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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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상궂은 외모에 사기, 절도등의 전과도 만만치 않은 야가미,
그가 병원에 전화하고 두근거리는 이유는 얼마후 그가 골수이식수술을 하려고 준비중이기 때문이다.
평생 단 한번 누군가와 자신을 위한 선행을 하기로 한 친절한 야가미씨,
이 일로 지난 죄값을 치룰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하루하루 수술날만을 기다리는데,
수술을 앞두고 돈을 빌리러 찾아간 친구집에서 욕조에 몸이 끓여진 채로 죽어있는 친구의 시신을 발견하고,
불현듯 이 선행이 제대로 이루어질수 없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곧이어 뛰어들어온 세 남자에게 쫓기며 야가미는 자신의 골수를 병원에 전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같은 시간 도쿄에서는 비슷한 형식의 정체모를 연쇄살인이 벌어져,
야가미는 졸지에 용의자로 몰린다.
경찰과 자신을 뒤쫓는 남자들, 이중으로 쫓기는 야가미- 과연 골수를 안전하게 운반할수 있을것인가.
야가미는 골수이식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이중으로 쫓기게 되고,
밤새 헤엄쳐 강을 건너고, 버려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철로 위를 달리고, 뛰고 뛰어내리면서
책에도 나와있듯이 "철인 3종경기" 저리가라의 험난한 모험을 강행한다.
야가미는 왜 이렇게 힘든 여정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골수를 전달하려 하는것일까.
선행이 이 정도로 귀찮은 일이라면, 뛰고 달리고 쫓기면서 이미 의미가 상실될 법도 한데 말이다.
그는 세상에 속죄하고 싶은 것이다.
한때 가짜 연예기획사를 차려 꿈에 가득찼던 어린 소녀들의 마음을 짓밟았던 자신의 사기 행위가
죽어가는 백혈병 소녀를 살림으로써 속죄가 되기를, 그는 바랬던 것이다.
 


<13계단>이라는 싱숭생숭한 추리소설로 평단과 독자를 함께 사로잡았던 다카노 가즈아키의 <그레이브 디거>는
<13계단>과는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면서도 작가 특유의 의식은 살아있는 소설이다.
쫓고 쫓기는 숨박히는 추격전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하는 스릴러 소설이라는 점에서
추격전 보다는 반전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무겁고 애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13계단>과 다소 다르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한없이 애정과 동정을 느끼게 하는 면이 <13계단>과 무척 닮아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세 소설, <13계단>과 <유령인명 구조대>, 그리고 <그레이브 디거>에서는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대한 속죄 의식이 줄곧 흐른다.
 
<13계단>에서 교도관으로써 두번의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죄값을 무고한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점,
<유령인명 구조대>에서 자살자들이 100명의 자살자를 구해야 천국행 티켓을 얻을수 있는 점,
그리고 <그레이브 디거>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범죄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써
골수 이식이라는 선행을 택해 끝없이 들고 뛰는 점,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속 사람들은 무언가를 속죄 받아야 발뻗고 잘수 있는 인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조용히 앉아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땀이 뒤범벅 되어 들고 뛰고 고생시키고, 그제서야 속죄행위를 할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
두번째 공통점이 되겠다.
 
이 소설들에서 어떤 성격, 어떤 직업, 어떤 죄를 저지른 주인공이라도 필사적으로 속죄를 하려는 의식만으로도
독자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주인공들을 매력적으로 빛나게 한다.
근본적으로는 착한 사람들-<그레이브 디거>의 주인공 야가미 역시 한 때 누군가를 등처먹고
도둑질을 하고살아온 험상궂은 전과자이지만, 미워하거나 냉정히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야가미의 험난한 골수이식 여정을 보며  "힘내, 야가미씨!"하고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근본적으로 착하고 정많은 사람, 환경이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훨씬 다정하고 정의바른 사람이 되었을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지는 착한 마음이 든다.
 
숨막히는 속도감, 후반부로 치닿을수록 명확해져가는 범인과 여러 이해관계들,
그리고 또하나의 매력적인 주인공-더할나위 없이 박진감 넘치는 재밌고 짜임새좋은 소설이다.
불쾌지수높은 여름에 시원시원하게 볼수 있는 웰메이드 스릴러 소설,
올 여름 휴가는 <그레이브 디거>와 함께 하는 건 어떨까!!!아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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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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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어거스텐의 부모는 지나치게 사이가 나빠서 만나면 즉시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 싸움의 강도라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부부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라던가 "쌍..."라던가 하는 욕이 난무하고 집안이 부숴질 것 같으며, 정신적으로 나약한 어머니는
급기야 미쳐버려서 양초에 불을 켜는 대신 먹어버리지 않나, 남편이 자신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득차게 된다.
아들을 꽤나 생각하는 듯 하지만 책임질 생각은 전혀 없는 정신병자 어머니,
애초에 책임감 같은 건 없다는 듯, 자식에게 냉담한 알콜중독자 아버지.
얼마나 대단한 환경인가.
이런 환경에 비하면, 어거스텐이 학교를 가고싶어하지 않는 13살짜리 게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평범하기마저 하다.
 
