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구판절판


그 사회면 밑에 경시청 경찰관 모집 광고가 실려 있었다.
"알고 있지?" 세이지(淸二)는 그 광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작년 말부터 경시청이 대대적으로 순사를 모지하기 시작했어. 경찰 기구가 바뀐다더군. 순사가 만 명이나 부족하대."
다즈(多律)의 얼굴은 한층 불안해졌다.
"당신이 순사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당신은 제복 입은 남자를 싫어하니까."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 싫은 거예요."
"헌법도 바뀌었고 경찰도 민주 경찰이 되었어. 전쟁 전의 경찰하고는 달라. 내가 순사가 되는 게 싫어?"
"아뇨. 당신이라면 거드름이나 피우는 경찰관은 되지 않겠지만..."
"뭐가 걱정이야?"
"위험한 일이잖아요."
"무슨 일이나 어느 정도는 위험해. 학교 선생님이라면 또 몰라도."
"당신한테 잘 맞아요?"
"난 이런 남자야." 세이지는 말했다.
철이 들 무려부터 의식했다. 군대에 징집된 후에는 확신으로 변했다. 나는 융통성 없는 옹고집이다. 질서정연한 것이 좋다. 남이 나쁜 짓을 할 때 잠자코 지나칠 수가 없다. 성질이 이러니 순사라는 직업에 잘 맞을 것이다. 적어도 포목점 점원이나 시계 직공 같은 일보다는.
"나한테는 순사 일이 잘 맞을 거야."-18-19쪽

"군대에서 하사관 이상의 계급이었던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몇 명의 사내들이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부 세 명이다.
곤노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계급은?"
"제국육군 오장입니다."
"외지에는 가보았나?"
"북부 지부에 갔었습니다."
하사관이었다는 남자는 한 사람 더 있었다.
교관은 세 번째 남자 앞에 섰다.
하야세 유조(早瀨勇三)였다.
교관이 물었다.
"자네, 계급은?"
하야세는 대답했다.
"제국육군 보병 소위입니다."
세이지는 저도 모르게 하야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느낌은 없는 사내였는데.
곤노가 하야세에게 다시 확인했다.
"간부후보생 출신인가?"
"예."
사관학교 출신은 아니다.
"연대는?"
"사쿠라입니다. 보병57연대."
"제1사단인가. 그렇다면 전지는?"
"필리핀이었습니다. 레이테(Leyte)에서 전역했습니다."
곤노는 조금 기가 눌린 표정이 되었다.
"그런가." 곤노는 다소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수고 많았네."-30-31쪽

소등 전, 세이지가 기숙사에서 그날의 일보를 쓰려는데 젊은 구보타가 하야세에게 말했다.
"하야세 씨, 한자 좀 가르쳐주십시오."
하야세도 일보를 쓰던 참이었다. 고개를 들고 구보타에게 말했다.
"어떤 글자야?"
"질서입니다만, 제가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요."
"보여줘 봐."
구보타가 하야세에게 자기의 일보를 내밀었다.
세이지도 손을 멈추고 하야세와 구보타를 쳐다보았다.
하야세는 구보타의 일보에서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보로 사상 경향을 보는 거야. 이런 서류에는 평범한 내용을 쓰면 돼. 민주 일본이니, 정의 사회니 하는 건 자네가 써서 좋을 것 없어."
구보타는 변명하듯 말했다.
"저는 정말로 민주 경찰로 민중을 위한 순사가 되고 싶습니다. 경찰도 바뀌었잖아요?"
"상부에는 아직 좌익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버티고 있어. 훈련소를 졸업할 때까지 이런 내용은 쓰지 마. 순사가 못 된다고."
"그런가요?"
"좀 더 무난한 내용을 써. 순사의 마음가짐에 대한 강연이 인상적이었다든가."
"예."
세이지 옆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가토리가 조심스럽게 하야세에게 말했다.
"하야세 씨, 내 일보도 좀 봐주지 않겠어?"
-34-35쪽

훈련이 2주째로 접어든 어느 날, 체포술 시간의 일이었다. (중략)
하야세 차례가 되었을 때, 하야세가 의외로 격투기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대의 오른팔을 낚아채 순식간에 다다미 위에 깔아 눕힌 것이다. 그 직후에 하야세는 상대의 목에 팔을 둘러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상대는 고통스럽게 발버둥을 쳤다. 몇 초 동안 세이지와 동기들은 눈앞에서 무슨 짓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를 못했다. 하야세의 얼굴도, 목을 졸리고 있는 상대의 얼굴도 새빨겠다.
진심인가?
교관이 간신히 알아차리고 하야세에게 엄하게 말했다.
"그쳐! 이제 됐다. 끝났다."
하야세는 그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상대의 목을 팔로 졸고 있다. 교관이 하야세의 등울 무릎으로 찍어 하야세를 떼어냈다. 하야세는 교관이 건드리자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 얼굴이었다. (중략)
"죄송합니다. 조절한다는 걸 그만 깜빡했습니다."
하야세가 뒤로 물러나자 가토리가 하야세에게 물었다.
"당신 유도 했었어?"
하야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장에서 배운 게 다야."
세이지에게는 유도 이상의 기술이다, 라는 말로 들렸다.-37-38쪽

