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얻게되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많지만, 나는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아주 가벼운 사실로 여기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책 하나로 인생이 바뀐다는 말은 믿지 않으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 것에는 그러한 부담감도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극장에 영화를 보러간다는 것은 내가 꼭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가 있는 반면,
시간떼우기 또는 데이트나 만남의 목적도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러갔는데 얻을게 아무것도 없다고 아까워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냥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즐거웠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책은 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는 동안 그 얘기가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한 건데, 꼭 거기서 뭔가의 해답이나 깨달음을 얻어야하는 것일까.
영화나 음악이나 만화가 상대적으로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왜 책은 그토록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일까?
나는 책도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보려고 한다. 최대한 가볍게. 최대한 내 취향에 맞게.
책에서 내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을수 있고,
책에서 뭘 찾으려고 하지 않으니, 더 가볍게 마음을 비우고 철저히 재미만을 위해 읽을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내가 고른 소설들 또한 철저히 나 개인적인 취향과 재미만을 반영한 소설들이다.
2009년에 내가 읽은 책들은 그 전년도 보다, 그 전전년도보다 더 적었던 것 같지만,
희한하게 올해에는 읽는 소설마다 그럭저럭 재밌었고, 최악이었던 소설들은 여느해 보다 적었던 것 같다.
나름 뿌듯한 독서였달까...
2009년을 뒤늦게 빠이빠이하면서, 2009년 내가 읽었던 책들중, 가장 재밌었던 책을 정리해보았다.
미즈무라 미나에 : 본격소설
올해 초에 읽었던 소설인데, 일본식으로 고쳐진 <폭풍의 언덕>의 변주쯤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대대로 부유하게 살아온 귀족집안 아가씨 요코와 근거도 확실치 않은 천한 출신의 다로의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는 사랑이야기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재밌었던 것은 요코와 다로의 사랑이야기보다,
대를 이어나가며 조금씩 바뀌는 가족사들과 옛날 부자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향수같은 것들이었다.
후반부에 맥이 조금 풀려버렸던 것 같기는 하지만, 가족사에 관련된 소설들을 참 좋아하는 관계로 차분하게 끝까지 읽어나갈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아마노 세츠코 : 얼음꽃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나는 소설에서 여자가 나약하게만 등장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더 악랄할수록, 더 계산적이고 교활할수록, 소설속의 여자 캐릭터는 매력적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남자 소설가들이 그리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무척 제한적이고, 표면적이긴 하다.)
여기, <얼음꽃>에는 여자가 그리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
이 여자는 자존심이 얼마나 쎈지, 자기 자존심이 짓밟히지 않기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저지른다.
무조건 선하기만 한 사람이 매력적이지 않은 것처럼, 무조건 악하기만 한 사람도 매력적이지 않은데,
아마도 세츠코의 <얼음꽃>에 등장하는 쿄코는 악하다기보다는 자존심에 목숨을 건 여자이다.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서, 어떤 짓이든 저지를 용기가 있는 여자.
선망의 대상이 될수는 없겠지만, 끝까지 절대로 지지 않는 모습에서 왠지 멋있다는 생각마저 들더라.
지나친 우연이 중첩되거나, 데뷔작인 관계로 약간 어설픈 면은 있었던 것 같지만,
60대에 데뷔한 아마노 세츠코 여사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쩌면 지지 않는 얼음꽃은 쿄코였을 뿐만이 아니라 세월에 지지 않았던 아마노 세츠코 여사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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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가즈아키 :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올해, 가장 우울할 때 읽었고 어떤 에피소드들에서는 너무 공감되고 괜히 기분이 비참해져서 눈물도 찔끔찔끔 났었다.
국내 번역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은 다 읽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내게 최고는 <13계단>이긴 한데,
이런 살짝 가벼운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들도 참 좋다.