아버지가 자신과 아들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과대망상에 부푼 어머니는
어거스텐을 평소 의존하고 있는 정신과의사 핀치 박사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후에는, 자식도 물건처럼 누군가에게 양도할수 있는 것처럼 핀치 박사에게 아들을 버린다.)
정신병자인 어머니 보다 더 정신이 나가있는 정신과의사 핀치 박사.
갈 곳 없는 정신병자들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무척 관대한 의사로 보이지만,
그건 허울일 뿐이고, 그렇게 양자로 받아들인 정신병자들에게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방치한다.
핀치박사는 건강한 분노 표출이 정신병 예방에 좋다면서,
딸들이 서로 험악한 말을 내뱉으며 죽일듯이 싸워도 내버려두고.
집안은 온통 쓰레기장에, 집안 사람들은 "개...."라던가 "쌍..."라던가 "ㅈ같은..."같은 말이 붙지않으면
대화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누구도 어거스텐에게 무언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 곳의 어른들은 열세살짜리아이보다 미쳐있으며, 자신을 책임지기에도 벅차
어거스텐은 열세살 어린 나이부터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며, 서른살이 넘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애초에 모든 것을 갖춘 백인으로 태어난 것같은 (빌) 코스비의 딸에게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학교가 가기 싫어져서 휴학을 하기위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물론 죽을 마음은 없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어거스텐의 성장기를 다룬 <가위 들고 달리기>.
작가의 이름을 눈여겨봐두는 센스가 있는 독자라면 알겠지만, 주인공 어거스텐은 소설가 자신이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자전적인 소설이란다.
소설이라면 웃을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결코 웃을수 없는 상황과 인간들이 속출한다.
과연 이 소설의 어디가 픽션이고, 어디가 논픽션일까. 어디를 보든 거짓말같은 현실이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외면하고 싶어하는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온통 충격적인 이야기뿐이라 거의 두들겨 맞거나 한바탕 욕설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책을 보는 내내 키득대면서 많이도 웃었다.
폭력적이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쿨함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소설이라,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하며 밝다.
그러니까-밝으면서 암울하다.
악질적인 것, 기분나쁜 것, 상처받을 만한 것을 대놓고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하거나 비웃어버리는
블랙코미디를 영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농담이 지나치게 독기넘쳐 불편할만한 소설이지만,
나는 착한 농담보다는 삐뚤어진 농담을 좋아하므로 소설속의 악질적인 농담을 공감하며 웃을수 있었다.
주인공 어거스텐의 일어난 사건에 뛰어들기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는 방관주의자적인 면모와
내면의 삐뚤어짐이 나와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엉망진창인 세상을 살아왔던 어거스텐이 더 나쁜 길에 빠질수 있는데도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노력했고 꿈을 꾸고자 했고, 뉴욕으로 가 소설가로 성공할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책임감없고 변덕스러운 레즈비언에, 자식을 버리기까지 하는 얄미운 엄마 때문도,
자유방임이 최고라 생각해 지나치게 자유방임해버린 나머지,
대책없는 분노덩어리를 양산해 내는 핀치 박사 때문도 아니다.
핀치 박사의 집에서 어거스텐이 얻은 유일한 교훈은 "내일은 내가 알아서-"였을 뿐이었다.
어거스텐은 비록 굴절된 내면을 가졌어도, 자기파괴를 일삼거나 비관주의에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해-세상이 이런 걸 어떻해-어쩔수 없잖아-하고 태생적인 불행은 포기하고
미래를 꿈꾸었고, 자신을 단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정신은 똑바른 아이였기 때문이다.
만약 무언가를 고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면 어거스텐 역시 망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종종 냉소적인 것과 비관주의를 같은 것으로 본다.
두개는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냉소적인 사람은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비관주의에 빠질만큼 성의있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깊이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고, 슬쩍 비웃고 방조해버리는 게으름이
상황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어 자신을 소진하고 망가뜨리는 것과 어떻게 닮을수가 있단 말인가.
종종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비관적이라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어거스텐을 비관주의자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사에 그다지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방조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멀쩡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사람들이 어떻게 미쳐가든, 무엇이 우리를 찢어 할퀴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과 꿈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살아나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인생은 어두운 암흑이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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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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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슬슬 몰려오고 있어서 공기가 온통 끈적끈적한 불쾌감으로 가득찬 가운데,
권여선의 단편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읽었다.
달착지근한 제목과 달리 엄청나게 불쾌한, 어쩌면 너무 달착지근한 나머지 끈적끈적해져버린 불쾌함을 느끼며.
문체는 너무나 건조한 나머지 살이 배일 것 같고, 이야기는 너무 집요한 나머지 짜증이 나버린다.
그리고 그건 현실과 현실의 인간의 집요함과 참 많이 닮아있다.
 