박물관 앞까지 왔을 때 하라다를 보았다. 하라다는 길바닥을 둘러보면서 걷고 있었다. 담배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선생님이라면.
세이지는 발길을 멈추고 하라다를 불러 아이의 출생을 알렸다. 이름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이름이 좋을지 떠오르지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라다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아버지가 가진 최대의 권리라고 말했다.
세이지는 말했다.
"고작 고등소학교밖에 못 나와서 글자도 제대로 모르고, 글자가 가진 심오한 뜻도 이해 못합니다. 선생님께서 살짝, 어떻게 지어야할지 방법이라도 가르쳐주시면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라다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성이 안조(安城)라고 했지? 사내놈이라면 이름은 세 음절이네."
"세 음절이요?"
"그래. 노보루나 가즈오나. 이게 노부가츠니 테루아키니 하는 네 음절짜리 이름이면 자네 성씨 밑에서는 조화를 못 이뤄."
"세 글자로 지으라는 말씀이군요."
"음이 세 개. 글자는 두 글자지. 읽기 쉬운 글자가 좋아. 아이 이름을 너무 복잡하게 지으면 안 돼. 아이가 고생해."
"세 음절. 두 글자. 읽기 쉬운 글자. 이거죠?"
(아래에 계속)-73-75쪽

(위에서 계속)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얼마 전까지 세상에는 충효니 승리니 하는 것들이 넘쳐났지. 지금은 세상도 변했어. 솔직한 마음으로 이름을 붙이면 되지 않겠나?"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하라다가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개비만 나눠주지 않겠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보니 세 개비가 남아 있었다. 세이지는 그걸 통째로 하라다에게 건넸다. (중략)

다즈는 웃는 얼굴로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사내아이예요. 한 관에 조금 못 미치는 커다란 아이예요."
산파가 갓난아기를 들어 올려 안겨주었다. 갓난아기는 지금 막 젖을 먹었다고 한다. 자고 있었다. 쪼글쪼글한, 다들 그렇듯이 원숭이같은 핏덩이였다. 자기하고 다즈, 누구를 많이 닮았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산파가 말했다.
"어미를 닮았어. 몸은 바깥 양반을 닮았고. 잘 크겠어."
다즈가 물었다.
"이름, 생각해봤어요?"
"응."
세이지는 갓난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미오야. 민주주의 할 때의 민(民)에 영웅 웅(雄)."
"좋네요." 다즈가 찬성했다.-7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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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2-25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 이름을 붙이는 장면에서 왜인지 눈물이 확 솟았다.
멋진 소설. 지금부터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마이리뷰를 써야지...
 
텍스트언어학 개론
Wolfgang Dressler 지음, 이재원 옮김 / 한국문화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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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순한 의미적 응결성의 수단은 낱말 반복의 형태인 반복이다. 그러나 문장과 같은 큰 구조에서 어느 정도의 반복이 가능한가? (문장의 반복은) 화자가 수다스럽거나 장황스러운 타입의 사람이라면, 또는 화자 생각에 청자가 이해를 못했거나 청자를 믿지 않을 경우, '확인'으로 사용될 수 있다. 또한 '강조'도 가능하다. 미를 추구하는 문학작품에서의 반복은 텍스트 종결 수단이 된다. 더욱이 조롱하기 위해서 반복할 수 있고, 발화를 이해 못했기 때문에, 또는 사람들이 이 발화를 믿지 않기 때문에 반복한다. 선서와 맹세에서 정확하게 반복하는 것은 필수이다. 대답에서는 질문에서 사용된 것이 인용되거나 낱말이 반복된다. -41-43쪽

의미적 응결성에서처럼 다시쓰기에도 어느 정도의 '반복'이 있다. 그러나 의미 내용이 같은 낱말 형식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문장이나 부분 문장의 형태로 반복된다. 이와는 달리 유의어에 의해서는 낱말이 대치된다. 통사적 변형은 잘 알려진 요약(collectio)이라는 라틴어 부류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주제에서 이탈한 반복이나 생각하고 있는 것을 중심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의미적 다시쓰기와 같은 것이다. 의미적 응결성 수단으로서의 반복과 다시쓰기는 일반적으로 여러 상이한 문장에서 동일한 간위를 서로 관련짓게 한다.-44-46쪽

기능적 문장 관점이라는 술어에서 우선적으로 테마(Thema)는, 대부분의 미국 언어학자들의 초점(topic)에서처럼 문장의 토대 또는 출발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새로운 정보로서의 레마(Rhema, comment)와는 반대로, 주어진 것이나 알려진 것으로서의 테마는 문맥적 내지는 텍스트적/텍스트 내적 의미이다. 따라서 테마는 상황에서 나온 문맥이나 복사에 의한 지나간 텍스트 단편에서 생겨난 텍스트 내적 차원에서 얻어진다.-87쪽

가장 작은 역동성을 가진 문장의 부분 단위는 테마이고, 가장 큰 역동성을 가진 문장의 부분은 레마로 표현된다. 테마와 레마 내에서 통보적 역동성이 바뀌면, 역동성의 극단적 경우로서 테마 내지는 레마의 핵심이 언급된다. 따라서 레마는 새롭거나 기대치 않았던 정보를 표시하는 반면에, 테마에서는 문장의 출발점으로 선택된 기저 뿐만 아니라 상황이나 이전 텍스트 단편에서 유래한 알려진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텍스트언어학은 테마의 궁극적인 이해와 관련 있다.-108-109쪽

따라서 모든 문장에서 텍스트나 문맥과 관련지어 보면 새로운 정보(레마)는 여러 가지 수단(억양, 강세, 어순, 관사선택)에 의해서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강조는 대부분 대비적 강세나 강조적 강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강조는 텍스트나 문맥과 관련있다. 강조는 텍스트 진행에 대한 청자의 기대 내지는 화자가 청자의 기대를 계산하는 것과 관련 있다.-113쪽

청자는 자신이 들었던 텍스트의 첫 문장을 가지고 화자가 여러가지 강도로 충족시키거나 실망시킬 수 있는 텍스트 진행에 대한 기대를 한다. (중략) 화자의 전략은 청자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화자의 기대에 따라 청자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미친다. 만약 청자가 자신의 긴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추측하게 되면, 그리고 그 긴장이 해소되지 않거나 청취된 텍스트가 긴장감이 없다고 간주하게 되면, 청자는 그 사이에 질문을 하고, 텍스트의 수용내지는 생산을 중단하거나 중지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 텍스트는 청자/독자의 기대, 즉 텍스트가 일반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야만 한다는 화용적인 기대에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114-115쪽

