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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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슬슬 몰려오고 있어서 공기가 온통 끈적끈적한 불쾌감으로 가득찬 가운데,
권여선의 단편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읽었다.
달착지근한 제목과 달리 엄청나게 불쾌한, 어쩌면 너무 달착지근한 나머지 끈적끈적해져버린 불쾌함을 느끼며.
문체는 너무나 건조한 나머지 살이 배일 것 같고, 이야기는 너무 집요한 나머지 짜증이 나버린다.
그리고 그건 현실과 현실의 인간의 집요함과 참 많이 닮아있다.
 
"가을이 오면"에서 못생기게 낳아놓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며 집요하게 고상함을 강요하는 어머니.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같은 동네 사는 선배 부부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선배의 외도를 오히려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부인에게 아무런 언지조차 해줄 생각없는, 지나치게  무심한 나머지
악질적인 인간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주인공.
"약콩이 끊는 동안"에서 한 여자를 둘러싸고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음란하게 그녀를 모욕하면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세 남자.
"솔숲 사이로"에서 홀연히 나타난 젊은이를 바라보며 그 젊음이 질투나 자신의 악을 대물림 해주려는 아저씨.
"반죽의 형상"에서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린 끈끈한 우정을 붙들고, 무심함인지 경멸인지
또는 그것이 한때는 사랑이었는지, 자신들도 깨닫지 못한 채 마음속의 끈적한 불만들을 꾹 누르고,
그들 사이에는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서서히 멀어지려는 두 여자.
"문상"에서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살의가 느껴지는 번들거리는 눈동자의 우정미라는 여자.
"위험한 산책"에서 남편이 잠든 새에 외출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버린 여자-
 
현실에 늘 있어왔지만, 눈여겨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인물들.
우리 모두 늘 가지고 있지만, 꺼내어 내색하기 싫어하는 추하고 집요한 집착과 악의와 환멸.
비정상으로 보이면서도, 아주 정상적인 인간의 창피한 감정들이 이 소설안에 가득차있다.
늪에 빠진듯 질척대기만 하는 감정들과 사소한 것에 화가 나버리는 일상과 사람에의 짜증스러움,
예의 "집요"하다는 소설속의 묘사처럼 집요하고 또 집요해 무섭기마저 하다

독특한 것은, 이 소설이 특별한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상황은 있지만, 뭐라 정리해서 말해줄만한 정확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무척이나 잘 읽힌다.

나는 잘난척하느라 길게 늘여쓰고,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어려운, 그러나 고상해보이는 단어를 나열해놓고
잡히지 않는 메시지를 잡으라 강요하는 작가를 싫어하는데,
표현하기 모호한 것을 정확히 집어내는 작가의 문장력도 무척 좋고, 
사유도 깊으며, 집요하게 짜증나는 심리묘사에 있어서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 나머지
읽는 나 자신도 어느새 화를 내게 되어버렸다.
이렇게나 건조하고 냉랭한데도, 그렇다.
 
"위험한 산책"의 이 갑작스러운 엔딩은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이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은 소설 바깥에서는 이런 진행으로 이루어질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끌려가는 것."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낙천주의자가 아닌 이상 마냥 밝을거라 희망을 품을수 없는 것처럼,
곧 현실이 될 보이지 않는 미래도, 과거에 끝나버린 관계나 미래에 시작될 관계들도,
불안하고, 이상하고, 찝찝하고, 불쾌하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수 없는 은밀하고 질퍽대는 이야기들-.
대단할 정도로 냉랭하고 삭막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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