"가을이 오면"에서 못생기게 낳아놓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며 집요하게 고상함을 강요하는 어머니.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같은 동네 사는 선배 부부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선배의 외도를 오히려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부인에게 아무런 언지조차 해줄 생각없는, 지나치게  무심한 나머지
악질적인 인간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주인공.
"약콩이 끊는 동안"에서 한 여자를 둘러싸고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음란하게 그녀를 모욕하면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세 남자.
"솔숲 사이로"에서 홀연히 나타난 젊은이를 바라보며 그 젊음이 질투나 자신의 악을 대물림 해주려는 아저씨.
"반죽의 형상"에서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린 끈끈한 우정을 붙들고, 무심함인지 경멸인지
또는 그것이 한때는 사랑이었는지, 자신들도 깨닫지 못한 채 마음속의 끈적한 불만들을 꾹 누르고,
그들 사이에는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서서히 멀어지려는 두 여자.
"문상"에서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살의가 느껴지는 번들거리는 눈동자의 우정미라는 여자.
"위험한 산책"에서 남편이 잠든 새에 외출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버린 여자-
 
현실에 늘 있어왔지만, 눈여겨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인물들.
우리 모두 늘 가지고 있지만, 꺼내어 내색하기 싫어하는 추하고 집요한 집착과 악의와 환멸.
비정상으로 보이면서도, 아주 정상적인 인간의 창피한 감정들이 이 소설안에 가득차있다.
늪에 빠진듯 질척대기만 하는 감정들과 사소한 것에 화가 나버리는 일상과 사람에의 짜증스러움,
예의 "집요"하다는 소설속의 묘사처럼 집요하고 또 집요해 무섭기마저 하다

독특한 것은, 이 소설이 특별한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상황은 있지만, 뭐라 정리해서 말해줄만한 정확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무척이나 잘 읽힌다.

나는 잘난척하느라 길게 늘여쓰고,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어려운, 그러나 고상해보이는 단어를 나열해놓고
잡히지 않는 메시지를 잡으라 강요하는 작가를 싫어하는데,
표현하기 모호한 것을 정확히 집어내는 작가의 문장력도 무척 좋고, 
사유도 깊으며, 집요하게 짜증나는 심리묘사에 있어서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 나머지
읽는 나 자신도 어느새 화를 내게 되어버렸다.
이렇게나 건조하고 냉랭한데도, 그렇다.
 
