9-09-0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elene, Iphigeneia he en Taurois, Ion, Phoinissai, Orestes, Iphigeneia he en Aulidi, Bakchai, Kyklos, Rhesos의 9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