접속사 삽입은 의미를 명료하게 해주고, 잉여성을 높여주고, 오해의 위험성을 줄여준다. 문어 텍스트에서는 구두법이 이와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접속사와 그 밖의 연결사들은 문장들을 덜 밀착된 관계에서 밀착된 관계로 만들면서 집합적으로 분류한다. 접속사와 다른 연결사들은 의미적 문장 연결 관계의 단지 외적인 표현이다. 이들은 한편으로 잉여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확하고 수의적인 단위이다.-145쪽

'감탄사'라는 명칭이 암시하듯이 감탄사에게는 텍스트를 분절하기 위한, 또한 텍스트를 경계짓기 위한 권능이 주어진다. 그래서 많은 미국 언어학자들의 강연은 Well로 시작하고 OK로 끝난다.-153쪽

침묵은 완전히 다의적이다. 침묵은 특히 1)텍스트 종결 2)화자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함 3)말하기의 게으름(과묵함) 4)화자가 말을 계속하는 것에대한 흥미 없음 5)대답할 수 없음 6)대답하기 싫음(예를 들어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7)공손함과 전례적 이유 때문ㅇ 의도적으로 침묵함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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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존 스트리트 엮음, 장호연 옮김 / 한나래 / 2005년 9월
절판


Simon Frith "대중 음악 산업" 中
음악은 항상 집단의 정체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공동체는 그들의 음악적 기억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한다. 또한 음악은 늘 민족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조작되었는데, 이는 국가나 민요로 만들어져 비민족주의자들을 '우리의' 노래를 저버린 '타자'로 규정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상업적 음악 산업이 행한 것은 음악이 소속감(그리고 배타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판매 전략으로 이용한 것이다. 스타 시스템을 통해서든(팬들은 우상과 일체감을 느낀다) 혹은 더욱 중요하게는 장르 마케팅을 통해서든(컨트리나 헤비 메탈 같은 음악 유형은 이데올로기적 공동체를 나타낸다) 음반 판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 선택이 그저 개인의 몰입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공동체로 편입시키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음악 취향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헛될지언정 사람들이 취향을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진술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86-87쪽

Will Straw "소비" 中
분명한 것은, 사춘기 시절에 사람들이 소비자로서 자신의 취향과 솜씨를 탐구(하고 개발)하기 시작하는 하나의 영역을 음악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음악 관련 일용품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구입한 최초의 물품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으며, 반복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개인의 미적 판단 기준이 소비자 거래에서 형성되고 개척되는 핵심적인 영역이 된다. 이러한 거래를 통해 사람들은 소비자로서의 선택이 갖는 사회적, 개인적 의미를 처음으로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어린 시절부터 소비자는 상업성과 진정성, 진실한 것과 가식적인 것, 뒤쳐진 것과 유효한 것을 저울질한다. 이러한 선택은 새로운 스타일과 품목이 계속적으로 교체되는 흐름을 배경삼아 일어난다. 이런 변화에 의의를 부여하거나 어떤 태도를 취함으로써 근본적인 사회적 도전을 바꾸는 굳건한 또래 문화에 속한 것은 청년들뿐이다. (중략) 음악은 젊은이들이 지위와 정체성의 복잡한 게임에서 타인과의 차이를 구별짓는 중요한 징표를 제공한다.-126쪽

스타 프로필 James Brown 中
단순하게 정리하면, 1950년대 리듬 앤 블루스 이후 흑인 미국 음악의 역사는 소울(레이 찰스Ray Charles가 발전시킨)과 펑크(제임스 브라운이 발전시킨)라는 두 조류로 나뉜다. 이는 동일한 음악적 요소(재즈, 블루스, 가스펠)가 다른 사회적 목적을 위해 발전한 것이다. 소울 음악은 유혹의 형식이며 개인적 신념을 담은 언어로서의 음악이자 애교부리기의 연주다. 펑크는 당신의 얼굴에 내지르는 것으로 음악가가 우쭐거리며 뽐내는 사운드이며, 당신의 욕망이 아닌 그들의 욕망의 힘에 저항하도록 당신을 부추긴다. 대체로 소울은 이제 현대 팝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고(상업적인 판매 과정에 더 어울리기 때문에), 펑크는 아직도 불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제임스 브라운의 어떤 트랙도 이지 리스닝으로 분류될 수 없다.-155쪽