"위험한 산책"의 이 갑작스러운 엔딩은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이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은 소설 바깥에서는 이런 진행으로 이루어질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끌려가는 것."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낙천주의자가 아닌 이상 마냥 밝을거라 희망을 품을수 없는 것처럼,
곧 현실이 될 보이지 않는 미래도, 과거에 끝나버린 관계나 미래에 시작될 관계들도,
불안하고, 이상하고, 찝찝하고, 불쾌하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수 없는 은밀하고 질퍽대는 이야기들-.
대단할 정도로 냉랭하고 삭막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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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 블랙 블랙 캣(Black Cat) 14
앤 클리브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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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를 좋아하고 시골생활을 싫어하는 편인데, 이유는 이 책에 모두 나와있다.
사람의 무리가 작으면 작을수록 점점 더 개인을 용납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초등학교 여자아이들이 몇몇씩 짝지어 다니면서,
내가 이 생각을 하면 친구도 이 생각을 하는게 당연하다고 믿는 것처럼,
유치하고, 저열하며 폭력적이다.
사생활이 없어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 것을 알려들고, 숨기고 싶은 문제도 캐내고 들려 하며,
멋대로 나를 동정하거나 조종하거나 충고하고 경고하려는 타인의 태도는 얼마나 불쾌한 것인가.
다정함과 친밀함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사실은 누군가가 술안주 삼아 씹을 치명적인 실수를 하길 바라고
그걸 두고두고 떠올리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어디로 향해야하는지 모를 분노를 뒤집어 씌우는 간악한 행위를
어떻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레이븐 블랙"에 등장하는 고립된 섬 셰틀랜드의 사람들이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고 모두가 친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심어놓은
우열의 계급이 존재해서, 가장 우등한 것은 역시 부자들이나 교육자 쪽이고,
가장 열등한 것은 산속에 혼자 외로이 사는 지능이 떨어지는 못생긴 노인이다.
8년전, 소녀의 실종에 노인은 별 증거없이 용의자로 지목되고 변태로 낙인찍혀 고립되었으며,
8년후, 또다른 소녀의 죽음에 노인은 영락없이 살인자로 찍혀버리게 된다.
너무나 외로워서 집앞을 지나는 누군가 그의 집에 들러 차를 한잔 마셔주면 몇년이 행복한 이 노인을
사람들은 늘 따돌렸었고, 사건이 터지면 노인부터 의심한다.
어쩌면 그들은 그가 당연히 범인이어야 한다고 몰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눈에 띄는 존재를 아무 이유없이 미워하는 것처럼.

그래서 나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셰틀랜드섬 주민들 중에서 유일하게 강한 사람은 이 노인 매그너스가 아닐까.
타인의 속좁기 이를데 없는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
따돌림 당하면서 살아왔어도, 외로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사람.
모두가 똑같은 것을 행하고, 똑같은 것을 바라봐야 자신이 인정받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자신만으로 존재해왔던 사람.
좋은 사람이란 인기 있는 사람과 동일한 말이 아님에도, 인간의 편견은 무섭도록 가차없는지,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사람들은 가장 밖으로 나와 타인의 부러움을 받는 양지의 존재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한다.
 
어째서 일까.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이용해 누군가를 해할수도, 이용할 수도 있는데.
무섭지도 않나.
편견에 갖혀 사람의 우열을 정해버리는 자신들의 은밀한 욕망이 누군가를 죽여간다는 것이
그렇게도 즐겁나.
 
<레이븐 블랙>은 자유분방하고 개인생활을 중요시 여기는 캐서린이라는 소녀의 죽음을 통해
8년전에 소녀가 사라진 사건을 재조명하고, 셰틀랜드 섬 주민들의 파괴 욕망과 은밀한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소설이다.
미국식 스릴러 소설처럼 강렬하거나 속도감 있지는 않지만
영국식 추리소설 특유의 고전적이고 섬세한 맛을 간직한 소설로,
감각적인 제목처럼, 살인사건 역시 무척 감각적으로 표현되어 왠지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게하는
비밀스러움이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미지도, 생각도 없이 속도감 뿐인 미국식 스릴러 소설을 싫어한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큰 저택에 갖혀 사는 노인의 이야기.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을 만들었고,
어느 날 공놀이를 하던 아이가 굴러가버린 공을 줏으려다가 노인과 만나 그의 진가를 알게되는 이야기.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얘기를 떠올리며,
누군가 매그너스 노인의 초라한 집에 들러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다정하게 말 걸어주기를 바랬다.
이 나약해보이지만, 강한 노인에게 누군가 행복할 권리를 쥐어주기를.
 
 
p.s 블랙 캣 시리즈는 언제나 표지가 예뻐서 소장하기 좋다.
(심지어는 재미없어도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표지만으로는 장르소설 출판사 중 최고가 아닐까-싶은 나 혼자만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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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6-2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과 색다른 작품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도 블랙캣 시리즈는 만족스럽죠^^

Apple 2007-06-2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넷...^^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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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신뢰.
세상에서 가장 매치되기 힘든 위험한 두 단어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두가지를 함께 두고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관계는 완벽하다.
기리노 나쓰오의 2002년작, <아웃>을 쓰고, <부드러운 볼>을 쓰고, <그로테스크>를 쓰기전에 썼던
<다크>를 요약하는 가장 함축적인 말은 "돈"과 "신뢰"이다.
<다크>에서 등장인물들은 고작 몇백만원 되는 돈에도, 오랫동안 쌓아온 우정을, 사랑을 배신해버린다.
애초에 그들에게 얄팍하고 차가운 공생관계는 있었을 지언정, 신뢰가 바탕에 깔린 끈끈한 정은 없었던 것처럼.
 