따져보자면 <유령인명구조대>와 가장 비슷한 부류의 소설이 아닐까 싶은데,
에피소드들이 아주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마음을 파고드는 뭔가가 있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제목은 비관적이지만, 내용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미래를 알수 있더라도, 당장 내일은 바뀔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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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프렌치 : 산 자의 땅
올해 가장 스릴넘쳤던 소설은 <산 자의 땅>이었다.
소설의 무시무시한 흡입력에 비해 주목을 못받고 있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표지다.
표지 좀 잘 만들어주었으면...끔찍한 센스다.으으...
어느날 갑자기 납치당한 여자가 깨어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왜 납치를 당했는지도 모른다.
몇일이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납치되어있는 동안, 너무 절망적인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도망칠 기회를 얻게되고,
결국 탈출하게되었지만, 납치되기전 몇일간의 기억이 충격으로 사라졌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은 결심하게된다. 직접 자신을 납치한 범인을 잡으러 나서게 된다.
책장을 피는 순간 무서울 정도로 빨려들어가게 되어버리는 대단한 흡입력과 함께 예리하다못해 괴롭기까지한 심리묘사는 정말 만점을 주고 싶었다.
충격적이면서도, 파격적이고, 에너지가 절절 넘치던 소설이었고,
요즘 스릴러들이 너나 나나 막판으로 가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전을 꾹꾹 구겨 쳐넣는데
그런 점이 없어서 또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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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 : 벨벳 애무하기
열렬히 기다리던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안 레즈비언 3부작중 첫번째 작품인 <벨벳 애무하기>가 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등장했다.
추리 스릴러였던 <핑거 스미스>와는 달리 평범하게 태어나 레즈비언으로써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망가진 세계를 지나치며, 사랑과 존재감을 깨닫게 되는 성장소설로 읽을수 있는데, 장르는 다를지라도 작가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눈을 뗄수가 없더라.
세라 워터스 참 대단한 것 같다. 뻔한 얘기를 해도, 이 여자가 하면 뻔하지 않게 된다.
놀라울 정도의 대담함, 그럼에도 잃지 않는 서사의 안정감.
세라 워터스의 책은 빅토리안 레즈비언 3부작이 아니라도, 어떤 소설이라도 기다리고 싶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작품 "끌림"은 보라색으로 내주면 안될까...하며 아직도 나혼자 중얼중얼.....
보라색 책실을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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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언 플린 : 그 여자의 살인법
올해 읽었던 가장 지독한 소설중 하나인 <그 여자의 살인법>은 제목부터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읽기전에는 다소 걱정되기는 했지만,
막상 읽다보면 제목따위 스포일러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 소설에는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향마을로 소녀 살인사건을 조사하러가게된 여자가 밝혀내는 진실을 다룬 소설인데, 다소 지루한듯 이어지다가 막판에는 후폭풍이 몰아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소설들을 좋아한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되는데,
아...이러한 종류의 인간도 있구나, 이러한 종류의 기이한 심성도 있구나 하면서 뒤늦게 엄청난 서늘함에 떨게된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살인이라는 것보다도 뒤틀려버린 끔찍한 가족사와 관심이라는 것의 끔찍하게 서글픈 속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여자라면, 꼭 추천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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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 렛미인
올해 뱀파이어 소설들이 쏟아져나왔다. 소녀감성으로 읽을수 있는 <트왈라잇> 시리즈부터, 재 발간된 (내가 칭송해 마지않는)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기예르모 델토로의 좀비물같은 <스트레인>, 그리고 작년에 영화로 재밌게 보았던 렛미인까지.
<렛미인>은 조금 독특한 뱀파이어 소설이다. 영화와 똑같을 거라 생각하고 보지 않는다면 손해!!!
소설은 또다른 재미로 읽을수 있다.
왕따소년과 몇년을 살았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뱀파이어와의 사랑이야기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공허한 절망감같은 것도 흥미진진하게 읽을수 있고,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세한 사연들 또한 알수 있어서, 사실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보았던 영화이긴 했지만 영화보다 훨씬 좋았던 소설이고, 여타 다른 뱀파이어물에서는 찾을수 없는 기묘한 현실감같은 것이 더더욱 절망적이었고, 독특했었던 소설이다.