스타 프로필 - Marvn Gaye 中
모타운은 흑인 음악을 백인 청중에게 팔려는 것을 목적으로 베리 고디Berry Gordy가 설립한 레이블이었다. 모타운의 정책은 제작(그리고 이윤 추구)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성공을 위해 백인 청중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었다. 인종 정치의 관점과 민권 운동, 흑인 미국인 의식의 개발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모타운은 실로 가장 성공한 흑인 기업이자 흑인 소유의 메이저 으만사로서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문화적으로는 혼란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모타운의 음악가들은 누구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록과 그 반상업주의 이데올로기의 맥락에서 보면(1960년대 말이 되면 모타운은 록 팬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상업적 쓰레기'라는 비판을 수시로 받았다) 레이블이 백인 시장에서 성공한 것조차 정치적인 문제였다. 레이블 자체도 그랬지만 마빈 게이 역시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록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공신력 있는 상업적 성공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백인 댄스 플로어가 모타운을 영감을 준 모태로 재평가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158-159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팝 음악은 너무도 친숙하고 너무도 쉽게 사용되는 개념이라 정의하기가 모호하다. 팝은 한편으로는 클래식, 또는 예술 음악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속 음악과 구별되지만, 이를 제하면 모든 종류의 스타일을 포괄할 수 있다. 이는 엘리트를 겨냥하거나 일종의 지식이나 청취 기술이 필요한 음악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이다. 이윤을 위해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음악으로 기획의 문제이지 예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정의할 때 '팝 음악'은 록, 컨트리, 레게, 랩 등 현재의 모든 대중적 형식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괄적 정의에는 문제가 있으며, 이는 국가가 팝을 법적으로 정의하려 시도할 때 분면하게 드러난다. 1990년 (음반 라디오의 컨텐츠를 규제하려는 목적에서) 영궁의 입법자들이 '팝 음악'을 "강한 리듬 요소가 있고 연주를 위해 전자적 증폭에 의존하는 특징을 갖는 모든 음악"으로 정의했을 때, 이는 음악 산업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아래에 계속)-165-166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음악적 정의가 팝('10대를 겨냥한 싱글 중심의 인스턴트 음악')과 록('성인을 위한 앨범 중심의 음악') 사이의 사회적 차이를 간파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팝은 포괄적 범주가 아니라 잉여적 범주가 된다. 다른 형식의 대중 음악을 모두 제하고 남은 것이 팝이며, 록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이들만이 팝을 경멸의 용어를 써가며 멀리하는 것이 아니다. 컨트리 음악 연주자들도 Olivia Bewton-John 같은 '팝 스타들'이 컨트리 음악상을 가져가는 것을 마찬가지로 싫어하며, 오늘날 랩의 팬들은 Will Smith 같은 크로스오버 스타를 그저 '팝 행위'일 뿐이라고 무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팝은 그것이 무엇인가보다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더 잘 정의된다.-165-166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대부분의 팝은 가족 음악이라 불릴 수 있다. 예컨대, 유로팝은 1966년 Los Bravos의 밀리언 싱글 "Black Is Black" 이후 여름 휴가의 사운드가 되었다. 로스 브라보스는 독일인 리드 싱어와 영국인 프로듀서로 된 스페인 그룹이었다. 이들의 성공 이후 상업적 기회를 노린 유럽인들이 국경을 넘어 협력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유로팝(이는 프로듀서 중심의 형식이다)의 프로듀서가 갖추어야 할 솜씨는 고등학교 수준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자라면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유럽 언어로 된 가사와, 대륙의 모든 디스코텍과 휴양지에서 집단적으로 불릴 만한 코러스에 최신 유행 사운드를 붙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독일 프로듀서 Frank Farian이 조직한 카리브해 지역 출신(영국과 네덜란드를 경유한)의 4인조 그룹 Boney M은 1975-8년까지 5000만 장의 음반을 팔았고, 스웨덴 그룹 아바ABBA는 1974년 유로비전 송 경연 대회를 석권한 후 18곡의 유럽 차트 톱 10 히트곡을 연속적으로 내놓았다. (아래에 계속)-167쪽

