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구판절판


그 사회면 밑에 경시청 경찰관 모집 광고가 실려 있었다.
"알고 있지?" 세이지(淸二)는 그 광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작년 말부터 경시청이 대대적으로 순사를 모지하기 시작했어. 경찰 기구가 바뀐다더군. 순사가 만 명이나 부족하대."
다즈(多律)의 얼굴은 한층 불안해졌다.
"당신이 순사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당신은 제복 입은 남자를 싫어하니까."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 싫은 거예요."
"헌법도 바뀌었고 경찰도 민주 경찰이 되었어. 전쟁 전의 경찰하고는 달라. 내가 순사가 되는 게 싫어?"
"아뇨. 당신이라면 거드름이나 피우는 경찰관은 되지 않겠지만..."
"뭐가 걱정이야?"
"위험한 일이잖아요."
"무슨 일이나 어느 정도는 위험해. 학교 선생님이라면 또 몰라도."
"당신한테 잘 맞아요?"
"난 이런 남자야." 세이지는 말했다.
철이 들 무려부터 의식했다. 군대에 징집된 후에는 확신으로 변했다. 나는 융통성 없는 옹고집이다. 질서정연한 것이 좋다. 남이 나쁜 짓을 할 때 잠자코 지나칠 수가 없다. 성질이 이러니 순사라는 직업에 잘 맞을 것이다. 적어도 포목점 점원이나 시계 직공 같은 일보다는.
"나한테는 순사 일이 잘 맞을 거야."-18-19쪽

"군대에서 하사관 이상의 계급이었던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몇 명의 사내들이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부 세 명이다.
곤노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계급은?"
"제국육군 오장입니다."
"외지에는 가보았나?"
"북부 지부에 갔었습니다."
하사관이었다는 남자는 한 사람 더 있었다.
교관은 세 번째 남자 앞에 섰다.
하야세 유조(早瀨勇三)였다.
교관이 물었다.
"자네, 계급은?"
하야세는 대답했다.
"제국육군 보병 소위입니다."
세이지는 저도 모르게 하야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느낌은 없는 사내였는데.
곤노가 하야세에게 다시 확인했다.
"간부후보생 출신인가?"
"예."
사관학교 출신은 아니다.
"연대는?"
"사쿠라입니다. 보병57연대."
"제1사단인가. 그렇다면 전지는?"
"필리핀이었습니다. 레이테(Leyte)에서 전역했습니다."
곤노는 조금 기가 눌린 표정이 되었다.
"그런가." 곤노는 다소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수고 많았네."-30-31쪽

소등 전, 세이지가 기숙사에서 그날의 일보를 쓰려는데 젊은 구보타가 하야세에게 말했다.
"하야세 씨, 한자 좀 가르쳐주십시오."
하야세도 일보를 쓰던 참이었다. 고개를 들고 구보타에게 말했다.
"어떤 글자야?"
"질서입니다만, 제가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요."
"보여줘 봐."
구보타가 하야세에게 자기의 일보를 내밀었다.
세이지도 손을 멈추고 하야세와 구보타를 쳐다보았다.
하야세는 구보타의 일보에서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보로 사상 경향을 보는 거야. 이런 서류에는 평범한 내용을 쓰면 돼. 민주 일본이니, 정의 사회니 하는 건 자네가 써서 좋을 것 없어."
구보타는 변명하듯 말했다.
"저는 정말로 민주 경찰로 민중을 위한 순사가 되고 싶습니다. 경찰도 바뀌었잖아요?"
"상부에는 아직 좌익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버티고 있어. 훈련소를 졸업할 때까지 이런 내용은 쓰지 마. 순사가 못 된다고."
"그런가요?"
"좀 더 무난한 내용을 써. 순사의 마음가짐에 대한 강연이 인상적이었다든가."
"예."
세이지 옆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가토리가 조심스럽게 하야세에게 말했다.
"하야세 씨, 내 일보도 좀 봐주지 않겠어?"
-34-35쪽