사실 <트왈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앤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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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요르츠버그 : 폴링 엔젤
예전에 미키루크 주연의 <엔젤하트>의 원작이었던 소설이다. 영화는 보지 않아서 어땠을런지 모르겠지만, 꽤 옛날 소설인데도 지금봐도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처럼 시작해, 갑자기 오컬트 호러로 빠지는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읽다보면 어물쩡 넘어가는 솜씨에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뿔뿔히 흩어져있던 조각을 모아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해 낼수가 있는데, 참 기묘하면서도 허탈하고, 동시에 신선했다.
이 책을 읽을 때 꽤 정신없는 상태였어서, 많은 사실들을 놓쳤던 것 같은데,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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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 제나로 시리즈가 올해 다 출간되었다. <신성한 관계>만 읽으면 다 읽게되는 셈인데,
올해에 읽었던 켄지 제나로 시리즈 중에서는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가 제일 재밌었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스릴러 소설은 이제 차고 넘칠 정도이지만, 그래도 데니스 루헤인이 쓰면 달라진다.
가벼운 기분으로 책을 읽다가 갑자기 책에 빠져들어가게 되었고, 다 읽을 때까지는 빠져 나오기도 힘들었다.
다른 연쇄살인물과 또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데니스 루헤인 소설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사회적인 절망감과 무력감을 들수 있는데,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런지 모르겠다.
아...소설속에서, 켄지에게 보내온 엄청난 양의 전단지의 비밀이 밝혀질때 그 소름돋던 순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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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렛 이스턴 엘리스 : 아메리칸 사이코
잔인한 정도가 무지막지하기 때문에, 감히 누구에게 추천하기도 뭣한 작품이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올해 읽었던 가장 충격적인 소설중에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나는 이 작품이 기묘하게 슬프기마저 했으니, 꽤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을 거머쥔듯한 남자의 이유도 알수 없는 연쇄살인 행각을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가장 냉정하고 잔인한 것은, 이유없는 쾌락살인도 아니요, 주인공 베이트먼의 냉랭한 독백도 아니다.
철저한 무관심과 자기 위주의 생각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모습이 제일 끔찍했다.
포르노와 예술의 경계가 메시지에 있듯이, 이 무지막지하게 고어한 미친 소설이 그저 싸구려 폭력소설이 아닌 이유는
책을 읽다가 나도 돌아버릴 정도로 반복되는 강박적인 행동들과 모든 행위의 무의미함과 모든 가치의 상품화와 그로인한 거대한 공허를 너무나 끔찍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비교적 강심장이라 느낀다면,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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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콕스 : 밤의 의미
가장 최근에 읽은 정말 재밌었던 <밤의 의미>는 세라 워터스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빅토리안 시대물이라는 이유) 관심을 가졌었던 소설이다.
막상 초반부를 읽으면서, 이 책이 그렇게 재밌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다소 지루했으며, 초반부부터 주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책소개로 이미 출생의 비밀이니 어쩌니 하는 사실은 알고 시작한 셈이기 때문에 책이 왜 이렇게까지 두꺼워야했는가에 대해 불만을 품긴 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냥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끈끈한 유기성과 뻔하지만 속아 넘어갈수 밖에 없는 것들에 혹해서 읽다보면 마지막에는 굉장한 후폭풍에 시달리게 된다.
추리소설이지만, 순소설이기도 한 작품이고, 마치 진짜 옛날 소설처럼 고전적으로만 풀이해놓았어도, 결코 고리타분하거나 뻔하지 않고, 작가가 이 작품을 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반영하듯, 꼼꼼하고 중후한 깊이감이 있고, 드라마틱하다.
다 읽고나면, 그 처절한 복수에 내 마음까지 황량해진다.
빅토리안. 고딕. 출생의 비밀.물고 물리는 복수.
이런 것에 혹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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