(위에서 계속) 두 그룹 모두 휴양지 전문 디스코 댄서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청중에게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인기를 얻었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러스에 볼품 없는 성적 매력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바는 1970년대 말 게이 음악 문화에 주요 영향력을 행사한 캠프적 매력을 발산했다.-167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팝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그것은 개인의 비전을 실현하거나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상실, 질투처럼 흔해 빠진 감정을 표현하는 대중적 곡조와 클리셰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팝의 작동 방식은 개별적인 청자로서 우리에게 각별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결은 팝 가수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지, 자신의 개성을 노래에 담아 우리가 이를 우리의 노래로 여기게 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Noel Coward가 싸구려 음악의 '위력'이라고 기술했던 팝의 역설이다. 우리는 팝 음악 일반을 시시한 상업적 속임수라고 무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특정한 팝을 우리의 살 ㅁ속에 예기치 않은 깊은 울림을 주는 소리로 들으며 감동한다.-169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팝의 관점에서 마이크로폰의 중요성은 그것으로 인해 크게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소리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기 마이크로폰의 즉각적인 효과는 무대보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감지되었다. 마이크로폰은 새로운 보컬 기교(크루닝, 토치 싱잉torch singing)를 낳았고 횡격막의 통제보다 마이크 기술에 더 의존하는 새로운 종류의 가수를 등장시켰다.
이러한 가수들 중 최고의 이들(대표적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와 Billy Holiday)은 새롭게 표현적인 친밀감을 갖고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이제까지 사적 대화에서만 가능했던 음조와 음고가 이제 공적으로 재생될 수 있었으며, 물론 이러한 친밀한 대화의 중심은 사랑 고백과 욕망의 암시였다. 청자들은 이제 자신이 가수를 알고 있고 가수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종류의 정서주의와 에로티시즘을 팝에 가져왔고, 새로운 종류의 스타덤인 아이돌 팝 가수를 출현시켰다.-171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폴 매카트니는 한때 팝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랑 노래'라고 요약한 바 있으며, 1940년대(1942-3) J G Peatman이 미국의 히트 퍼레이드 내용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성공적인 팝송은 모두 낭만적인 사랑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피트먼은 미국 팝의 특징을 세 가지 서술적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한 노래, 사랑 때문에 좌절한 노래, 그리고 섹스에 흥미를 나타낸 노벌티 송이 그것이다.-178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어떤 스타일과 어떤 연주자도 '록'이라는 외투를 두를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ㅏㄷ지 않는데, 그것은 록 문화가 배제의 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록이라는 개념에는 부드럽고 무해하거나 시시하다고 여겨지는 대량 유통 음악을 거부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것은 보통 가치 없는 '팝'으로 무시당하는 음악으로, 바로 록의 정반대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대신 '록'이라는 이름을 누릴 만하다고 생각되는 스타일, 장르, 연주자는 어떤 식으로든 진지하고 중요하고 적법하다고 간주된다.-192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의 등장에 영향을 준 포크 음악 문화는 사실 1950년대 내내 폭넓은 관심을 얻어가고 있던 포크 리바이벌이었다. 그것은 주류의 대량 생산 음악을 인공적이고 하찮은 것이라고 거부한 식자층의 도시 사람들에게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주류 대신 그들이 찾아 나선 것은 음악적으로 'ㅈㄴ정한 것', 즉 흑인이든 백인이든 시골과 관련되고 산업화 전 단계의 공동체 음악 작업과 ㄱ연관된 주변부의 음악 전통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어쿠스틱 악기, 구전되는 노래, 토속적인 양식의 연주를 받아들였다. 오래된 스타일과 노래를 부흥시킴으로써 포크 문화는 동시대 음악을 암암리에 비판하는 일을 했다. (오래되고 농민적인 형식의) 블루스를 강조했다는 것은 바로 포크가 아프로-아메리칸 음악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백인 중산 계층에 전파되는 결정적인 통로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210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성인'은 대량 사회의 모든 악을 저장하고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청년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거의 하위 문화의 함의를 띤 '反대량'의 하위집단으로 여겼다. 이런 차이의 인식, '타자' 인식은 청년들로 하여금 권능이 박탈당한 소수자의 문화에 호감을 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수많은 백인 중산 계층의 록 팬들은 인종적, 성적, 계급적 차이가 있는 다양한 형식들을 전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록 문화가 오갖 종류의 주변과 타자에 매혹되고 이를 전유하는 밑바탕이 된다. '흑인' 음악이든, 양성적 스타일이든, 노동자 반항이든 록은 각각을 분면한 차이를 가진 기표로 처리하여 청년의 주변성에 접목시켰다.-215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의 신화는 주류 음악 씬 외부를 주요 무대로 하는 창조 이야기를 내세운다. 주변에 위치한 블루스와 컨트리 전통이 부정하게 만나 사생아를 낳았고, 이는 잠깐 동안 진정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음악 산업에 으해 포획되고 흡수되고 타락했다는 이야기다. 원래 대량 문화의 외부에서 유래한 록은 이렇듯 대량 유통의 과정('상업화'라 불리는)을 겪으며 길들여진다. 이런 신화는 록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원칙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1960년대 주안 록의 탄생에 부유하고 대량 매개된 청년 문화가 행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무시한다. 3년 만에 잘 팔리는 10대 우상에서 잘 팔리는 록 아티스트로 변모한 비틀스의 경력은 진정 대중적인 것의 지대에서 록이 탄생하고 성장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3-64년 경만 해도 비틀스는 대항적인 시인/몽상가가 아니라 그저 엄청난 성공을 거둔 10대 팝그룹에 불과했다. 그런데 1967년이 되면 비틀스는 여전히 수백만 장의 음잔을 팔았지만 앨범의 비중이 증가했으며, 이제 대중적 주류의 새로운 계층을 대표하는 그룹이 된다.-216-217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ㅇㄴ 가사와 음악을 만드는 '작가'가 못 되는 가수와 음악가를 매우 수상쩍게 바라본다. 싱어 송 라이터는 1960년대 말에 진정한 록의 이상으로 등장하여, 작가 정신과 연주의 통합이 윤리적 완전함의 증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많은 대중 음악 문화가 음악 작업의 분업 (작곡가는 곡을 쓰고, 편곡자는 편곡을 하고, 반주자는 반주를 하고,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에 대해 별 문제를 느끼지 않지만, 록 문화는 이를 잠재적으로 왜곡과 소외의 소지가 있는 매개 형식으로 보아 진정한 사고와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을 방해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록은, 이런 분업을 극복하고 창조와 소통, 착상과 연주의 통합을 통해 유기적인 표현력을 드러내는 연주자를 선호하는 것이다. 특히, 록 밴드가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완비된 단위라는 생각은 매개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표현하는 것을 장려했다.-228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 이전에는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문화적 주류와 문화적 주변이 분명히 구별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록이 대량 문화와 생각 없는 순응 사이의 상징적 연결고리를 끊자, 대중적인 것의 지대 속에서 새로운 구별을 만드는 것과 상업적 대량 매개 문화를 통해 대항적 감수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록은 지배 문화와 지배받는 문화 사이의 관계 재배치를 도와 주변이면서 주류이고, 反대량이면서 대량이고, 종속적이면서 지배ㅈ적인 무언가를 생산했다. 이렇게 록은 '하위지배subdominant' 문화라 불릴 만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서 오랫동안 행사해 왔다. 그 결정적인 몇몇 특징이 이제 다른 영역의 문화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량의 상업 문화 내에서 '대량'에 반대하는 경향은 불량 소년 이미지의 영화 스타, 의전을 위반한 서민의 왕세자비,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토크쇼, TV에 방영되는 외설 만화, 법과 조직 심지어는 논리의 한계마저 넘어 활동하는 허구의 FBI 요원 등 오늘날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 모두는 하위 지배 문화의 충동이 록이라는 출생지를 넘어 널리 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38쪽

Russell A Potter "소울에서 힙합으로" 中
'소울'은 로큰롤이 점차 음악 산업을 지배하던 시기인 1955년에서 1967년에 이ㅡ는 바로 그 시기에 리듬 앤 블루스를 다음 차원으로 이끌었던 이런 음악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일까? 소울은 보다 서서히 타오르지만 더 뜨거운 음악이며, 보다 즉흥적이고 연주자의 보컬 개성의 향취가 더욱 독특하며, 좀더 참여적이다. 로큰롤이 빠른 템포의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과 더불어 어떤 면에서 외향적이라면, 소울은 좀더 내향적이고 '소울' 형제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호소력있는 구심점이다. 가스펠로부터 보컬의 예를 많이 취했지만, 비트는 1950년대 중반 손뼉으로 장단 맞추는 리듬 앤 블루스에 비해 감정이 많이 투여되었다.(템포가 느릴 때조차 그렇다). 1년에 수백 회의 라이브 공연을 가졌던 제임스 브라운의 페이머스 플레임스 같은 밴드의 녹음을 들어보면 활력이 넘치면서 거칠고, 분노에 차면서도 사려 깊고, 춤추기 좋으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 (아래에 계속)-243-244쪽