훈련이 2주째로 접어든 어느 날, 체포술 시간의 일이었다. (중략)
하야세 차례가 되었을 때, 하야세가 의외로 격투기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대의 오른팔을 낚아채 순식간에 다다미 위에 깔아 눕힌 것이다. 그 직후에 하야세는 상대의 목에 팔을 둘러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상대는 고통스럽게 발버둥을 쳤다. 몇 초 동안 세이지와 동기들은 눈앞에서 무슨 짓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를 못했다. 하야세의 얼굴도, 목을 졸리고 있는 상대의 얼굴도 새빨겠다.
진심인가?
교관이 간신히 알아차리고 하야세에게 엄하게 말했다.
"그쳐! 이제 됐다. 끝났다."
하야세는 그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상대의 목을 팔로 졸고 있다. 교관이 하야세의 등울 무릎으로 찍어 하야세를 떼어냈다. 하야세는 교관이 건드리자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 얼굴이었다. (중략)
"죄송합니다. 조절한다는 걸 그만 깜빡했습니다."
하야세가 뒤로 물러나자 가토리가 하야세에게 물었다.
"당신 유도 했었어?"
하야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장에서 배운 게 다야."
세이지에게는 유도 이상의 기술이다, 라는 말로 들렸다.-37-38쪽

박물관 앞까지 왔을 때 하라다를 보았다. 하라다는 길바닥을 둘러보면서 걷고 있었다. 담배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선생님이라면.
세이지는 발길을 멈추고 하라다를 불러 아이의 출생을 알렸다. 이름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이름이 좋을지 떠오르지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라다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아버지가 가진 최대의 권리라고 말했다.
세이지는 말했다.
"고작 고등소학교밖에 못 나와서 글자도 제대로 모르고, 글자가 가진 심오한 뜻도 이해 못합니다. 선생님께서 살짝, 어떻게 지어야할지 방법이라도 가르쳐주시면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라다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성이 안조(安城)라고 했지? 사내놈이라면 이름은 세 음절이네."
"세 음절이요?"
"그래. 노보루나 가즈오나. 이게 노부가츠니 테루아키니 하는 네 음절짜리 이름이면 자네 성씨 밑에서는 조화를 못 이뤄."
"세 글자로 지으라는 말씀이군요."
"음이 세 개. 글자는 두 글자지. 읽기 쉬운 글자가 좋아. 아이 이름을 너무 복잡하게 지으면 안 돼. 아이가 고생해."
"세 음절. 두 글자. 읽기 쉬운 글자. 이거죠?"
(아래에 계속)-73-75쪽

(위에서 계속)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얼마 전까지 세상에는 충효니 승리니 하는 것들이 넘쳐났지. 지금은 세상도 변했어. 솔직한 마음으로 이름을 붙이면 되지 않겠나?"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하라다가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개비만 나눠주지 않겠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보니 세 개비가 남아 있었다. 세이지는 그걸 통째로 하라다에게 건넸다. (중략)

다즈는 웃는 얼굴로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사내아이예요. 한 관에 조금 못 미치는 커다란 아이예요."
산파가 갓난아기를 들어 올려 안겨주었다. 갓난아기는 지금 막 젖을 먹었다고 한다. 자고 있었다. 쪼글쪼글한, 다들 그렇듯이 원숭이같은 핏덩이였다. 자기하고 다즈, 누구를 많이 닮았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산파가 말했다.
"어미를 닮았어. 몸은 바깥 양반을 닮았고. 잘 크겠어."
다즈가 물었다.
"이름, 생각해봤어요?"
"응."
세이지는 갓난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미오야. 민주주의 할 때의 민(民)에 영웅 웅(雄)."
"좋네요." 다즈가 찬성했다.-7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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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2-25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 이름을 붙이는 장면에서 왜인지 눈물이 확 솟았다.
멋진 소설. 지금부터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마이리뷰를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