사립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여자 무라노 미로는 마흔살이 되면 죽기로 한다.
마흔살이 되려면 2년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의 삶은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다.
엄마, 남편, 사랑했지만 자신이 배신했던 남자-모두 죽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꿋꿋히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많은데, 미로는 왜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을까.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믿지도 못하는 자신의 삶에 지쳐버린걸까.
여기서 그치면 참 다행이겠지만, 미로는 혼자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녀시절까지 조금 무뚝뚝한 부녀관계라고만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죽일 생각을 한다.
 
의도는 했지만,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붓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한 결과 살인이 아닌 살인을 하게 되어버렸고,
마흔살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미로는 현장에서 도망쳐버리고,
장면을 목격(?)한 의붓아버지의 내연의 처가 죽이겠다고 미로를 찾아나선다.
의붓아버지와 친한 동료였던 대만 출신 야쿠자 데이 역시 다른 이유에서 미로를 찾아나서기 위해,
한때는 미로의 친구였던 게이 도모베를 구슬려 시각장애인 여자, 야쿠자, 게이-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은 미로를 쫓기 시작한다.
미로는 도망칠 곳을 찾아 거리를 헤메이다가 한국인 여권브로커 서진호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부산으로 도피하게 된다.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답게도 처음부분과 끝부분이 전혀 달라,
읽으면서 예상할수 없게도 만들면서 차츰차츰 변질되어가는 소설이다.
추악한 거리, 온통 괴이하도록 낯선 사람들, 하지만 차마 부인할수 없게 만드는 인간의 독-
기리노의 소설들이 늘 그렇듯이 암흑과 절망, 폭력과 독기로 가득차있으면서,
한가지 결과나 반전을 미리 정해놓고 쓰는 것 같지는 않은 즉흥성의 놀라움이 낯설게 읽는 내내 밀려온다.
 

인터뷰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세상은 점점 희망이 없어질거라 말한다.
그리고 그 얘기를 자신의 딸에게도 해준다고 했다.
이 암흑과 불결한 독기로 가득찬 도시의 추격전을 바라보면서,
인간이란 참 믿을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가 이야기 했던 희망없는 미래는 이 소설에서 볼수 없었다.
어쩌면 진짜 세상에는 원대한 포부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미 못말리는 몽상가일지도 모른다.
그런 원대한 포부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래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무언가 있지 않은가.
"네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하는 소망들.
가끔은 누군가에게 요구받으므로써, 상대방을 들뜨게 하는 그런 소망들-그것이 희망이 아니라면 과연 뭘까.
마흔살이 되면 죽겠다던 미로는, 누군가를 만나 더 살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결심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아이를 낳기로 한다.
돈에 배신당했고, 돈때문에 누군가를 배신했던 여자-이 비열하고 간악한 여자는 사랑을 하고나서 변한다.
믿고 있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는 않아도 또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을 하는 이런 것이 희망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있고, 그중에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세상은 완전히 암흑은 되지 않는다.
인간의 미래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한번쯤 얘기해본적이 있던가.
"날 믿어,제발"이라고.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언젠가 한번쯤 해보기로 했다.
정말로 믿을수 있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초반부터 술술 잘도 읽혔던 책이고, 끝까지 도대체 얘기의 끝이 뭘까 궁금해하면서 열렬히 봤긴 하지만,
다 읽고나니 아쉬운 점이 많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까지, 미로가 의붓아버지를 죽이려했던 정확한 이유를 감을 잡지 못했다면
내가 너무 둔한걸까.
전체적으로 기리노 나쓰오의 다른 소설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것이 "미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 소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의 모든 소설중에서 가장 정통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소설이 아닐까도 싶고...
 
이 책은 칼보다는 닿지 않을지도 모르는 먼 거리에서 쏘아진 총알같았다.
비정하고, 투박하고, 한편으로는 애틋한-. 
 

p.s 책을 들추다가 깜짝 놀랐다. 표지의 여자와 그 뒷편에 인쇄된 기리노 나쓰오가 너무 닮아서...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표지가 아니어서,
겉포장을 무척 따지는 편인 나같은 얄팍한 독자는 그 점이 역시 아쉽다.
종종 오타가 나있거나, 따옴표 표시가 잘못되어있는 부분이 많이 보여서 편집 완성도 역시 아쉽다.
 
p.s 2. 생각보다 많이 우리 나라가 등장하고, 그중에서도 부산이 소설의 주무대라고 할수 있는데,
내가 서울에서만 살아서일까, 아니면 다른 나라소설이라서일까,
책 읽는데 왜 부산도 외국같이 느껴지는건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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