(위에서 계속) 백인 프로듀서나 음반 레이블이 음악가에게 스튜디오에서 테이프를 걸어둔 채 '잼jam' 세션을 갖자고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소울 음악가들은 언제나 이렇게 했다. 신시내티의 킹 레이블에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음반을 낸 제임스 브라운은 비닐 싱글의 두세 면 내지 네 면까지 이어지는 스튜디오 잼을 녹음한 적이 있다. 브라운은 그저 가수가 아니라 훈계자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괴성은 그의 밴드와 청중 모두를 새로운 차원의 흥분으로 몰아갔다. 브라운의 음악은 라이브 연주뿐만 아니라 자신의 곡의 끝없는 재작업을 통해 청중과 나누는 대화의 일부가 되었다. 한동안 공연장에서 연주하던 곡을 보다 갱신된 형태로 녹음해 발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의 청중과의 대화는, 주로 라디오와 판매 차트에 의존하여 발매 음악의 가치를 평가했던 메이저 음반 레이블 관계자들이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243-244쪽

Russell A Potter "소울에서 힙합으로" 中
스택스Stax가 소울의 양지라면 모타운은 소울의 음지였다. 모타운은 스택스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어지만, 음반 산업이 흑인 음악 형식과 벌인 불편한 거래의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모타운의 베리 고디는 소속 아티스트를 심하게 부려먹고 홍보를 위해 고단한 버스 순회 공연에 내몰면서 고작 표준적인 로열티의 5분의 1 정도만 지급했다. 고디는 팝음악 라디오와 소매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에 주력하여 주로 발라드와 가벼운 댄스곡들을 취급했다. 그리고 이런 곡들은 모두 모타운 스타일에 확실히 잘 들어맞도록 레이블 내의 '품질 관리' 팀의 검사를 거쳤다. 악기 연주자들은 기본 수당만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실현에 도움을 준 곡의 크레딧을 받는 겨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자신의 명의로 레코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반면 스택스는 하우스 밴드를 중심으로 구축된 독특하게 무거우면서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추구했다. 스택스의 하우스 밴드는 부커티앤더엠지스Booker T and the MGs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요하다면 작곡 크레딧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래에 계속)-245-246쪽

(위에서 계속) 소유주와 A&R 매니저가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택스는 흑인 아티스트와 송라이터에 보다 헌신적이었고 흑인 라디오를 통해 이들을 홍보하는 데도 주력했다. 모타운이 직접적으로 팝 차트 -그리고 백인 소비자- 를 겨냥했다면, 스택스는 언제나 리듬 앤 블루스 청중을 먼저 생각했으며, 1963-5년 "빌보드" 잡지가 리듬 앤 블루스 차트 집계를 중단했을 때에도 이는 변함이 없었다. 고디가 처음으로 계약을 맺은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인 Marble John은 1965년 모타운을 떠나 스택스로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타운은 기본적으로 소울 회사가 아니라 팝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팝 가수가 아니다. 고디는 소울 작곡가나 프로듀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약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존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모타운은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더 같은 아티스트들이 실력을 펼치는 토대가 되었으며, 이들은 하우스 중심의 포맷이 갖는 한계에 도전하여 결국 오티스 레딩, Sam and Dave, Carla Thomas 같은 스택스의 거인들만큼이나 '소울'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245-246쪽

Russell A Potter "소울에서 힙합으로" 中
보통 힙합은 랩 음악뿐만 아니라 그래피티와 브레이크댄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브레이크댄싱은 이후 세월이 흘러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이런 힙합 예술에는 스크래치 미학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그것은 도시의 벽, 낡은 비닐 음반, 마분지 상자 같은 쇠퇴하는 하부 구조에 새겨진 예술을 재평가하는 것을 뜻한다. 전당포 기타와 깨진 병이 블루스를 토착 예술로 만들었듯이, 1970년대 '공원 파티'의 낡은 턴테이블과 응급 장비용 페이더, 가로등의 전기는 힙합을 본질적으로 도시 청년의 예술로 만들었다. 푸에르토리코인과 백인 디제이, 브레이크댄서들이 힙합의 초창기 씬의 본질적인 부분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흑인 예술이며, 대중 매체의 그림자에서 결코 멀리 벗어난 적이 없지만(그리고 나중에는 대중 매체에 의해 과도하게 가려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토착 예술이다.-254쪽

John Street "록, 팝, 그리고 정치" 中
좌파와 우파 음악가들은 대중 음악을 자신의 정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자신의 견해를 공란의 節이나 라임이 들어맞는 對句에 넣고, 쿵쿵거리는 베이스 드럼에 실어 날랐던 것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게 된 계기는 예부터 음악이 정치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쉽고 유연한 발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하의 사람들에게 노래(시와 마찬가지로)는 정치적 견해를 은유와 제스처에 숨겨, 즉자적이고 시각적인 것을 중심으로 조직된 검열 제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록과 팝을 정치적 발판으로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음악이라는 형식이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쉽고 이를 조직하는 제도가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팝 음악은 상업적이고 산어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중문화 형식처럼 훈련과 테크놀로지, 자본의 장벽이 높디 않다. 그리고 팝음악은 상업적이고 산업적인 속성 때문에 (연극처럼) 보조금을 받는 예술이나 (영화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상업적 산물에 따르는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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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1-2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말 레포트에 각주 한 줄을 추가할 수 있었을 뿐이지만, 시작할 때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듯한 대중음악의 장르 명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소득이 크다.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박수밀 지음 / 태학사 / 2007년 5월
절판


조선조는 거대 담론으로 통하는 시대였다. 추상적이며 보편적 언어로 세계를 규졍했다. 미미한 존재는 몰가치했으며 일상의 사물들은 관심 너머에 있었다. 존재는 道를 드러낼 때 의미를 지녔으며 거창하고 고상한 것만이 인정받았다. 고정된 가치체계와 전범을 숭상하고 절대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였다.
그런데 어느 시저기에 이르자 전범이 부정되고 주류 이데올로기가 도전받는다. 이른바 이단 서적이 암암리에 유행하고, 주변의 존재들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개별적 존재의 발견, 하찮은 사물에 대한 관심, 자연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가냘프고 감성적인 속성의 小品文이 한 흐름을 혀성한다. 무엇보다 소품은 몰가치해 보이는 세계를 은밀히 드러내어 정통 고문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체상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16쪽

일찍이 주희는 도연명과의 만남을 두고 "나는 천년 뒤에 태어났지만 천년 전 친구와 벗한다네."라고 읊은 바 있다. 맹자 또한 천하의 좋은 선비와 벗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못한다면 거슬러 올라가 벗하라 가르쳤다. 이후 상우천고(尙于千古)는 수많은 중세 학자들에게 우정을 가늠하는 시금석과도 같은 용어가 되어 왔다. (중략) "논어", "맹자" 등의 경서, "사기"를 비롯한 각종 역사서에서는 늘 友道를 언급하며 바람직한 우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43쪽

마음에 꼭 드는 시절을 만나 마음에 꼭 드는 친구를 만나서 마음에 꼭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꼭 맞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인데 그런 일이 어찌도 적은가. 일생을 통해 몇 번쯤이나 될까?
(필자주: 이덕무 "청장관전서", '선귤당농소" 値會心時節 逢會心友生 作會心言語 讀會心時文 此至樂 而何其至稀也 一生凡幾許番)-48쪽

연암은 또다른 글에서 벗에 대해 풀이하기를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양 손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벗은 '제2의 나(第二我)'이자 자질구레한 일까지 두루 도와주는 사람, 곧 '주선인(周旋人)'이라 하였다. 제이오(第二吾)는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중국에서 펴낸 "교우론"에서 붕우의 소중함을 역설하기 위해 한 말이다.
(필자주: 박성순, "우정의 운리학과 북학파의 문학사상", "국어국문학" 129, 국어국문학회. 2001. 12. 263쪽. 조선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秦請使로 연경에 갔을 때 명나라에 와 있던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교우론"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교우론"을 읽은 많은 지식인들이 벗은 '제이의 나'라는 견해를 수용했던 듯하다.)-51쪽

글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성인의 도를 싣는 그릇이라는 재도지문(載道之文)과 글은 도를 꿰는 그릇이라고 하여 상대적으로 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는 문이관도(文以貫道)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압축하는 용어다. 조선조 학자들은 글은 성인이나 현자의 정신세계를 담은 그릇으로 생각했다. 곧 글이란 도를 구현해주는 수단으로 인식하여 글에서 성현의 마음을 읽어 성현의 도를 체득하고자 했다. 도는 인간과 사물의 마땅한 것으로서, 도덕과 윤리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글은 성정지정과 온유돈후, 민심교화를 담아야 한다는 효용론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가졌다. 글은 언제나 도의 종속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초정(인용자주-박제가)은 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꾼다.

신은 글(書)이란 도와 더불어 생긴 것이라 들었습니다. 도는 형체가 없기에 글로써 보였고, 도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기에 글로 인도하였으며, 도는 언어가 없기에 글로써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물을 떠난 물고기가 없듯이 또한 글을 떠난 도는 없습니다. 글이란 하늘에 있어선 해와 별이 환히 빛나는 것이요,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도는 것이며, (아래에 계속)-239-240쪽

(위에서 계속) 구름과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땅에 있어선 강물이 흐르고 산악이 치솟는 것이며, 초목이 피고 지고 벌레와 물고기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있어선 신체의 온갖 동작과 머리카락의 모습이며 의복과 음식, 움직임과 말하는 모습이니 모두 글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필자주: "六書策": 臣聞 書者與道俱生者也 道無形體 則書以視之 道無方所 則書以導之 道無言語 則書以達止 故世無離水之漁 亦無離書之道矣 其在天也 則日星之昭明也 寒暑之消長也 雲霞之絢爛也 其在地也 則江河山丘之流崎也 草木蟲魚之榮落變化也 其在人也 則身體毛髮屈伸偃仰之態 衣服飮食動靜語默之象 無非書也
-239-240쪽

글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양수의 말과 같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 가능할까?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훌륭한 문장가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배치에 주목한다. 글이란 도(내용)를 드러내는 수단이라 인식했던 조선조에 형식은 단순히 내용을 실어 나르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문의 독자적 가치를 모색하는 조선후기의 많은 문인, 학자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형식적 장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른바 사법(死法)이 아닌 활법(活法)을 못개했으며 편장자구(篇章字句)의 구성에 관한 이론들을 세워 나갔다.
(필자주: 정민 "고문관의 세 층위와 활물적 문장 인식", "시학과 언어학" 1, 시학과 언어학회 2000)-267쪽

강력한 규범과 맞서기 위해선 글쓰기 배치가 중요하다. 말하려는 주제가 심각할수록 억압이 크게 작동하는 사회일수록 글의 배치, 곧 형식은 내용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글의 배치에 따라 설득의 효과가 달리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럴 경우 연암은 주변을 가볍게 위장하거나 혹은 우언의 방식을 즐겨 쓴다.-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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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0-0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세기 연암 그룹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돼 있는 것 같다. 역시 좀 더 이전으로 올라가 보지 않으면......
그건 그렇고, 원문 타이핑하다가 어라? 하고 생각한 게... 모르는 글자가 한 개뿐이었다. 이거 기뻐해도 되는 거지? 연암 그룹이 쉬운 글자를 쓰는 애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도 반 년 동안 좀 는 거 맞지? ^^;;
 
수사학 -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7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안재원 편역 / 길(도서출판) / 2006년 9월
품절


[27장]
아들: 연설가의 힘에 대해서 이제 다 설명하셨으므로, 연설 구성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버지: 연설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중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감정이 서론과 결론에서 자극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분은 사실 기술이고, 세 번째 부분은 논증인데, 이는 연설에 신뢰감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강조는 원래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종종 연설의 시작에도, 하지만 연설의 마무리에서는 언제나 사용해야 하는 표현 방법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뭔가 입증되었거나 반박되었을 때, 이 경우 [강조]가 요구되는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강조해야 한다. 강조는 감정이 실린 격렬한 논증이기 때문이다. 논증이 증명을 목적으로 삼는 반면, 강조는 감동을 목적으로 삼는다.-134쪽

[57장]
어떤 일들에서 그것이 상실되었거나 잃어버릴 위험이 있을 때, 강조는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행복했다가 불행해진 사람보다 더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경우는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행복한 처지에서 불행으로 추락했다면, 어떤 사건이든 이는 그 자체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떤 사람의 총애를 잃고서 쫓겨난 경우, 어떤 [귀중한] 것을 상실 중에 있거나 이미 상실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불행 속에 처할 것인지가 간략하게 표현된다면 사람의 심중을 뒤흔들게 된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표현해야 함은] 특히 남의 불행 때문에 생겨난 눈물은 금방 메마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역자주-이 토포스는 지나친 감정 표현을 경계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고, 수사학자 Apollonius의 말이라고 전해진다.) 강조할 때에는 어떤 것도 상세하게 설명하려 들어선 안 된다. 너무 상세하면 자잘하게 보이고, 강조에서 요구되는 것은 웅장한 무엇이기 때문이다.-204쪽

[79장]
사실, 수사학이란 다음 아닌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풍부하고 [청중의 범위에 있어서] 넓게 말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실은 원천에 있어서 변증론과 같은 곳에서 흘러나왔지만, [사용하는 표현과 주제의 범위가] 더 풍부하고 [대상 청중의 범위가] 더 넓으며 마음을 움직이고 일반 대중의 감각과 취향에 더 가까이 가 있는 덕목일 뿐이다.-258쪽

[140장]
아버지: 선과 악에 대해서, 공평함과 부당함에 대해서,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명예와 수치에 대해서, 이렇게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연설가는 논의 주제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단 말인가? 이런 이유에서 너는, 내 아들 키케로야,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규칙들과 지침들은 마치 저 아카데미아 원천으로 가는 길의 안내 표지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원천에 나의 안내를 통해서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도착한다면, 그때 너는 이 규칙들 자체를 더 잘 알아보게 될 것이고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이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들: 저도 실은 그렇게 되기를 진실로 열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께서 약속대로 설명해주신,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가르침은 저에게 뭔가를 더 바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백하고 충분한 것입니다.
<수사학 끝>-396쪽

140장의 역자 주석

철학의 강조는 키케로 수사학의 핵심 요체인 이상적 연설가(orator perfectus)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이상적 연설가는 하나의 형상(forma)인데, 이 형상을 다루는 학문은 철학이지 수사학이 아니다. (중략) 이 형상은 플라톤의 이데아이며, 키케로는 이를 forma라고 번역한 것이다. 철학의 강조는 이상적 연설가를 구성하는 방법에서도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키케로는 철학의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강조한다. 키케로가 이렇게 철학을 강조하는 까닭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키케로의 연설과 관련된 확신이다. 즉 사람들이 철학 없이는 진실하고 제대로 된 연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보편적이고 풍부하고 상세하게 말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학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철학과 수사학의 분리가 가져오는 결과 때문이다. 키케로는 <연설가> 제12장에서 이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렇게 전문 지식인에게는 대중적인 설득력이, 달변의 연설가들에게는 세련된 교양이 부족하다."(아래에 계속)-397쪽

(위에서 계속)키케로는 이 사태의 원인을 사람들이 철학과 수사학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상호 연계 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취급한 데 있다고 본다. 이 분리는 결과적으로, 진실하고 완벽한 연설로 가는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키케로의 입장을 대변하는 크라수스는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철학과 수사학의 분리를 강렬하게 비판한다: "마치 혀와 심장의 분리와 같은 저 이상하고 백해무익한, 그래서 비난받아 마땅한 분열이 생겨났다. 한 무리는 우리에게 지혜만을, 다른 무리는 말하기만을 가르치도록"(제3권 제56장). 아버지 키케로가 긴 대화의 숲을 거쳐 아들 키케로를 철학의 샘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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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9-1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C46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Partitione oratoriae"의 역서. 역자는 서울대 고전학 과정에서 "헤시오도스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으로 석사, 괴팅겐 대학에서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를 받은 고전 수사학 전문가이다. 현재 고전수사학에 대한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전문가답게 상세하고 멋진 주석을 붙여주었다. 게다가 무려... 라틴어 원문이 있다!! 가지고 싶어. 누군가 선물해 주지 않으려나... ㅠㅠ
변호사로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제적인 논의를 이끌어 오던 저자가 마지막을 철학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끝맺는 것이 인상적이다. 역시 글쓰기는 철학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